2017년 09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역사X파일]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가야사 복원을 기원하며(1) 가야금

    김용호 / 역사 스토리텔러

    지난 6월 초 문재인 대통령은 ‘약간 뜬금없는 얘기일 수 있다’고 스스로 밝히며 영호남 지역 통합의 취지에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갑작스럽게 부상한 ‘가야사 복원’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가까이에 있는 박물관의 여러 유물들을 통해서 “가야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가야의 역사는 여러 가지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먼저 가야인들 스스로 남겨놓은 가야 역사 기록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불행히 가야는 백제와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와 고려의 관점에서 패배자 가야로 약간의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식민 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야사를 심각하게 왜곡시켰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강단을 점유한 식민 사학자들은 왜곡된 가야사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수천 기의 가야 고분들과 다양한 유물에 대한 적극적 연구와 해석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야의 강역은 경상남도이지만, 실상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크게 아우르고 대마도對馬島와 큐슈九州, 나라奈良와 교토京都를 점유했습니다.

    가야의 실상은 생각보다 대단합니다. 가야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가야의 시작과 발전 과정에는 ‘남삼한’과 함께 ‘부여’와 ‘흉노’ 같은 북방 “기마족”이 많이 개입되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조선 북부여 역사 문화로부터 단절된 가야가 아닌,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은 가야로서 재조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의 작고 힘없는 가야를 탈피하여, 북방 초원 세력과 교류하고, 열도를 정복하고 동남아와 인도까지 미쳤던 해상 제국 가야로 위상을 격상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가야사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식민 사학의 잔재를 걷어 내야만 합니다. 가야사 복원 과정은 매국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나아가서 그 해악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몇 가지 관점에서 가야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600년 세월을 넘어서 전해져 온 가야의 악기 가야금을 통해서 가야인들의 철학과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김해(金海, 쇠의 바다)라는 명칭을 낳은 융성했던 제철 문명의 가야를 들여다보겠습니다. 한때 어업과 농업 국가로 오해받았던 가야가 아닌 기마족 특성을 과시했던 가야와의 만남도 주선해 보고 싶습니다. 가야의 국제 무역과 해상 제국의 면모도 살펴보면 더 한층 가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듯합니다. 가야는 부여와 백제, 그리고 열도로 이어지는 역사의 연결 고리입니다.

    통념적으로 우리가 역사를 이해할 때 먼저 인물(왕과 위인들), 강역(국가 영토), 전쟁이란 키워드로 접근합니다. 독자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역사는 인물, 강역, 전쟁으로만 설명될 수 없습니다. 역사가 흘러가는 바탕에는 분명히 정신 문화가 깔려 있습니다. 정신 문화는 종교, 사상, 철학부터 세세한 생활 모습까지를 만들어 내는 원동력입니다. 가야인들의 생활 모습에서 그들의 정신 문화를 이해하는 것부터 가야사 복원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국사 전체를 복원하는 숙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지금은 가야사 복원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우리는 한국사 전체를 복원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1,600년을 넘어 전해져 온 가야 악기


    중학생 시절,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에 레코드 가게에서 황병기씨 가야금 곡 테이프를 무작정 선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듣는 가야금 곡인데, 그때는 ‘가야’라는 나라 이름도 몰랐습니다. 2017년 7월 지금, 우리에게 “음악”은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1600년 전 가야인들에게 “음악”은 어떤 가치였을까요? 매스미디어와 SNS로 대표되는 인터넷 개인 미디어까지 세상을 덮고 있는 이 시대의 음악과 1600년 전 가야금과 우륵 12곡은 그 자리와 가치가 다릅니다. 음악에 담긴 이념과 정신세계는 사뭇 달랐습니다.

    가야금이라는 악기가 어떤 철학적 관념을 담고 있는지, 우륵의 12곡이 무엇을 표현한 것이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괜찮은 가야 역사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야금은 누가 만들었을까?


    가야사 첫 이야기를 가야금으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가야금이라는 악기는 “가야”라는 단어를 품고 있습니다. 가야의 금琴입니다. 금琴이란 악기 몸통을 자른 단면을 본떠 만든 글자입니다. 연이은 ‘王’‘王’ 두 글자는 현(弦 악기 줄)이 이어져 있는 모습을, ‘今’이란 글자는 줄 받침과 악기의 몸통을 형상하고 있습니다. 가야금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아마도 “우륵”을 떠올리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는 가야국 가실왕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羅古記云, “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而造之.
    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 이르기를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加耶琴, 亦法中國樂部箏而為之.
    가야금은 (국악부)쟁의 중中을 본받아(法) 만들다(爲之)

    - 삼국사(기) 권卷 제삼십이第三十二 잡지雜志 제일第一 락樂 중에서
    ※삼국사기를 삼국사로 부르는 이유는 월간개벽 2017년 5월호에서 필자가 이미 해명한 바 있습니다.


    가실왕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6세기경 어느 가야의 군주였는데, 많은 학자들이 대가야의 왕(하지왕 荷知王)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아라가야의 왕이라는 설, 금관가야의 취희왕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과 같은 시기의 인물로 짐작됩니다. 가실왕이 ‘쟁箏’이란 악기를 취하여 가야금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쟁이라는 악기의 어떤 점을 취하여 가야금을 만들었는지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원래 가야금은 이렇게 생겼다


    가야금 하면 떠올리는 현재의 가야금과 옛날 가야금은 조금 다르게 생겼습니다. 어떤 모양이었는지 조선 시대 그림 하나를 보겠습니다. 조선 시대 영조 임금 치세 시절 그림으로 이름은 석천한유도石泉閑遊圖라고 합니다. 누각 위에 매를 들고 있는 한 남자가 기둥에 기대 앉아 있고, 두 여인이 각기 다른 악기로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중 오른쪽 여인이 연주하고 있는 악기가 바로 가야금입니다. 가야금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끝 모양이 지금 가야금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긴 모양을 양의 머리와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양이두羊耳頭’라고 합니다. 1994년에 대전 월평동에서 악기의 일부분이 발견됩니다. 6세기 후반, 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줄을 메는 구멍이 8개이고 줄 간격이 2센티로 ‘백제 8현금’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민족 악기의 고유의 양머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왕실의 보물 창고 정창원正倉院에 가면 “신라금”(정식 명칭은 “신라금新羅琴 금박륜초형봉형金薄輪草形鳳形”)이란 이름으로 현악기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정창원 웹페이지에 “가야금으로 불리는 조선에서 기원한 악기”, “12줄로 된 것이 특징”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신라금’이지만 본래 가야금의 모습과 가까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양이두”란 우리 민족 현악기의 독특한 구조입니다.

    이 신라금의 구조도 양이두 형태입니다. 신라 유물 중 많이 발견되는 토우에서도 양머리 악기를 볼 수 있습니다. 경주 박물관에 가면 경주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토기의 장식 중 양머리 현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토기 장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쟁이란 악기에서 출발한 가야금


    일반적으로 ‘쟁’은 진나라 악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만든 것은 진나라 사람일지 몰라도 ‘쟁’은 동아시아(백제, 고구려, 가야, 진나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악기였습니다. 쟁이 어떤 악기이기에 모델로 삼았을까요?

    삼국사 32권 악樂 부분에 쟁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쟁의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형상한 모습이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형상하는 것이며, 가운데가 비어 있는 것은 육합을 따르는 것이다. 길이가 6자라 한 것은 율律의 수에 응한 것이고, 12줄은 사시를 취상醉象한 것이며, 지주 높이가 3치인 것은 삼재三才를 닮은 것이다.”

    옛사람들은 ‘쟁’에는 삼재三才(천지인天地人), 천원지방天圓地方, 육합사상(상하上下와 사방위四方位 : 공간 개념), 율려사상(육율려六陽律/육음율려六陰呂數), 12월령과 사시순환 개념 등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쟁’에 담겨 있는 동양적 철학과 사상을 그대로 채용하여 가야금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런 고차원적인 철학과 관념만 담긴 것이 아니라 가야금은 기능이나 음향 역시 개념만큼 매우 우수했습니다. 그렇기에 신라가 악기와 음악을 흡수해서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랜 세월 대중화되어 전해져 왔습니다.

    이종구 님의 『아무도 말하지 않은 백제 그리고 음악』에서는 “이러한 ‘쟁’이지만 12줄 고대 쟁은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고 합니다. 동양 사상과 철학의 정수가 담긴 악기 ‘쟁’은 사라지고 오직 지금은 가야금만 남은 셈입니다.


    가야금 12줄에 담긴 철학과 사상 : 12현은 12율의 다른 표현법


    동양 철학 사상의 정수가 담긴 악기 가야금의 12줄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가야 사람들이 12줄의 금으로 만들었는데 12월의 율(규칙 혹은 우주 원리)을 취했다고 합니다. 12월의 율이 무엇일까요? 가야금은 12개 줄로 구성됩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진흥왕12년

    製十二弦琴(제십이현금) 以象十二月之律(이상십이월지율)

    청, 흥, 둥, 당, 동, 징, 땅, 지, 찡, 칭, 쫑, 쨍
    - 『아무도 말하지 않은 백제 그리고 음악』이종구, 233쪽

    위 12개 소리 표현은 가야금 12줄이 내는 소리를 구음口音(사람 발음으로 현과 음을 구분함)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는 시대와 명인들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중요한 점은 12개 줄이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는 사실입니다. 12개의 각기 다른 소리, 이것을 두고 12월月의 율律을 취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12는 십이지지十二地支입니다. 12월은 십이지지를 바탕으로 12개월을 의미합니다.

    또한 12월 율은 아득한 상고시대로부터 내려온 음악의 바탕 “12율려”를 말합니다. “12율려”는 철학적으로 접근하면 음양오행 팔괘사상에 정통해도 어려운 주제입니다. 삼라만상 바탕에 깔려 있는 원리와 변화상을 전부 이해해야 조금 알 수 있을까요? 그러나 현상계에서 12율려는 ‘도레미파솔라시’처럼 “한 옥타브”를 의미하는 12개로 구분된 소리 체계입니다.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 “율관”이라는 것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12개 율려성律呂聲의 기준이 됩니다. 가장 긴 관이 “황종” 음을 내며, 가장 짧은 관이 “응종”이란 소리를 내서 12개 음역의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1600년 전 가실왕께서는 이러한 동양 음악의 원리를 바탕으로 12줄 가야금을 만드셨습니다.

    아득한 상고 시대부터 천제天際와 국가 예식, 예법부터 작은 행사까지 “음音”과 “악樂”은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12율”은 이러한 동양 음악의 바탕입니다. 그렇기에 「춘추」, 「예기」, 「시경」, 「주역」같은 수많은 고전에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라는 역사책에도 “율서”라는 부분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가야금을 통해서 가야인들에게도 “12율”이 중요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야금에 대해서 삼국사(기) 기록은 몇 줄에 불과합니다.

    12율려 이야기


    아주 옛날에 곤륜산의 북쪽 골짜기에서 위아래 구멍의 두께가 고른 대나무를 취하여 두 마디 사이를 잘라 그것을 불어 황종 소리로 삼았다. 또 12통을 만들어 봉황이 우는 소리를 본받았는데, 수컷 소리가 6이고, 암컷 소리가 6이어서, 소리에 음양이 있게 되었다. 황종ㆍ태주ㆍ고선ㆍ유빈ㆍ이칙ㆍ무역은 양성인데, 이를 6율六律이라 하고, 대려ㆍ응종ㆍ남려ㆍ임종ㆍ중려ㆍ협종은 음성인데, 이를 6려六呂라 한다. 음양으로 나누어 말하면 6율과 6려이지만, 본질에서는 서로 통하므로 합해서 12율이라고 하고, 이를 12월에 배합했다.

    … 중략 …

    12율의 순서는 황종ㆍ대려ㆍ태주ㆍ협종ㆍ고선ㆍ중려ㆍ유빈ㆍ임종ㆍ이칙ㆍ남려ㆍ무역ㆍ응종이다. 따라서 위 인용문에 나온 황종ㆍ태주ㆍ고선ㆍ유빈ㆍ이칙ㆍ무역의 6양성은 순차적으로 홀수 번째에 있는 율명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려ㆍ응종ㆍ남려ㆍ임종ㆍ중려ㆍ협종의 6음성은 짝수 번째에 있는 율명인데 순차적이지 않다. 짝수 번째의 율명을 순차적으로 늘어놓으면 대려ㆍ협종ㆍ중려ㆍ임종ㆍ남려ㆍ응종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6려를 배열한 것일까? 바로 6율과 합성合聲되는 순서로 배열한 것이다. 즉 황종은 대려와, 태주는 응종과, 고선은 남려와, 유빈은 임종과, 이칙은 중려와, 무역은 협종과 합성된다.

    대개 해와 달이 매달 그믐에 12차十二次에서 만나 오른편으로 도는데[우전右轉] 성인이 6려를 만들어 이를 본떴고, 북두칠성 자루가 12신十二辰에서 운행하여 왼쪽으로 선회하는데[좌선左旋] 성인이 6율을 만들어 이를 본떴다. 그러므로 양률은 좌선하여 음과 합하고, 음려는 우전하여 양과 합하여, 천지 사방에 음양의 소리가 갖추어졌다.

    -『악학궤범』 율려격팔상생응기도설律呂隔八相生應氣圖說

    신라가 받아들인 우륵과 가야금 12곡


    가야 가실왕의 명으로 12곡을 만들어 바쳤던 우륵도 훗날 가야가 쇠락하자 신라 진흥왕에게 가야금을 가지고 의탁합니다. 진흥왕은 사람을 보내 우륵의 기예를 전수받게 합니다. 전수자들은 12곡을 전수받아 5곡으로 요약하고 진흥왕은 이 5곡을 취하여 신라의 대악으로 삼게 됩니다. 전수자들은 12곡을 5곡으로 개편하면서 본래 곡이 번다하고 음란, 바르지 못하다고 평가합니다. 신라의 신하들도 가야를 망친 음악이라고 깔아뭉개려 합니다. 이 와중에 진흥왕도 가야왕이 음란하여 자멸했다고 언급합니다.

    아시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승자는 패자의 수준 높은 문화를 흡수합니다. 가야금과 12곡도 승리의 전리품이라고 할까요? 반면에 음란했다 번다했다 바르지 못했다는 악평은 패망한 군주의 몫이었습니다. 전형적으로 승자가 패자에게 많은 오욕을 뒤집어씌우는 논리입니다. 우륵도 자신의 12곡이 5곡으로 개편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작품이 폄하되고 함부로 재단되었으니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요? 하지만 가야가 패망하고 우여곡절 끝에 가야금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전해져 지금도 우리 음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야인들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음악이 1600년을 넘어 지금도 살아 있는 셈입니다.

    우륵의 가야금 12곡


    그렇다면 우륵이 지었다는 가야금 12곡은 어떤 음악이었을까요? 정말 안타깝지만 악보도 음악의 내용도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12곡 이름만 겨우 삼국사기 기록으로 전해집니다. 12곡의 이름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이達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입니다. 곡 이름만 가지고는 어떤 내용과 구성이었는지 어떤 음악이었는지 알 수 없어 아쉬움이 큽니다. 가야 여러 나라마다 말이 각기 다르니 음악(성음聲音)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이유를 들어 가야 가실왕이 우륵에게 12곡을 만들게 하였다는 것을 보면, 가야의 음악을 집대성한 것이 12곡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모든 곡을 우륵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식민 사학의 비정批正질


    가야금 12곡의 실체가 전해지지 않다 보니,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학자(식민 사학자)들이 이상한 주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륵 12곡을 그대로의 음악으로 보기보다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려고 고심합니다. 이들의 주장을 아직도 한국 가야사 사학자들이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논리 핵심은 음상사音相似입니다. 우륵의 12곡명이 12가야 명칭이고, 12가야의 명칭 이름이 특정 지역명과 비슷하니 12가야 이름이 12곡 이름이라는 식의 해석입니다. 쉽게 말하면 글자(한자)가 다르지만 어느 지역 지명과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니까 어느 지명으로 “비정批正”질을 하는 것입니다. 우륵의 12곡명을 언뜻 보면 지명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12곡이 12가야 이름이니 대가야가 12가야를 통합하려는 염원을 음악에 담았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에는 큰 허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가야 제국이 12나라인가요? 아닙니다. 두 번째, 곡명 중에 지명과 일치하는 것은 “거열”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12곡이 가야 명칭이라는 역사 기록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네 번째, 지명으로 비정하는 곳이 당시 가야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더 찾으면 많은 논리적 맹점들이 나오겠지만 대략 4가지만 생각해 봐도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물론 다양한 가설과 해설은 학문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가야 멸망 직전 가야 영역으로 볼 수 없는 지명까지 대입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기록이나 근거 없이 발음만으로 지명을 비정하는 것은 식민 사학과 그것을 답습한 한국 사학계의 전형적인 역사 왜곡 방법입니다. 그 주장대로 보면 대구, 경북 의성, 군위, 청도, 전북 임실까지 패망 직전 가야의 영역으로 봐야 합니다. 우륵의 12곡을 무리하게 지명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분히 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론과 연결을 짓기 위한 무리한 주장입니다.

    가야금이라는 12줄 악기에서 얽혀 있는 가야 역사를 살짝 들여다봤습니다. ‘가야사 복원’, ‘한국사 복원’이라는 대장정에서 가야금은 미미한 소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야는 한반도 남부에 있다가 금방 사라졌던 세력 혹은 국가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천 년 한민족 역사라는 큰 시야로 보면 가야 역시 고조선과 부여로부터 계승된 당당한 우리 한민족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또한 600여 년 지속하여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고대 오국 혹은 사국시대를 이루었던 역사의 주역이었습니다. 고조선, 부여의 후예이자 초원을 달리던 기마 민족의 특질을 이어갔던 우리 선조들이었습니다. 가야금은 상고 시대부터 우리 선조들 사이에 면면히 이어 내려온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음악성의 결실이었으며, 다시 수천 년을 넘어 지속되고 있는 가야인들의 문화 유산입니다.





    왜 양머리 모양을 만들었을까요? 가야를 구성했던 사람들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가야의 건국 세력 중 일부는 북방 기마유목민족(부여, 흉노계)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키타이(색족), 흉노, 그리고 한민족까지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던 사람들에게 양은 너무나 친근하면서도 상징적인 동물이었습니다. 악기 현을 고정시키는 구조물을 양머리로 했던 이유를 기마유목민족의 문화 코드로 추정해 봅니다.

    삼국사기 32권 1악 원문
    傅玄曰, “上圎象天, 下平象地, 中空准六合,
    絃柱擬十二月, 斯乃仁智之器.”
    阮瑀曰, “箏長六尺, 以應律數, 絃有十二, 象四時,
    髙三寸, 象三才.”
    加耶琴, 雖與箏制度小異, 而大槩似之.
    *부현: 중국 진晉의 문신으로 글과 음악에 밝아 진晉 종묘宗廟의 악장樂章을 지었다
    *완우: 후한後漢 말에서 위魏의 문인. 채옹蔡邕의 제자. 건안칠자建安七子(후한 헌제의 건안 시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7명) 중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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