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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명장열전 | 동서통일제국을 건설한 최초의 세계인 칭기즈칸


    “그의 눈에는 불이 있고 얼굴에는 빛이 있다.” -몽골비사

    수많은 별을 가진 하늘도 돌고 있었다. 모든 나라는 우리를 배반하였다. 편안히 침대위로 들어가 자지도 못하고 서로 노략질했다. 푸른 풀로 덮인 대지도 구르고 있었다. 온 나라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편안히 이불 속에 들어가 눕지도 못하고 서로 공격했다. - 몽골비사

    단기 197년 서력기원 BCE 2137년, 갑신 단군조선 4세 오사구 단군 재위 원년에 아우皇弟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는데, 혹자는 지금 몽고족이 그 후손이라 말한다. - 환단고기, 단군세기


    칭기즈칸Chingiz Khan(成吉思汗, 1162~1227)
    1162년 - 오논 강 유역 숲에서 탄생, 보르치긴족으로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1171년 9세 - 아버지 예수게이 사망, 두 엄마와 7형제가 떠돌이 신세가 됨
    1178년 16세 - 부르테와 결혼
    1189년 27세 - 씨족, 부족 회의인 쿠릴타이를 소집해 칸의 칭호를 얻음
    1196년 34세 - 타타르 원정에 나서 대승을 거둠
    1204년 42세 - 몽골 고원 통일
    1207년 45세 - 서하(탕구트) 복속시킴
    1219년 57세 - 호라즘 원정
    1223년 61세 -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 건설

    1. 운명의 서곡, 칭기즈칸 전사前史


    12세기 초 몽골 고원은 언제나 흉흉한 긴장의 바람 속에 놓여 있었다. 땅에서 생산된 것으로는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것을 뺏어야 했고, 뺏기 위해 죽여야 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로 해서만 겨우 살아가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기 위한 싸움은 한층 더 치열해져 갔다. 당시 몽골 고원 절반은 광활한 대초원 지대였지만, 나머지는 원시림과 호수, 그리고 반半 사막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유목 부족들 간에 거주 지역에 따라 사육하는 가축의 종류와 생활양식에 차이가 있었다.

    몽골족은 칭기즈칸의 증조부인 카불칸 때 몽골 울루스ulus라는 정치적 독립체를 결성하여 인근 타타르와 금나라 변방을 침입하기도 하였다. 결국 몽골족은 금나라와 타타르족의 집중 견제로 2대 칸인 암바가이(보르치긴 씨족이 아닌 타이치우드 씨족 전사)가 사로잡혀 당나귀 형틀에 못 박혀 죽는 사건이 있었다. 뒤를 이은 키야트 씨족 출신 괴력의 용사 코톨라는 13번에 걸쳐 타타르족과 싸웠지만 패배하고 몽골 울루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때 몽골고원에 개입한 중원의 금金나라 세종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잔인한 대북방 정책을 감행한다. 몽골 남자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는 금나라의 감정減丁 정책은 몽골족들에게 골수에 박힌 원한을 심어 주었다. 이는 금나라 여진족이 자신들의 확고한 세력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3년마다 어김없이 벌인 유목민 학살 프로그램이었다. 이렇게 냉혹한 부족 궤멸 위기의 와중에 몽골족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자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강철은 시련 속에서 단단해진다


    1203년 테무친(鐵木眞)이라는 키는 작고 눈은 찢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몸에서는 말과 낙타의 노린내가 배어 있는 중년의 사나이가 몽골 동부지역에서 최강 케레이트 부족을 꺾고 패자가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테무친의 삶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테무친은 몽골부 보르치긴 씨족의 수장인 예수게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테무친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끝낸 직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 주먹을 꽉 쥔 채였는데, 주먹 안에는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그것도 새끼 양의 복사뼈만 한 핏덩이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용기, 전투, 그리고 승리의 표시로 해석되었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족 족장인, 테무친(바다나 호수처럼 ‘넓게 퍼진 상태’를 뜻하는 중세 몽골어) 우게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인간 테무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타고난 두뇌는 그저 평균치 정도였고, 어린 시절 개를 무서워하기도 하는 소심한 겁쟁이였다. 신체적 능력도 뛰어나지 못했고,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도 없었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평생을 생활했으면서도 외국어는 구사하지 못했고, 최고 수준의 학자에게 집중 과외를 받았지만 문맹이었다. 그의 가족은 문맹에서 벗어났는데도 말이다. 무쇠처럼 단단한 성품의 남자도 아니었다. 자주 울었고, 특히 여자들의 호통에 정신을 번쩍 차리기도 하고 판단력도 뛰어나지 못했다. 때로는 의심하고 화내기도 하였다.

    아버지 예수게이는 주변 타타르족과 대립한 용사였다. 예수게이는 테무친이 9살 무렵(혹은 13세라고도 한다) 혼인을 위해 옹기라트족인 보수쿠르의 데이 세첸을 방문하고 그의 딸 보르테와 혼인을 약속하고 돌아오는 도중 숙적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당했다.

    부친의 죽음은 테무친에게 닥친 역경의 시발점이었다. 초원에서 정치적 권력이란 어떤 확립된 제도에서 발생하기보다는 개별적 지도자들의 인물 됨됨이에서 나온다. 즉 강한 자 아래에 모이게 되어 있는 구조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들은 분열하였다. 친족들은 테무친의 가족들을 버리면서 재산인 가축들도 모두 빼앗아 갔다. 이는 다가올 겨울에 굶어죽으라는 것이었다. 오논 강
    (★)
    가는 초원에서도 북쪽 끝에 위치한 곳이다. 추위는 더 혹독하고 먹거리는 부족했다. 하지만 이 가족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테무친 일가는 강철 같은 여인 후엘룬
    (★)
    을 중심으로, 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유목민의 일상 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했고 풀뿌리와 생선, 들쥐 등으로 연명하였다.

    테무친은 연이어 지옥 같은 포로 생활에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는가 하면 화살에 목이 꿰어 죽기 직전까지 가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또한 전투에서는 몇 번의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아 절대적인 위기에 몰렸을 때는 불과 19명의 동지만 살아남았고 그들은 초원 끝 흙탕물로 갈증을 풀며 테무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부족은 이미 와해되었기에 테무친은 부족을 따지지 않고 조금씩 세력을 모으며 성장해야 했다. 그러면서 혈연과 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능력과 인망으로 사람을 다스리고 인재를 평가하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이런 경험들은 테무친에게 씨족 중심 사회가 아닌 동료들의 충성심과 우정을 더 믿게 만들었다.

    극렬한 고난을 겪고 나면 그 고난이 트라우마로 남아 나쁘게 작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고난이 더 큰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사람도 있다. 테무친은 후자의 전형이었다. 그는 믿을 사람과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기꺼이 도움을 주었던 친구들과의 우정에 주목했고, 진정 의지해야 할 가치는 자신의 판단에 의해 선택한 우정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믿음은 혈연이나 지연, 종교 같은 선천적이거나 이념적인 진영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마련이다. 건강한 개방성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부족의 분열과 배신 사건으로 테무친은 조직 내부에서 불화와 불만이 있는 자, 이탈자를 탐지해 내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역경은 테무친에게 배신하는 자와 의리를 지키는 자가 있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을 많이 얻어야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래서였는지 테무친은 이후 한 번도 배신을 당하지 않는다. 더불어 실제 조직 경영에 있어 칭기즈칸이 등용한 전투 지휘관의 조건은 용맹함, 두뇌, 인내심과 현장판단력 등의 능력 위주였다.

    칭기즈칸의 인품과 미덕


    칭기즈칸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제국을 건설한 삶의 과정을 통관해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이며 어떤 생각과 행동으로 대업을 이뤄 냈는지 그려볼 수 있다. 칭기즈칸의 인품과 자질, 상황에 대응하는 자세와 미덕 등에 대해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련을 견디고 이겨내는 강인함이다. 칭기즈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 시절의 고난을 겪으며 몸에 밴 테무친의 고독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주어진 모든 악조건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한 사람으로 그가 지닌 미덕을 말이다.

    그는 드넓게 트인 대지 같은 마음을 지녔다. 개방적 성격과 행동은 그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내 보르테가 약탈당했을 때 자신의 힘없음을 원통해하며 참담한 현실을 슬퍼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력 확장의 천재일우 기회로 활용하고, 아내가 만삭의 몸으로 적의 아이를 낳았을 때도 운명을 감수한다. 그리고 나그네라는 뜻의 몽골어 ‘주치!’라고 맏아들 이름을 지어 준다. 적의 아이조차 자신의 아내의 뜨거운 자궁에서 나왔기에 신이 주신 손님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위기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 정신은 불행을 완벽하게 뒤엎는 기능을 한다. 그는 불행 앞에서 분노나 복수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았다. 좌절에 빠져 넋을 놓지 않았고, 용서와 화해를 위한 힘을 준비하고 있었다. 운명을 직시하고 운명과 싸운 진정한 영웅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자신에게 무엇이 없고, 무엇이 필요하며 어디를 향해 가고 어떻게 그 길을 내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하였다. 인내, 포용력, 냉정함을 가슴에 길렀다. 모친인 후엘룬은 테무친의 장점을 “테무친은 가슴에 재능이 있다”고 했다. 소박하지만 확고한 장점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이는 다정한 사람,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가 외유내강 형 지도자였음을 말해 준다.

    둘째, 부족의 운명을 사랑하여 구원해 내는 모습이다. 칭기즈칸의 보르치긴 씨족은 가련하고 위기에 처한 굶주린 늑대와 같은 부족이었다. 언제라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가혹한 환경 속에 내버려진 채 지도자도 없이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이 연약하고 분열된 부족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과정, 그게 바로 테무친이 칭기즈칸이 되는 과정 속에 있었다. 칭기즈칸은 시련의 악순환을 끝매듭 짓고 평화를 가져온 왕 중의 왕이었다.

    셋째, 평화를 위해서 훌륭한 군인이 되어야 했다. 칭기즈칸은 유목민 사회를 통합하고 정착민의 성벽을 무너뜨린 대전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최대로 활용하는 집단이 승리하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효율적인 군사 제도와 행정 제도를 중시하였다. 유연한 자세로 정복지 포로들을 언제라도 끌어들여 보충하였다. 군대는 표준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토와 인구가 확장되어도 전체적인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대와 전쟁의 역사는 칭기즈칸 이후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넷째, 제국을 건설한 후 위대한 정치인이 되었다. 지도자 칭기즈칸은 유목민의 틀 안에서 벗어나 사려 깊은 심성과 건전한 상식을 가진 균형 잡힌 사람이자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행정가의 자질도 보여, 법령을 선포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이끌어 냈다. 또한 세종대왕처럼, 위구르어를 약간 수정하여 몽골인의 민족 문자가 되게 했다. 칭기즈칸 일가 3대에 걸친 통치로 유라시아는 보기 드물게 안정을 누렸다. 상업을 진흥시켰고, 역참제를 통해 문서와 서신, 물자들이 신속하게 이동하였다. 통행세를 폐지하고 통상로를 안전하게 하여 진정한 동서양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했다. 이로 인해 14세기에는 위대한 여행가들의 대륙 여행이 가능해졌다.

    다섯째, 신앙인으로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종교에 대해 매우 관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들 자신은 유일신인 천신을 숭배하였다. 천신을 텡그리라 하였다. 유일신을 믿었다고 해서 다른 하위의 신들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신과 접해서 그 뜻을 알아내는 샤먼을 두었는데, 그중 우두머리는 ‘천상에 가까운 자’란 의미로 텝 텡그리라 하였다. 칭기즈칸은 그의 곁에 자신이 천하를 얻을 것이라고 예언한 코코추라는 샤먼을 두어 의견을 경청하였다. (그를 따랐던 뭉릭의 넷째 아들은 무당이며 이름이 텝 텡그리로, 텡그리의 메신저가 칭기즈칸 옆에 있다는 의미로 당시 사람들은 인식했다)

    칭기즈칸은 영원한 푸른 하늘의 의지를 받드는 샤머니즘이란 의미로 ‘텡그리즘’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언제나 텝 텡그리, ‘푸른 하늘’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푸른색靑色을 숭상하였고 연관을 짓기도 하였다. 쫓기던 아이 시절, 숨어 지낸 호수는 푸른 호수였고, 그의 군대는 푸른 군대, 모두 푸른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그 푸른 하늘의 뜻으로부터 그의 성품과 기질이 나온다. 우주 삼라만상은 서로 연결돼 있으며, 우열의 층차가 없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모두 푸른 하늘의 뜻이니…. 이런 종교적 인식에 영향을 받아 칭기즈칸은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관용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칭기즈칸은 세상 사람 누구나가 각자의 신을 알아서 믿을 수 있도록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그의 통치 아래서 모든 종교는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2. 칭기즈칸의 사람들, 4준四駿 4구四狗


    칭기즈칸은 희대의 영웅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이룬 개척의 역사를 혼자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에게는 함께 열망을 품고 온몸을 불사른 동지들이 있었다. 칭기즈칸은 남의 재능을 평가하고 활용하는 데 어떤 편견도 없었다. 출신과 계급에 관계없이 오직 능력 순으로 선발했다. 여기에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칭기즈칸의 성격 덕분에, 그의 부하들은 빨리 결과를 보여 줘야 하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실력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칭기즈칸은 유달리 너커르(평생동지), 안다(평생친구)가 많았다. 칭기즈칸에게 너커르는 부하나 참모가 아니라 동지였다. 동지들끼리 뭉쳐서 일하지만 그래도 단일 창구가 필요한데, 칭기즈칸은 그런 유형의 리더가 되기를 희망했다. 오갈 데 없는 사람, 어려운 사람, 꿈은 품고 있지만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칭기즈칸의 제국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칭기즈칸 곁에는 전설로 기록되는 ‘네 마리의 준마駿馬’ 와 ‘네 마리의 개’라는 여덟 명의 인물이 있었다. 이 이름은 칭기즈칸과 싸웠던 적들이 붙여 준 것이다.

    네 마리 준마, 4준四駿


    네 마리 준마는 참모를 겸한 장군이다. 보르추, 무칼리, 칠라온, 보로쿨을 말한다.

    <보르추>
    는 칭기즈칸이 말을 잃어 버렸을 때 그를 도와 말을 찾아준 부잣집 막내아들 출신이다. 칭기즈칸은 신세를 진 대가로 말을 나눠 주겠다고 했다. 보르추는 단호히 거절했다. “벗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벗의 의무다. 도움의 대가로 말을 받는다면 그가 무슨 벗이겠는가.”

    물질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만남이며, 거짓과 배신이 춤추는 땅에서 믿음과 의리가 깃발을 올리는 첫 발자국이었다. 10대 칭기즈칸은 그 관계를 신성하게 여겨 다음과 같이 속마음을 전했다. “그림자 말고는 다른 친구가 없을 때 친구가 되어, 나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꼬리 말고 다른 채찍이 없을 때 채찍이 되어 나의 심장을 편안케 했다.”

    칭기즈칸 최초의 너커르로 제국의 공동 2인자이자 최고 개국공신이다. 젤메와 마찬가지로 칭기즈칸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로, 사적으로는 격의 없는 친구 사이였다. 칭기즈칸은 보르추에게 위험한 임무를 맡길 때 자신이 끔찍이 아끼는 애마를 내어 줄 정도로 우애가 깊었다. 칭기즈칸은 몽골 통일 후 의리의 사나이 보르추에게 알타이 부근 만호를 주어 다스리게 하였고, 보르추는 칸 옆에서 거침없는 충고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무칼리>
    는 노예 씨족인 잘라이르 출신으로 주르킨족 노예로 살다가 칭기즈칸이 주르킨을 정벌하자 부하가 되었다.

    프랑스 학자 펠리오와 앙비스는 그가 고려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전투에 뛰어난 재능도 없고 성과를 내는 데도 느렸지만, 정밀하게 사고하는 능력이 있었다. 신중하고 끈기가 있어서 장기적인 전략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몽골초원 통일의 분수령이 된 옹칸과 마지막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 서서 돌격해 들어갔다. 대몽골제국 총사령관이 되었고, 칭기즈칸이 내린 결정도 바꿀 수 있고, 9가지 죄 말고는 어떤 죄도 물을 수 없는 공신 중의 공신이 되었다.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정벌한 뒤 그에게 권權 황제라는 칭호를 내려 황하 이북을 통치하게 했는데, 고려 사람이라면 권씨였을지도 모른다. 무칼리는 너무 열심히 싸우다 탈진하여 1223년 봄, 53세에 풍운의 삶을 접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 3대에 걸쳐 과로사 할 정도로 충성을 다했다.

    <칠라온>
    칭기즈칸이 타이치우드족에 포로로 있을 때 그를 도와준 소르칸 시라의 아들이며 사적으로는 친구 사이이다. 형제 칠바이도 칭기즈칸의 중요한 부하였다. 용맹한 칠라온은 한번 문 목표물은 절대 놓지 않았다. 한번은 전투 중 낙마하자 적들이 덤벼들었다. 초원 전투에서 낙마하고 보병으로 싸운다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칠라온이 창을 고쳐 잡고 적 기병과 맞서 싸우니 기세에 밀려 적들이 달아났다고 한다.

    금나라 정벌에 참가했다가 죽었다. 훗날 칭기즈칸이 포상할 때, 칠라운의 아버지 소르칸 시라가 아들들을 대신해 천호장을 제수받는다.

    <보로쿨>
    4준마 중 가장 젊다. 칭기즈칸이 주르킨족을 정벌할 때 적진에서 거둬들인 전쟁고아였다. 칭기즈칸은 어머니 후엘룬이 그를 거둬 양자로 삼게 했다. 즉 칭기즈칸과 의붓형제가 된 것이다. 방패를 들고 칭기즈칸을 호위하는 측근 중 측근이다. 칭기즈칸은 그를 동생처럼 여겼다. 그는 칸의 음식을 맛보는 사람(부케울)과 요리사(바우르치)역할을 했다. 전투 이상으로 중요한 임무로, 급한 원정 중에도 비오는 밤에도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도 늘 음식을 제공해 칸의 속을 든든하게 했다.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와 절친한 사이였다.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았지만 요절하였다. 그의 딸 우시진은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아내가 됐다.

    네 마리 개, 4구四狗


    네 마리의 개는 싸움개의 이미지가 강한데, 신임하는 부하를 개라고 하다니 하겠지만, 몽골에서 개는 욕설이 아니다. 애정 가득한 표현으로 개는 인간을 따르는 늑대이다. 몽골에서 늑대는 존경받는 토템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늑대는 소속과 주군이 생기면 개가 된다. 충성스럽고 용맹하며 끈질긴 이들. 사납기도 하고 머리도 좋은 이들이다. 네 마리 개는 대장군으로 젤메 고아, 제베, 코빌라이 그리고 수부타이이다.

    [젤메 고아]는 몽골 사람들 가슴에 충용의 상징이다.

    ‘고아’는 ‘기이한 능력을 갖고 있는 아름다운 무당’이라는 뜻이다. 젤메의 아버지 차르치오다이(대장장이 일도 하였다)는 대 샤먼으로 대를 이어 칭기즈칸 집안에 충성을 다했다. 칭기즈칸 가족이 보르칸 산에 숨어 있을 때 젤메를 칭기즈칸에게 맡겼다. 그는 1204년 나이만족의 타양 칸과 벌인 ‘알타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다. 이 전쟁에서 ‘4맹견’이란 호칭이 탄생한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임기응변이 능해 다양한 군사 작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칭기즈칸의 전략과 정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로 칭기즈칸의 ‘아바타’였다. 평시에는 칭기즈칸의 케식Kheshig(왕실친위대)을 지휘했다. 수도방위사령관과 청와대 경호실을 겸했다고 할 수 있다.

    칭기즈칸이 “태어날 때 함께 태어나고, 자랄 때 함께 자랐다”며 친형제처럼 지내던 그는 대몽골 제국이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전사한다. 수부타이의 친형이다.

    [제베] 전투에 관한 한 프로 중 프로였다.

    활을 잘 쏘는 몽골족 사이에서도 명사수였다. 원래 칭기즈칸의 적일 때, 활로 칭기즈칸 목을 꿰뚫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목을 관통한 화살촉은 훗날 유라시아 전역을 휩쓴다. 적군이었던 그를 받아들여 ‘화살촉 또는 날 끝’이라는 뜻으로 제베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답게 속도전의 대가로 빠르고 정확한 행동과 이동으로 지구상에 따라올 장수가 없었다.

    서역 정벌에서 맹활약을 한다. 호라즘의 수도 사마르칸트를 함락시키고 술탄 무하마드를 추격한다. 추격전은 1만km 가까이 계속되었고, 무하마드는 카스피해 작은 섬으로 숨어들어 걸칠 옷도 없이 죽는다. 제베는 무하마드의 목을 들고 초원으로 귀환하던 1224년 삶을 마쳤다.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로, 전투에서 보여준 집요함은 ‘개’라는 별명에 딱 맞는다.

    [코빌라이] 가장 덜 알려진 인물로 원 세조 쿠빌라이와 동명이인이다.

    칭기즈칸이 자무카와 동맹을 맺고 공동 유목을 하다 갈라섰을 때, 칭기즈칸을 따랐다.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없지만 칭기즈칸의 동생 카사르와 함께 군율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임무를 받았다. 부여한 임무를 안정적이고 정확하게 실현하였기에 건물의 뼈대처럼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1211년 금나라 정벌전에서 전사하였다.

    [수부타이] 최고의 전략가이자 장군이다.

    전쟁의 신이라 불렸다. 전차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의 철제 전차 부대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녔다(또는 이 철제 전차 부대는 철제 무기와 갑옷, 도구 수리를 위한 이동식 대장간이었다는 설도 있다). 정통 몽골 부족이 아닌 삼림지대 부족원이었기 때문에 말을 타거나 활쏘기에 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젤메를 비롯한 칭기즈칸 수하 최고 지휘관들이 벌이는 토론과 거기서 오고 가는 질문들을 직접 보고 들었다. 10년 동안 지휘관들의 전투 계획과 그에 따른 수행 능력에 대한 사후 보고, 분석을 둘러싼 논의 과정을 통해 탁월하고 매우 실용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다. 전쟁 계획을 구체화하고 대규모로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 셈이었다. 외부 문화나 기술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고 이를 즉시 군사 전략과 전술에 반영하여 몽골군이 더 강해지는데 기여했다(이런 태도는 수부타이뿐만 아니라 몽골 지도층의 기본 태도였다).

    제베의 부관이었다가 금세 제베와 같은 등급의 대장군으로 성장했다. 제베와는 전설적인 콤비를 이뤘다. 제베는 기동전의 명수였고, 수부타이는 회전(회전會戰은 두 군대가 적당한 장소에 결집해 총력 대결을 펼치는 전투로, 특성상 국운을 건 모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명장이라도 일생 5회 이상 회전을 경험하기 힘들다)의 천재였다. 결정적인 대전투의 설계자로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고 현실화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칭기즈칸 사후 유럽 정벌의 실질적인 사령관이었다. 1221년부터 러시아 정복을 주장하고 추진한 인물로 단 2만 병력으로 쉴 새 없는 기습전을 통해 러시아를 단기간에 초토화시켰다. 1236년 마침내 12만 명이 동원된 러시아 본 원정에서 3년 만에 러시아를 정복하였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실패한 러시아 정복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정복한 나라는 32개국에 달하고, 61번 회전에서 승리한다. 그가 이룬 제국의 영토는 헝가리 국경부터 동해까지, 노브고로드 외곽으로부터 페르시아만까지, 바이칼호부터 양쯔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이었다. 당대 중국인들은 그를 ‘신의와 불변의 장수’라고 칭하며 존경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는 대몽골제국의 3대에 걸친 칸-칭기즈칸, 오고타이칸, 구육 칸-으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특히 수부타이는 제베와 함께 호라즘 술탄 무하마드 추격전을 통해 몽골의 복수의 끝판을 보여주었다. 그는 칭기즈칸에게는 더없이 충직한 부하였는데, 서역을 정벌하던 그에게 칸이 귀환 명령을 내렸다. 뚱뚱한 수부타이는 1주일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칸에게 돌아왔다. 말의 반동을 견뎌 내려고 자기 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였다. 72세로 다뉴브 강가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3. 세계 최강 몽골군의 비밀


    13세기 세계 정복에 나섰던 몽골군은 사실 몽골인으로만 구성된 군대가 아니었다. 몽골군은 그들이 정복한 지역 어디에서나 새로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켰다. 순수 몽골인뿐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들이 결합한 집단이 몽골군의 실체였다.

    경기병


    몽골군의 주력군은 경기병輕騎兵이다. 이들은 몽골 초원 유목민으로 태어나 걷기도 전에 말을 타기 시작한 이들이다. 몽골 경기병들은 적의 화살을 달리는 말 두 마리의 틈이나 말의 옆, 배에 붙음으로써 피한다. 심지어 적의 창과 도끼 공격도 이런 방식으로 피한 뒤, 말의 배나 꼬리로 나와 적을 찔러 쓰러뜨린다.

    몽골군은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뒤로 돌려 쏘는 배사背射, 즉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하였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 자세가 눈에 익지만, 당시 서양 기사들에게는 공포이자 경이였다. 몽골군은 경기병을 보내 무질서하고 조잡한 전투를 벌이다가 퇴각하는 척하며 적군을 끌어내곤 했다. 그들은 이런 퍼포먼스를 위해 ‘망구다이’(위장 공격과 도망을 겸한 겁에 질린 공격이란 의미 또는 신의 소유물이라는 의미)라는 특수부대를 양성했다. 망구다이는 원래 정예 기병으로 이들의 역할은 형편없는 전투 능력을 보여 적이 방심하게 하는 것이다. 이들이 도주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오른 부대가 추격에 나서면 몽골 기병은 말 위에서 뒤로 돌아 화살을 날렸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추격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덧 적군은 몽골 본대를 만나게 된다. 몽골 본대는 적군을 에워싸면서 섬멸하였다.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돌격하지 않고 초원에서 사냥법을 응용하여 적중률 높은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몽골군은 개개인을 쏘지 않고, 특정 장소를 목표로 살상구역(kill zone)을 정했다. 모든 화살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모든 사람을 마치 사냥감처럼 가운데에 몰아넣고 학살하였다.

    몽골 활


    몽골 활은 우리나라 각궁처럼 복합 재질
    (★)
    로 되어 있는 작고 가볍지만 강력한 활이다. 300m의 최대 사거리로 150m에서 실전 사용하였고, 50m로 근접해서는 어떤 갑옷도 관통하였다. 몽골군 기병 1인당 활 2~3개와 60발의 화살을 보유하였다. 화살은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여기에 최소한의 보급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능력으로 보급 문제가 거의 없었다. 끌고 다니는 말의 젖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했다. 놀라운 기동력과 생존 능력을 지닌 이들에게 약점은 경기병이 지닌 약한 방어력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면충돌보다는 활을 이용한 사냥 원진을 활용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효율적으로 공격해도 결국 정면 공격과 백병전으로 승패를 가늠해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몽골군은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유연성 있게 대처했다. 즉 이민족 출신의 중기병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래도 희생이 클 수 있는 정면 돌격에서 핵심 전력인 몽골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자신이 잘할 수 없는 분야에서 거리낌 없이 이방인들의 도움을 받는,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거나 자기들끼리의 힘만으로 해결하겠다는 태도는 몽골인들과는 가장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몽골인은 매우 실용적이었다. 피정복민들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였다. 전문가들을 적재적소에 배정하면서 이들에게 그에 적합한 대우를 해주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인, 아랍인 공병대의 활약이다. 이들은 공성 무기를 끌고 다니지 않고 적의 요새 근처에서 주변 재료를 활용해 공성 무기를 제작해 냈다. 이런 몽골인들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1258년 몽골군의 바그다드 포위 공격(티그리스강 도하 다리 설치, 초대형 투석기)이나 남송 정벌전(기병 중심 기동전에서 보병과 수군 위주로 전투 방식 변경, 회회포라 불린 투석기와 공성 무기와 고려 수군들)이었다.

    몽골 말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몽골 기병의 힘의 근원은 몽골 말이다. 몽골군에게 말은 생사를 결정하는 존재로 영원한 동반자였다. 말 중 제일 멋있고 빠른 말은 오늘날 아랍종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 계통의 말이다.

    이에 비해 몽골 말은 우리 조랑말과 비슷하다. 조랑말보다 체격이 약간 클 뿐, 머리는 크고 몸은 펑퍼짐해서 둔하고 느려 보인다. 몽골 말은 순간 속도는 처지지만, 뛰어난 지구력을 자랑한다. 말은 의외로 까다롭고 참을성이 부족한 동물이다. 하지만 몽골 말은 혹서와 혹한을 모두 견디며 산과 평지, 정글과 사막을 횡단한다. 몽골군은 이 말을 타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후대와 모든 지형을 정복했다(산악, 평원, 사막, 정글, 초원).

    몽골 말의 이런 장점은 천성만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 엄격한 훈련으로 길러진 것이다. 몽골인은 말에게 어려서부터 강한 인내심과 복종을 요구했다. 어미로부터 떼어 낸 새끼 말을 밤새 초원에 혼자 묶어 두어 공포감을 이겨 내게 하고, 언 땅을 파서 풀뿌리와 물을 찾게 하는 훈련을 시킨다. 추위와 더위를 이겨 내는 훈련, 굶주림을 참아 내는 훈련,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소리를 내지 않는 훈련이다. 춥다고 무섭다고 짜증난다고 울면 돌아오는 건 무시무시한 체벌이다. 칭기즈칸은 말이 더 빠르고 강하게 멀리 갈 수 있게 마구를 최대한 가볍게 했고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 재갈을 물리지 않는 건 폐활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장거리를 달리다 멈춘 말에게 곧바로 물과 풀을 먹이는 행위를 금지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방금까지 뛴 말의 앞발과 뒷발을 묶어서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다 말의 숨이 가라앉고 나서야 물과 풀을 먹였다. 격렬한 운동 뒤 몸을 잠시 긴장하게 하여 근육이 제자리에 잡히도록 하는 것이다. 말에게는 지옥이었다. 피나는 훈련과 노력으로 전투에 적응하고 기수에 복종하게 했다. 칭기즈칸은 이런 방식을 엄한 명령으로 시행하며 지침을 강요했다. 말은 건강하고 빠르고 유연해졌으며 말 자신이 전사가 되어 갔다.

    몽골군은 1인당 3마리 말을 데리고 다녔고, 암말을 선호했다. 말의 젖을 발효시켜 음료 쿠미스kumis를 얻었다. 언제나 말과 교감하며 살았고 자신의 말을 지극히 사랑했다. 몽골이 중국을 정복한 뒤 화가에게 자신과 말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뛰어난 말의 두개골을 유품으로 간직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몽골군은 말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칭기즈칸은 말의 기본권을 배려했다. 군용마 퇴역 제도였다. 일정 기간 전쟁을 겪거나 한 번 이상 장거리 원정에 참여한 말은 초원으로 보내 버렸다. 말 그대로 ‘전역’한 것이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군용의 삶이 끝나면 고기와 가죽의 재료가 되었는데, 칭기즈칸은 자신의 울루스에 태어난 죄로 갖은 고생을 한 말을 예우한 것이다. 훈련과 전쟁에서 해방돼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여생을 살게 해 준 것이다. 초원에서 가장 중요하고 한정된 자원인 풀을 복지 차원에서 퇴역마에게 내어 준 것이다. 그것도 기꺼이!

    군사 조직


    여기에 더해 칭기즈칸은 기존 부대를 개편하였다. 애초의 친족 위주 구성을 해체하여 10진법에 근거한 군사 조직을 만들어 냈다.

    우선 10명으로 이루어진 ‘아르반’(십호)이라는 분대를 만들었다. 호칭은 분대지만 기병의 전투력은 보병의 5배에서 15배 이상이다. 전투력만으로는 최소 중대 이상이었다. 바투르라는 무관이 지휘했다. 대원 중 한 사람이 포로가 되면 반드시 구출해 내야 했다. 그래서 아르반은 한 번 정해지면 바뀌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종교와 언어 정도는 공유해야 한다. 이들은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고 내왕한 지인들로 구성된다.

    10개 아르반을 모아 ‘자군’이라는 100명 단위의 중대를 만들었다. 이 자군을 지휘하는 대장부터가 전투 전문가다. 출신 계급과 종족에 상관없이 능력 순으로 선발된다. 자군 10개를 모아 1,000명의 ‘밍간’을 두었고, 밍간 10개를 모아 10,000명의 ‘투멘’을 두었다. 투멘이 우리가 아는 만호萬戶이다. 투멘의 지휘관부터 장군이다.

    하나 이상의 투멘을 관장하면 대장군을 뜻하는 ‘노얀’의 칭호가 붙는다. 칸이 관장하는 쿠릴타이에 노얀이 참석하여 각 단위 지휘관에 전술을 전달하는 시간은 불과 몇 분이면 충분했다.

    이 투멘이 몽골군의 한 전략 단위였다. 이런 체제는 기동전을 펼치는 기병에게 주효한 편제 단위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칸의 명령이 그대로 십호장에게 전달되는 일사불란한 명령 전달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통제되는 10여 개의 투멘으로 전혀 적이 예상하지 못하는 시간과 방법, 방향에서 기습을 하는 현대적인 전격전을 몽골군은 구사하였다.

    여기에 몽골군 조직은 기존 부족 관계를 해체하고 모든 부족을 서로 섞어 놓았다. 모든 부족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하였으며, 공동체 속에선 승리한 부족과 패배한 부족의 구별이 없었다. 패배자들에게도 동등한 시민권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전투를 거듭하면서 칭기즈칸의 군대는 줄어들지 않았다.

    정보 통신망


    또 하나의 강점은 뛰어난 정보 전달력이었다. 13세기의 세계에는 몽골제국에 의한 평화가 존재했다. 유라시아대륙 거의 전부가 하나의 정치 권력에 의해 통일되어 반세기 이상 평화를 유지하였다. 평화가 지속되자 동서양 교류가 역사상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동의 안전 보장과 더불어 엄청난 물자가 동서로 이동하였다.

    이 교류를 확대시킨 획기적인 수단이 바로 잠jam(역참)이었다. 본래 잠은 체계화된 릴레이 시스템이었다. 1,000km 밖의 군대를 통제 지휘가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50km마다 역참을 설치하고 약 400마리의 말을 대기시켰다. 제국의 끝과 끝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일종의 #통신 우편망#이었다.

    대칸 직할령에만 60,000km의 도로에 1,400개 이상의 역참이 설치되어 있었다. 칸의 파발꾼은 수도 #카라코룸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일주일 만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6,000km가 훨씬 넘는 거리를 일주일에 완주하려면 하루에 거의 1,000km 가까이 달려야 했다. 요즘에는 전파를 이용하거나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동차로 달린다면 가능할까? 하지만 교통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기에 이는 상당한 모험을 안고 있다. 지금 우리가 유라시아 횡단을 하려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체첸, 우크라이나 같은 분쟁 지역을 지나가야 한다. (정리 이해영 객원기자)


    ■참고문헌
    『역주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몽골비사』(유원수, 사계절출판사, 2004)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김호동, 사계절출판사, 2016)
    『밀레니엄맨 칭기스칸』(김종래, 꿈엔들, 2005)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잭 웨더포드 저, 정영목 역, 사계절출판사, 2005)
    『부족지』(라시드앗딘 저, 김호동역, 사계절출판사, 2002)
    『강자의 조건』(이주희, MID, 2015)
    『영웅의 역사7 대제국의 황제』(와카마츠 히로시 저, 윤소영 역, 솔출판사, 2000)
    『CEO칭기스칸 유목민에게 배우는 21세기 경영전략』(김종래, 삼성경제연구소, 2002)
    『몽골기행 칭기스칸의 땅을 가다』(박찬희, 소나무, 2014)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리처드 A. 가브리엘, 박리라 역, 글항아리, 2014)
    『오자병법』(임용한 옮김, 사단법인 올재, 2015)
    『테무친 to the 칸』(홍대선, 생각비행, 2017)
    『유목민 이야기 바람에 새겨진 역사』(김종래, 자우출판, 2002)
    『명장, 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임용한, 위즈덤하우스, 2016)
    『테무친 그리고 칭기즈 칸』(위안텅페이,강은혜 옮김, 재승출판, 2015)
    『초원의 전사들』(에릭 힐딩거,채만식 옮김, 일조각, 2008)
    『전쟁연대기 1』(조셉 커민스,김지원,김후 옮김, 니케북스, 2013)



    몽골고원의 세력권
    몽골고원은 크게 다섯 개의 주요 세력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동쪽의 야생의 사냥개 타타르족은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졌고, 사나웠기 때문에 주변 부족들과 척을 진 상태였다. 중앙의 사나운 늑대 케레이트족은 기독교의 네스트리우스교(景敎)를 받아들인 부족으로 일찍이 중앙집권이 이루어져 있었다.

    서몽골 고원의 하이에나 나이만족은 유목 제국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잘 정비된 군사 행정 체제를 갖추었다. 이들은 옆 케레이트족이 타타르 등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빠지면 어김없이 습격하는 집단이었다. 북쪽의 여우 메르키트족은 결집력이 강하고 주변 부족들이 위기에 처하면 서슴지 않고 공격하는 기회주의적인 족속으로 칭기즈칸의 아내를 빼앗아 오기도 했다. 생존을 위한 이런 영악함은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칭기즈칸이 메르키트족을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부족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굶주린 푸른 늑대 몽골족. 그들은 늘 굶주렸다. 과거 흉노제국의 3분의 1정도인 영토 안에서 사분오열해 있는 민족과 그 안에서 작은 부족별로 나뉜 채 전개되는 무서운 대립 갈등 배신의 참상. 몽골은 그 혼돈의 중심에 서 있었다.

    본래 헤이룽 강(아무르 강; 흑룡강黑龍江) 중, 상류 유역에서 목축과 수렵을 하던 몽골족은 8세기 중엽부터 역사서에 등장한다. 몽골의 어원은 ‘영원한 불’을 뜻하는 ‘몽고르’로 당대 기록에 ‘실위室韋’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 ‘몽올실위蒙兀室韋’라 불린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집단이 오늘날 우리가 몽골족이라고 보는 사람들이라 여겨진다.


    테무친의 인연들
    그가 세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 인연은 크게 셋이 있다.

    첫 번째는 부인 보르테의 아버지 ‘데이 세첸’으로 테무친의 역량을 꿰뚫어 보고 정혼의 약속과 의리를 지켰다.

    두 번째는 아버지 예수게이의 안다(의형제)인 케레이트 부족의 ‘옹 칸’이었다. 옹칸은 <삼국지>의 원소 같은 인물로 몽골을 통합하려는 야심도, 세력도 있었지만 우유부단했고, 손해를 보려 하지 않고 앉아서 이익을 챙기려 했다. 테무친의 곤경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다가 테무친이 결혼으로 얻은 지참금과 어느 정도 확보된 세력을 데리고 보호를 요청하자 비로소 그를 받아 주었다. 아무튼 그는 테무친이 성장하는 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세 번째는 테무친의 안다이자 최강의 적수가 되는 ‘자무카’이다. 자무카는 지략을 겸비한 인물로 출발선상에서 이미 테무친보다 앞서 있었다. 테무친의 아내 보르테가 메르키트족
    (★)
    의 습격으로 약탈당했을 때, 이를 탈환하는 동맹군에 자무카가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오논Onon
    강 러시아와 몽골을 흐르는 강으로 헨티 산맥의 동쪽에서 발원하는 총 길이 818km의 강. 칭기즈칸의 출생과 즉위가 모두 이 강 유역에서 이루어졌다.

    ★후엘룬
    올코노오트 씨족 족장의 딸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몽골인에게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같은 인물로 온갖 시련 속에서 테무친을 대지처럼 드넓은 가슴을 가진 칸으로 키워 낸 민족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몽골의 활
    은 나무로 틀을 잡고 양면에 동물의 뿔과 심줄(힘줄)을 끓여 압축해 붙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즉 시위를 당기는 쪽에 압축성이 매우 뛰어난 소나 산양의 뿔을 가공해 붙이고, 그 반대쪽에 신축성이 강한 심줄을 붙이고 있다.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 활 전체를 사슴 가죽으로 말아 감으며 온도 변화를 예방하기 위해 도료를 칠했다.

    ★메르키트 족과의 악연
    아버지 예수게이는 메르키트 족장 토크토아의 형 칠레두의 부인 후엘룬을 약탈해 테무친을 낳았다. 그 복수로써 메르키트족은 테무친의 아내 보르테를 약탈해 맏아들 주치를 낳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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