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구원의 빛 성지를 가다

[기고]
조양희(소설가) / 서울광화문도장


지난 5월 14일 ‘종도사님과 함께하는 초립동이 성지순례’ 행사가 있었다. 이번 3차 성지순례는 상제님의 탄강지와 외가 및 숙구지 마을을 경유하는 코스로 이루어졌고, 전국 도장의 책임자 도생들과 희망하는 일반 도생들이 함께 참례하였다. 이 중 성지순례에 처음 참여한 도생들의 경우 그 감회가 더욱 특별하고 남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갓 입도하여 순례길에 동행한 신입 도생 한 분의 소회를 담은 기행문을 소개한다.


성지를 향한 설레는 출발


성지순례를 떠나기 바로 전에 서울 날씨는 꾸물꾸물하다가 소나기를 뿌렸다. 막상 떠나는 날은 새벽녘 물빛 하늘에 오래도록 샛별이 지켜 주었다. 알 수 없는 예감에 가슴은 수런댔다.

자유로운 선택으로 입도한 지 20여 일 남짓한 시간, 나는 아무래도 성지를 밟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철없는 도생이다. 고작 몇 가지 에피소드 외엔 『도전道典』 속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잘 모른다. 그러나 한탄하기보다 앞으로의 시간이 나에게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고 자책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손발톱을 얌전히 다듬고 순례 가방을 정리하는 동안 안정을 찾았고 마음은 이미 성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정신을 오롯이 하며 첫째도 정성, 둘째도 정성 하나만으로 태을주와 함께 순례에 동참하기로 했다.

광화문도장에서는 3가지 방법으로 성지聖地를 향하나 본데, 그 중 나는 새벽 6시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팀에 속하게 됐다. 편안한 복장에다 따뜻하게 껴입었다. 새벽 6시 정각이 되자 어김없이 역 앞에 나타난 성실한 선배 도생님들과 KTX에 올라탔다. 기차는 서울에서 정읍井邑까지 단숨에 미끄러졌다. 역에 내려 부근 식당에서 두 팀으로 나눠 시원한 북엇국과 콩나물국을 시켰다. 빈속을 달래는 동안 일행은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 추측하건대, 성지에는 종도사님께서 직접 나오신다는 기대감이 커서인지 시원한 국이 담긴 뚝배기만 묵묵히 퍼 먹었다. 아침 빈속을 채운 만족감에 솟아오른 배를 쓸며 총알택시를 두 대로 나눠 탔다. 십여 분 신월리新月里로 향하는 도중, 중년의 기사는 “아, 거기, 보천교 말유” 하길래 이 지역은 여전히 보천교의 잔상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전국에서 대형 버스 20여 대가 객망리 마을 어귀로 모여들었다. 먼저 도착한 팀은 이미 논두렁을 옆으로 하고 마을 회관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회관으로 가는 길목에는 군데군데 안내원도 여럿 보였다. 누군가 건네주는 얇은 책자가 내 손에 쥐어져 살펴보니 ‘성지순례 가이드북’이다. 제3차라고 쓰인 것을 미뤄 볼 때 이미 두 번은 순례를 마쳤다는 뜻이다.

하느님이 오신 마을, 객망리客望里


이곳은 손바래기 마을이었다. 인류를 살려 낼 하늘의 주인을 기다린다는 전설이 있는 정읍 손바래기, 객망리客望里라는 시골 마을이다. 회관으로 오르는 길에 여성 안내원이 정중히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제님께서 공사 보신 우물이다. 땅 밑의 수맥을 아시고 “물이 솟는다, 솟는다”고 말씀하시며 영특한 7살 초립동 상제님께서 고사리손으로 땅바닥을 파셨다. 우물은 주위에 이야기가 생기고 문화가 형성된다. 상제님은 어릴 적부터 천지를 살리는 물, 생명수로 인류의 목마름과 녹祿을 해결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살려 낸다는 사명감으로 응고된 채 인류 구원을 준비하고 계셨을 것이다. 초립동들과 중고생들, 대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을 헤아리면 얼추 600여 명 이상 회관 앞으로 빽빽하게 모여들었다. 이제 상제님 탄강하신 생가는 누군가 사는 듯, 없는 듯했다. 나는 까치발로 홀짝 뛰어 담 너머 뜰 안의 정원을 훔쳐보았다. 창문 아래로 심어 놓은 싱싱한 초록의 대파들이 싱그럽고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곰살궂은 야그(이야기들)를 담은 채로 하얀 꽃 우산을 펴 들고 고즈넉한 집터를 지키고 있다.

하늘은 파랗고 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5월의 투명한 햇살은 뜨겁기로 만만치 않았다. 민감성 피부염을 앓고 있는 나는 누런 밀짚모자를 쓰고서 햇살을 눌러 잡았다. 탄강지 생가 뒷담에 솟아난 무성한 나무는 회관 공터로 두 평 남짓한 그늘을 제공하며 가지들은 자꾸만 늘어진 바람을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그분은 볕을 가리는 모던 패도라 등산모를 쓰시고 여름용 흐린 바지에 진한 마이재킷을 입으셨는데, 어디선가 듣고 있던 친근한 목소리였다. 내가 처음으로 뵌 종도사님은 그 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서서히 열강의 문을 열기 시작하셨다. 종도사님은 천주 문화의 주인이신 강증산姜甑山 상제님께서 신미辛未(1871)년 음력 9월 19일에 탄강하셨고 이 지역의 지리地理가 필연적으로 탄강지로 각인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열의를 담아 전해 주셨다.

평소에 ‘상제님께서 많고 많은 성씨 중에 왜 강씨 문중에 오셨을까’ 하는 의문도 쉽게 풀렸다. 전엔 들었지만 이해하려고도 안 했다. 이유는 이러하다. 강가姜家는 모든 성씨의 원시인데, 원시반본하는 우주 가을의 이치에 따라 강씨 성이 이 성업의 공사를 맡게 되었다는 도전 2편 37장 말씀 그대로다.

혈통은 상고 시대 배달의 신농씨로 시작된다. 고구려 때 병마도원수를 지낸 강이식 장군의 21세 손인 강계용이 진주 강씨 박사공파의 시조이다. 많은 분파를 타고 내려오다가 진주 강씨 박사공파 23세 손이요 진천공파 15세 손이시다. 나중에 백부인 강두중에게 양자로 출계하시어 13대 강부姜溥의 종손이 되신다(도전1:12 참조)

성모님께서 잉태하신 지 13달(384일은 의미를 주는 숫자) 만에 상제님이 탄생한 이유는 천상 백보좌의 가을 기운인 서방 금金 기운을 주재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시천주侍天主 주문의 열석 자 기운에 맞추어 오셨음이다. 상제님께서는 여섯 살 때 훈장에게 천자문을 가르침 받았다. 이내 스스로 하늘의 이치를 깨달았고 땅의 순리도 터득하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14세, 15세 때엔 한때 남의 집 머슴살이와 산판꾼으로 일하셨다. 배고프고 고달팠던 상제님의 청소년 시절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이런 지존하신 분께서 인류를 위해 고생을 스스로 당하시는 것을 목격할 때면 나는 질 낮은 영혼에 머물게 된다. 차라리 부잣집 장부로 태어나실 걸 하고 바라다가 좁쌀 영감 같은 내 저급한 상상 때문에 우울해짐을 금할 수 없다.

중국의 신비한 곤륜산을 통해 백두산이 솟고, 백두대간百頭大幹과 장백정간長白正幹의 척추, 등뼈를 타고 마대산, 두류산, 금강산, 모악산으로 내려와 태백산과 속리산의 정기로 이어진다. 정읍井邑의 객망리라는 곳은 그러고 보면 남쪽으로 태백산, 서쪽으로 이어지는 계룡산까지 등골을 타고 이어져 뻗는다. 그 형태는 사람 몸의 구성을 이룬 것과 흡사하다.

사람 얼굴에 7개의 규竅가 있듯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일곱 신선들이 놀다가 하늘로 오른 두승산斗升山에 다다르면 금강 아래 호남 정맥을 타고 모악산, 금산사, 두승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그 안에 시루산이 반듯이 자리를 틀고 있어 백두대간의 머리 맥을 이어 가는 풍수가 으뜸이다. 시루산은 완만한 작은 산이지만 산들 중에 가장 중심 산이다. 주변 모든 산은 시루산을 향해 배례하는 형국으로 놓여졌다.

이렇듯이 지구의 정기가 이어지는 백두산과 금강산을 타고 내려온 지맥이 호남의 변산, 방장산, 두승산 건너 시루봉으로 열매를 맺는다. 시루산 앞에 놓인 두승산은 종종 상제님께서 유년 시절 자주 오르신 산인데, 숲으로 들어가시면서 무슨 생각에 잠기셨을까, 호랑이의 성질을 알아보기 위해 호랑이로 둔갑하여 앉아 있기도 하셨다던데.... 그런가 하면 개벽의 참담한 과정을 치러야 하는 인류에게 다가올 고통을 아시고 소리쳐 대성통곡하셨다고 한다. 굽이굽이 흐르는 산천의 대지는 마치 사람과 같다는 이치가 나에게 놀라움을 던져 주었다. 동시에 비밀스러운 탄강지 계획은 무구한 역사를 거슬러 이미 산천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리행룡千里行龍으로 달려온 산의 정기가 마지막에 결실 맺는 곳이 지구의 핵, 동쪽 조선 땅 대한민국(South Korea)이라 한다.

우주 가을의 열매를 거두는 것은 시루산에 오신 천주이신 상제님의 천업天業이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라도 객망리 손바래기에 오셨다. 시루산, 증산甑山의 정신은 인류 구원이다. 시루는 천주님의 무극대도 정신과 구원의 목적을 표상하는 것이다. 시루에 담긴 떡은 우주 열매인 인류와 미륵이신 상제님이시다. 천주이신 상제님과 우리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로 쪄 낸 떡처럼 같이 녹아 다른 물질로 변화해 버리는 사이다. 떡을 찌기 전엔 쌀이었고 쌀을 쪄 내면 떡이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먹거리가 된다. 시루, 증산甑山의 의미가 오묘하다. 그렇다면 군불이 있어야 시루에 떡이 익을 것인데...그 뜨거운 불은 누가 지피며 그것이 곧 개벽을 뜻하는 것일까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 팀은 시루산 숲으로 난 긴 순례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올랐다.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잠시 땀을 식힐 숲은 향기로웠다. 산 흙을 밞으니 소홀했던 건강이 발바닥에 저절로 느껴졌다. 140년 전에 이 산으로 오르셨던 상제님의 체취를 맡으며 감격하고 있을 적에 상제님의 성부, 성모님 묘소에 잠시 인사드리느라 일행에서 뒤처지게 된 종도사님께서 그제야 우리 쪽으로 합류하셨다. 같이 시루산 중턱으로 오르게 되었는데 지나와 보니 시간이란 원래 시작도 끝도 없는, 길고도 짧지도 않는 공간뿐이었음이다. 본래 우연이란 없고, 필요로 하던 사람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 간절한 열망과 이어 온 정성에 필연을 불러온 것뿐이다. 우연한 기회에 성지순례를 했다는 말은 없다는 것이다. 고질적인 뿔이 난 나의 구원의 과정은 예상보다 앞당겨질 것이리라. 성지순례 내내 나의 구원에 대해 소처럼 되새김을 하고 있었다.

상제님의 외가 서산리書山里


시골 초등학교의 널따란 운동장에서 수백 명이 둘러앉아 도시락을 펼치고 먹자니 그늘이 모자라 아쉬웠다. 마침 줄지어 선 대형 버스에 늘어진 반쪽 그늘은 안성맞춤의 도시락 자리였다. 우리는 버스 그늘에 등을 기대고 앉아 특석 자리라 자탄하며 도란도란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도시락을 비웠다. 달달한 식혜는 목마름을 해결해 주었지만 턱없이 모자란 화장실 문제는 다음 예정지로 출발해야 하는 일정 때문에 수백 명의 애간장을 태웠다.

15번 버스는 시루산에서 북쪽으로 4킬로 떨어진 서산리 행장로에다 우리를 쏟아 냈다. 자동차도 그리 없는 시골길에 초복도 아닌데 극성을 부리는 햇살이 머리 장배기를 따갑게 비췄다. 오랜만에 비료 냄새가 새삼스럽게 코 안을 깊숙이 자극하였고 하얗게 구불구불 부풀린 새털구름은 어느새 하늘에서 봉황새를 그리고 있었다.

서산리는 외가 가는 길이다. 성모님의 친가이기에 상제님은 이곳에 유년기, 청년기까지 자주 오고 가셨을 것이다. 하늘에서 보면 이 지역은 용두리가 휘감기는 형태로 서산리를 이루고 있다고 도전에 쓰여 있다(도전 1:15). 서산리 마을은 원래 배틀이라 부른다. 많은 배들이 동진강을 거쳐 이곳에 들어왔다 하였고 또 팔선리八仙里라 불렀는데 여덟 명의 신선들이 살았던 곳이라는 전설도 내려온다. 우리가 머물며 사연을 들었던 장소는 500평 남짓한 빈터이나 원형극장같이 경사가 져 있어서 종도사님을 바라보며 열정어린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은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곧게 뻗은 소나무들로 그 가장자리에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다. 지난해에 떨어진 낙엽이 켜켜로 쌓인 빈터에는 평화롭게 구르고 있는 솔방울들이 있어 마치 거대하고 신비스러운 새 둥지 같았다. 시골 마을의 모든 이에게 쉼터를 제공하여 주는 대지의 오묘한 정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성부와 성모님의 신비로운 상제님 잉태 현몽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상제님 아버지의 태몽은 이러하다. 하루는 성부님의 꿈에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져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시고 아내 성모님께서 이곳 서산리에 친가를 뵈러 오신 사이에 찾아와 동침하셨다고 한다(도전1:16). 그 무렵에 성모님의 꿈에도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성모님 앞으로 내려와 호박 같은 것이 황금색으로 변하여 품에 안기시니 세상이 광명하여졌다고 전한다(도전1:17). 이렇게 상제님께서 잉태되어 13개월(384일은 의미를 주는 숫자) 만에 객망리에서 탄강하셨다.

수백 명이 둘러앉은 어깨들 사이사이로 보드랍게 간지럼을 태우는 솔바람이 선선했다. 잠시 주문과 도공을 하며 식곤증을 물리치기로 했다. 종도사님과 함께하는 주송呪誦으로 졸음을 탕제로 달여서 느슨한 근육과 꾸벅거리는 세포들에게 보약을 공급했다. 여기에 더해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도공을 하는 동안 그새 몸은 가벼워졌다.

상제님의 외가 권씨 문중에는 단학丹學 계통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신 청하靑霞 권극중權克中(1585~1659) 선생이 계시다. 상제님의 어머님은 빛나는 수행자 권청하의 10세 손이시다. 외가의 도道적인 환경 분위기는 상제님의 성장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상제님은 자주 외가 서산리에 오셔서 일을 도와주곤 하셨는데 9세 때엔 가족 모두 서산리로 이사하셨다. 10세 이후에도 이곳에서 사셨다고 한다. 그 때 어린 묘목이었을 이곳 솔나무를 쓸어 주면서 지금은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이 땅에 다녀가신 증산 상제님을 다시금 마음 중심으로 모시게 되었다. 순례 일행은 어느덧 마지막 장소 ‘자는 개의 형상을 한 땅, 숙구지宿狗地’를 고대하며 아쉽고 소중한 곳, 서산리를 뒤로했다.

모든 것을 이루는 일꾼, 그 상징 숙구지宿狗地


태을주를 알고 있는 청소년들, 대학생들, 학부모들 그리고 초립동들은 온종일 불평을 숨긴 걸까. 겉으로 보기에는 지칠 줄 몰라 해서 마음으로 칭찬을 많이 보냈다. 개의 입 모양을 한 지역에 일제 때 일본인 구마모토가 지은 튼튼한 2층 창고를 지났다. 용서의 마을 정자가 있는 넉넉한 터에 와 보니 땅바닥 벽돌 틈새로 촘촘히 올라온 팽이 풀들과 주변에 아름드리 큰 고목들이 세월을 지키고 있었다. 이 고목 아래에서도 상제님이 오시어 천지공사를 보셨다. 우리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경애심과 애정을 드리면서 상제님도 인간이셨던 시간들을 더듬었다. 종도사님으로부터 상제님께서 행하셨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었다. 김경학 성도가 태을주로 사람을 살려 처음 포교 운을 열었듯 태을주로 상제님 도업을 마무리하는 곳이 역시 내가 허리를 붙이고 앉은 이곳 숙구지다. 또한, 이 마을에 살았던 동학 신도인 전태일太一 (태일문화를 여는 존재)이라는 사람은 시천주 주문을 읽는데 어느 노인의 가르침을 받고 상제님께 찾아온다. 상제님이 그에게 준 봉투 안에는 태을주가 써져 있었다. 그는 상제님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하룻저녁에 태을주를 읽으니 착한 숙구지 동네 사람들은 모두 따라 태을주를 읽었다. 이야기는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종도사님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숙구지의 의미는 이러하다. “천지개벽이 몰려오는 시간이 올 것인데, 지구의 질서가 바뀐다. 이것을 개벽이라 부른다. 더불어서 미완성 지구의 기울어진 축(23.5도)이 바로 서게 되고 동시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차이가 없어진다. 이때부터 후천 세상에 들어서고 내 생명의 시작은 하늘의 기운을 받고 내려온 존재이므로 태을주 기운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이다. 전쟁과 더불어 천연두가 폭발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가가도장을 만들고 태을주를 숙구지 마을 사람들처럼 읽어야 한다. 가가도장으로 온 인류의 거처가 선경낙원의 도장이 될 것이며 부모 형제 등의 생명을 살리는 3대 의통을 전수받는다. 천지개벽 때에 살아남으려면 태을주와 새울도수로 6임 태을랑 조직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 후천 세상은 인류 문명을 하나로 묶을 것이라, 지구 문화는 동일하며 지구 마을의 마지막 소원인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특별히 초립동을 많이 살려야 한다. 6임 태을랑, 의통조직은 바로 북두칠성의 정기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말씀이 이어지면서 “숙구지가 모든 우주공사의 완결이 이뤄지는 곳”이라고 다시 거듭하여 강조하셨다. 붉은 황혼을 어깨 위로 업은 종도사님은 마치 드넓고 깊은 호수 같았다. 해박한 지식을 들을수록 내 무지함은 반대로 차고 넘친다. 순례의 마지막 시간 일정은 숨을 죽였다. 낮에는 비록 태양이 이글거리다가도 황혼을 앞세운 바람의 시간은 언제나 그랬듯 슬슬했다. 과히 천년을 숨 쉰 부부 고목 아래에서 생각해 본다. 우리와 같은 오관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신 상제님께서 9년 공사를 보실 적에도 같은 고목 아래에 계셨을 것이다. 한여름 날에 참외도 수박도 드셨을 테지...바람의 존재를 알리는 나뭇가지 이파리들의 방정맞은 품바 춤들을 우리처럼 바라다 보셨는지요. 나 역시 간절한 기도 소리 드높이 올려 드렸다. 상제님과 하나 되는 느낌으로 헤아릴 수 없는 내면의 묵은 잡동사니와 잠수함을 치워 달라 기도로 호소했다.

종일을 순례의 길로 가득 메운 5, 6백 명의 어린 초립동들을 비롯하여 청년들과 어머니들은 종도사님과 기념 촬영을 마쳤다. 참으로 흐뭇하고 대견한 젊은이들이다. 서울역으로 돌아오기 전, 역에서 일행들과 서둘러 국밥을 말아 먹고 출발 시간 5분 전에 KTX를 탔다. 기차에 오르기 직전, 일행들은 오랫동안 보천교에서 보관하였다는 정읍 농학 보존회, 무형문화재 제712호라고 쓰인 ‘정읍농악보존회’ 그림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섰다. 흥겨운 농학 무리들의 춤사위를 그린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손전화로 잽싸게 찍어 내어 그 자리에서 각자에게 전달했다. 급히 찍은 사진이지만 참 정겨운 모습들로 보인다. 농악 풍물놀이는 1인 쇠재비를 선두로 일곱 악기 울림의 소리 조합이다. 꽹과리, 징, 북, 소고, 장고, 나발, 태평소가 어울리는 것과 6임 태을랑과의 조합 구성이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한데 어울려 마당잔치를 베풀어 흥겹게 만드는 세상, 고통들을 달래 주는 모든 이의 농악대와 6임의 구성을 생각하면서 어느새 서울로 단숨에 도착했다. 도시의 차 창밖은 오래전에 어둠에 묻혔고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 있는 그곳, 인류를 살려 낼 하늘의 주인을 기다린다는 객망리 손바래기, 서산리, 숙구지는 완벽한 틀의 짜임으로서 거룩한 대지의 빛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숙구지 새울도수는 일상에서 수행으로 빚어지는 나만의 시루 그릇이며, 스스로 수행으로 만들어진 시루의 빛깔대로 무지개 태을주를 받는 도수이다. 내 생애의 마르지 않는 생명수, 하늘의 기운을 받는 도수이지 싶다. 놀라운 구원 역사의 비밀을 발견한 나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된 것처럼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것은 황홀한 틀(For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