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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 길吉 씨

    해평海平(선산善山) 길吉씨


    시조 길당吉唐
    「해평길씨세보海平吉氏世譜」에 따르면, 시조는 당나라에서 동래한 8학사의 한 명인 길당吉唐이라고 한다. 길당은 고려 문종 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고려때의 정3품 문관) 참지정당문학參知政堂文學(고려 때 중서문하성의 종2품 관직)에 오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서 해평海平(현 선산의 옛 지명)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길당 이후 1백여 년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때의 성균진사成均進士(소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한 선비)인 길시우吉時遇를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신라 때의 인물로 길문吉門(4관등 파진찬波珍飡)과 길선吉宣(6관등 아찬阿飡) 등의 이름이 나오지만 지금의 길씨와 연관은 알 수 없다. 165년 신라인 길선吉宣이 반란을 꾀하다가 백제로 도망갔다고 한다.

    해동의 절신節臣 야은冶隱 길재吉再
    해동의 절신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가 가문을 크게 빛낸 인물이다. 그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과 더불어 고려 말 ‘삼은三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길재는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우왕 14)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창왕 때는 문하주서門下注書(종7품 관직으로 문서, 기록을 관장함)로 있었고, 고려가 쇠망해 가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 정종 2년에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이방원(태종)이 그에게 태상박사太常博士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고, 고향인 선산善山에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세종 즉위 원년인 1419년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학통學統은 강호 김숙자金叔滋(1389~1456)로, 김숙자에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으로, 김종직에서 한훤당 김굉필金宏弼(1454~1504), 김굉필에서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20)로, 조광조에서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으로, 이언적에서 퇴계 이황李滉(1502~1571)으로 이어진다. 길재가 고려의 옛 서울 개경을 둘러보고 고려를 회고하며 지은 시조 <회고가懷古歌>가 지금도 전한다. 세종 때 그의 아들 길사순吉師舜이 종묘부승宗廟副丞에 제수되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다

    해평 길씨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한 토막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연대를 알 수 없는 길재의 영상影像에는 왼쪽 귀가 없다. 선산에 은거한 그에게 출사를 거듭 부탁하였으나 끝내 마다하자 임금은 사신에게 다음과 같이 하명함으로써 마음을 떠보려 했다. 응하지 않거든 목을 주거나 귀를 주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시켜 베어 오라고 했다. 만약 귀를 베라고 선택하면 그것은 분명히 명분이 위선적인 불출사不出仕이니 목을 베어 오고, 목을 베라고 선택하면 그것은 진실한 소신에 의한 불출사이니, 귀를 베어 오라고 은밀히 하명한 것이었다. 길재는 분명 불출사의 대가로 목을 선택했기에 귀를 베어 갔다는 것이다. 67살에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인 신씨申氏가 벼슬을 하고 있는 아들 길사순을 불러올 것을 권하자, “아비는 임금과 같은 것이다. 임금 옆에 있으면 아비 옆에 있는 것과 같아 아들은 없어도 있는 것이다.” 하며, 쓸쓸히 일생을 마쳤다.

    주요 인물들
    길재의 6대손 #길겸吉謙#이 있다. 그는 1546년(명종 1) 생원이 되었고, 1548(명종3)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郎, 청홍도평사淸洪道評事, 당진현감, 도총관都摠管 등을 지냈다.

    길회吉誨(1549~1593)는 1570년(선조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7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학유成均學諭에 임용되었다. 1579년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일시 관직을 떠났다가 재차 예문관검열로 기용되어 신창현감新昌縣監을 지냈다. 1592년 병조정랑으로서 임진왜란을 맞아 선조를 호종하여 영변에 갔다가 어가御駕가 의주로 향하자 세자를 호종하였다. 선조가 환도할 때 임금이 타는 가마인 연輦에 오르자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인용하여 연을 버리고 말을 타고 돌아갈 것을 주청하여 흔쾌한 윤허를 받았다. 이후 재차 헌납·장령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사후 1603년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추록되었다.

    현대 인물로는 목사, 독립운동가로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었던 길선주吉善宙(1869~1935)씨와 국가재건최고회의 사법위원장, 제6대 국회내무위원장,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을 역임한 길재호吉在號(1923~1985)씨가 유명하다. 그 밖에 길씨 실존 인물로는 무한도전에 출연한 길(리쌍, 본명 길성준)과 길라영(성우), 길영아(배드민턴 선수), 길용우(배우), 길은정(가수), 길은혜(배우), 길창덕(만화가), 길환영(KBS 사장) 등이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통계청 홈페이지
    위키 백과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와 ‘지주중류砥柱中流’에 얽힌 고사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不二里에 있는 청풍서원淸風書院에서 야은 길재 선생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고향이 선산인 길재가 금산으로 오게 된 것은 그의 부친 길원진이 고려 시대인 1383년 금주錦州(금산의 옛 지명)지사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길재는 아버지를 따라 금산으로 갔고 금산에서 거주하던 중에 금산 출신의 아내를 맞이했다. 길재는 금산에서 부친상을 당하고는 금산에 부친의 묏자리를 만들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길재는 대략 4년여 동안 금산에서 머물렀다.

    충청도를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 하는 것은 청풍서원에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가 세워지며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이 백세청풍비는 1761년(영조 37년) 당시 금산군수가 군내의 유림 및 후손들과 함께 힘을 모아서 세웠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6년과 1979년에 금산군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다. ‘백세청풍’은 원래 중국의 백이와 숙제를 기리는 사당 앞에 세워진 비석에 쓰인 글이다. 이 글씨를 쓴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이다. 주자朱子가 쓴 이 비석 글씨를 탁본해서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로 가져왔다. 지금 있는 ‘백세청풍비’는 해주에 있는 비에서 탁본을 해서 다시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백세청풍’의 글씨 중에 ‘풍風’ 자가 달리 보인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탁본한 글씨를 가지고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오던 중 풍랑을 만났다. 당시 뱃사람들이 글씨에 ‘풍風’이 있다고 해서 그 글씨를 잘라서 바다에 버리니, 풍랑이 멎었다고 한다. 이를 전해 들은 안평대군이 ‘풍風’ 자를 다시 써주었다고 전한다.

    또한 청풍사 앞쪽에 서 있는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는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원래 ‘지주중류’ 비석은 구미시 오태동에 있는 ‘지주중류’를 탁본해서 다시 비석으로 세운 것이다. 구미의 ‘지주중류비’는 조선 시대에 겸암 류운룡(1539~1601, 류성룡의 형)이 인동仁同현감 재직 시절 중국에 있는 비석에서 탁본하여 가져왔다. ‘지주중류’ 네 글자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이 백이와 숙제의 무덤 앞에 새긴 글씨라고 한다. 고사성어 ‘지주중류’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황하는 탁하고 거센 물결로 유명하다. 황하가 통과하는 하남성河南城 삼문협三門峽은 그중에서도 특히 물살이 거센 곳인데, 이곳 강 한복판에는 지주산砥柱山이라는 바위산이 하나 있다. 지주산은 황하의 거센 물결을 온몸으로 막아 내면서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지주중류’는 숫돌 지, 기둥 주, 가운데 중, 흐를 류 자로, 거세게 흐르는 황하의 물결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지주산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의연하게 소신을 지키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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