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최씨 낙랑국 두 번째 이야기

[역사X파일]

낙랑국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중앙박물관 탐방 행사를 하다 보면 낙랑 전시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입니다. 최씨 낙랑국 이야기부터 한사군까지 다룰 이야기가 많습니다. 낙랑국(國)과 낙랑군(郡), 이 중요한 이야기를 위해서 미국 개척사 한 토막을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뉴욕New York이란 도시 (혹은 주) 이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뉴욕은 17세기 초에 네덜란드인들 손에 의해 건설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아시아로 가는 서쪽 항로를 찾다가 뉴욕 만灣에 도착합니다. 이곳에는 유럽에서 인기 높은 비버beaver가 풍부했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비버 가죽을 유럽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식민 기지를 건설하고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뉴 암스테르담은 훗날 영국 함대에 점령되면서 이름이 “뉴 욕New York”으로 바뀌게 됩니다. 뉴욕은 영국 요크 공작(Duke of York)의 이름에서 유래되는데, 영국의 요크 지방과 구분하기 위해서 ‘new’를 붙이게 됩니다. 뉴 암스테르담, 뉴욕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이전부터 있어 왔던 지명을 새로운 개척지에 붙이는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낙랑”이란 명칭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낙랑”이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혼란한 정세를 피해서 마한 땅 일부 지역 (평안도)에 이주하여 “낙랑”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낙랑국 사람들이 원래 살던 곳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본래의 낙랑 지역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낙랑”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낙랑 지역에 살던 사람들 모두가 마한 땅으로 이주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낙랑 지역은 훗날 낙랑군(郡)이란 행정 구역으로 편제되어 관리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낙랑국의 강역과 황금허리띠 고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부분을 살펴보고, 낙랑 향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낙랑국의 터전(강역)


낙랑국 사람들이 본래 살았던 낙랑 지역이 어디일까요? 안타깝게도 그 지역이 어디였으며, 그 경계가 어디까지였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만 몇 가지 기록을 가지고 유추하는데,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는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에 나오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주석과 『수경주水經注』라는 지리서 기록 등이 있습니다. 『수경주水經注』에는 ‘패수浿水’라는 강이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浿水 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정리하자면, 낙랑 지역에는 ‘패수’라는 강이 있는데, 그 강은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독자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일본과 식민사학계가 한사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한반도 평안도, 황해도 지역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없습니다. 모든 강들이 서쪽 바다, 황해로 흘러갑니다.

우리는 낙랑국(國)과 낙랑군(郡)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역사 기록을 공부하다 보면 사서들과 자료들이 낙랑이 국가인지 아니면 행정 구역인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특히, 식민사학계와 그 후학들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지금 우리들을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낙랑 지역의 주인은 주변 국가의 국력에 따라 바뀌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배달과 고대 조선 영역이었으며, 한족이 차지하여 주인 행세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 뒤에는 백제가 지배권을 확립하여, 남조 국가들이 백제를 낙랑과 동일시하기도 했습니다. 6세기경 제작된 양직공도梁職貢圖(중국을 찾은 백제, 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 그리고 그 나라의 풍습 등을 소개한 화첩)에는 백제라는 말 대신 낙랑이라는 단어로 백제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이에 질세라 백제와 낙랑 지역에 대한 패권을 다투기도 했습니다. 2017년 현재 낙랑 지역(하북성과 요령성 일부 지역으로 추정)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입니다. 하지만 미래에는 어떤 세력의 영토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낙랑 지역은 지리적으로 고대 조선민, 북방 기마유목민, 한족 농경민이 만나는 접점입니다. 이 세 세력이 활발한 문화적 교류와 흐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엽적인 교류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전全 유라시아 적인 교류와 흐름이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졌습니다. 그 흔적이 우리가 살펴보는 낙랑국 문화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습니다.

황금 허리띠 고리가 알려 주는 사실


- 북방 기마 유목 민족의 수준 높은 세공기술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 전시실에서 열국 시대로 넘어가는 공간 한편에 낙랑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유물이 황금 허리띠 고리(금제교구金製鉸具)입니다. 이 역사적 유물에는 그 당시 최고의 기술들이 적용되었습니다. 금판을 두드려서 입체적 형상을 표현하는 단조 타출기법打出技法은 금이나 은과 같이 늘이기 쉬운 전연성展延性이 좋은 금속을 이용하여 공예품을 제작할 때 사용되는 기법입니다. 금선(얇은 황금 실 모양)과 금 알갱이를 금속 표면에 붙여서 장식하는 누금세공기법鏤金細工技法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물방울 등 특정 모양의) 난卵집을 만들고 작은 보석(터키석 등)을 끼워 넣는 감옥기법嵌玉技法이 보입니다. 낙랑 유물들에서는 금판뿐만 아니라 은판에 위 세공기법들을 사용하여 만든 다양한 허리띠 고리들도 출토되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학습을 받아 온 역사 패턴을 생각해 보면, 훌륭하고 좋은 것은 외부로부터 전래되거나 가져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접한 중국이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중국은 수준 높은 기술과 문화를 보유했고, 우리 민족은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활동 무대를 동아시아 구석으로 한정시켜 소극적으로 외래문화만 전수받는 입장으로 각인시켜 왔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적 관점입니다. 황금 허리띠 고리를 두고도 위와 같은 해석을 강요했습니다. 한漢나라 제왕이 지역 태수에게 준 선물(하사품)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흉노와 같은 기마 유목 민족 영역에서 멋진 유물이 나오면 한나라에서 조공을 받거나 약탈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박물관 유물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흥미롭게도 황금 허리띠 고리를 만든 3가지 기술 모두 그 당시 한나라에는 없던 기술입니다. 한나라 지나支那(CHINA) 영역권에서 발견된 유물의 세공 기술은 고대 조선(대부여, 북부여)이나 북방 흉노에 비해 낙후한 상태였습니다. 황금 허리띠 고리 수준의 세공품은 몇백 년 후에 나타납니다. 더구나 지나(CHINA) 인들은 단조 기술이 빈약하여 세 가지 기술을 복합적으로 구사하지 못했습니다. 얇은 금속판을 단조 및 타출하여 장신구를 만드는 누금세공기법은 기원전 7세기 이전 중근동中近東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7~6세기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고도로 발달했습니다. 이 기술과 함께 다채롭게 색색의 보석들로 상감象嵌 장식하는 양식은 기원전 3세기 전후부터 흑해 연안이나 중근동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전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습니다.

최근 몽골 지역 흉노 고분(기원전 2세기로 추정되는 노용 올Noyon-Uul, 골 모드Gol-Mod 유적)의 주요 유물 조사를 통해서, 야만적이고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했던 흉노와 북방 기마 민족들이 수준 높은 세공 기술을 보유했음이 밝혀졌습니다. 흉노와 주변 기마 유목 민족들의 금속 공예품은 철과 비철 금속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사용하여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발달된 철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금속 공예 기술까지 구사했습니다.

금은 세공 기술의 발생 및 전래 과정을 정리해 보면, 중근동 지역에서 발생하여 중앙아시아로 전래되어 동서 중계 무역을 통해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라시아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존재했습니다. 그 유라시아 지배자(지배계층 혹은 고위 귀족들)에게 금은 세공품 수요는 뜨거웠습니다. 금은 세공품들은 기마 이족들의 초원길을 통한 동서 교류를 통해서 대륙 동쪽까지 전해지고, 세공 기술도 같이 전해졌습니다. 동쪽으로 전해진 세공 기술은 동시대의 흉노 및 고대 조선(부여)과 그 연맹국가들에게도 전파됩니다.

특히, 흉노와 인접한 낙랑 지역(현 중국 내몽고자치구 남부, 허베이 성河北省, 랴오닝 성遼寧省 일부)을 차지하고 있던 한민족(혹은 동이족)도 금은 세공 기술에 적극적이었으며, 나아가 그 기술을 흡수하여 자체적으로 발달시켰습니다. 낙랑 사람들이 마한 북부 지역으로 이주 건국하면서 문화적 소양과 세공 기술을 보유한 장인 집단도 한반도 북부로 이동하게 됩니다. 평양 낙랑 지역에서 확인된 철기 및 청동기 공방지工房址(단조 철기 공방지)는 금은제 공예품들을 자체적으로 제작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이 공방지들은 금은 공예품들이 한나라 중앙 공방에서 만들어서 사여賜與, 혹은 약탈된 것이라는 기존 일본 학계 연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증거물들입니다. 낙랑왕 최숭崔崇과 낙랑 사람들은 낙랑 건국 이전부터 낙랑 지역(내몽골 남부, 허베이 성河北省, 랴오닝 성遼寧省 일부 지역)에서 이미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는지 낙랑 지역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유라시아 전역에서 인기 높은 금은 세공 상품을 통해서도 부를 창출했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말발굽을 닮은 황금 허리띠 고리


- 기마 유목 민족의 문화적 특성

낙랑국 유적에서는 현대인들의 옷차림에서 벨트 버클 형태와 거의 흡사한 허리띠 고리가 발견됩니다. 제가 평소에 청바지를 입을 때 사용하는 허리띠 버클과 모양이 거의 똑같습니다. 이러한 허리띠 고리가 발달하게 된 이유는 기마 문화의 특성상 격렬한 동작에도 몸에 착용한 의복이나 물건 또는 말에 장착한 물건을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해서 고안되고 발전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한 황금 허리띠 고리는 앞서 보여드린 현대식 허리띠 고리와도 디자인이 다릅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말발굽의 외형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그래서 마제형馬蹄形 황금교구라고 부릅니다. 한나라 유적에서는 아직까지 이러한 교구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말발굽형 황금 허리띠 고리는 평안도 낙랑국 유적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신강위구르 지역 카라샤르, 몽골 북부 골 모드와 몽골 중부 노용 올, 요령성 대련, 운남성 곤명에서 출토된 허리띠 고리는 제작 기법과 소재와 디자인이 유사합니다.

낙랑국 황금 허리띠 고리와 가장 많이 비교되는 황금 허리띠 고리는 신장위구르 카라샤르에서 발견된 1∼2세기 황금 허리띠 고리입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2008년도에 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어 한국에 소개되었습니다. 제작기법과 소재가 낙랑국 허리띠고리와 아주 유사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큰 용이 한 마리 작은 용이 7마리로 용이 모두 8마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용의 등 부분을 표현하는 부분이 낙랑 것에 비해 다소 투박스러워 장인들의 예술적 기술적 수준 차이가 확연합니다.

유물 분포 지도를 보면 한나라 강역과 황금 허리띠 고리는 무관합니다. 일본 학자들 주장처럼 한나라 변방에서 출토된 한나라 하사품이 아닙니다. 2천 년 전 한나라와 무관한 기마 유목 민족 세력권에서만 이러한 말발굽 형태의 허리띠 고리가 제작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금과 은 부장품에 담긴 의미, 광명사상


몽골 북부 노용 올Noyon-Uul 20호분에서는 단조 타출기법으로 제작된 은제 장식판이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발견된 장식판에도 두 마리 용이 마주보고 있는 모양이 있습니다. 용은 돼지 코를 닮은 코와 긴 수염, 두 개의 뿔과 한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코를 과장되게 묘사하고 두 개 뿔을 가진 용의 얼굴, S자형을 이루고 있는 몸통과 발톱을 지닌 다리 형상 등 석암리 9호분 금제교구 용 형상과 매우 유사합니다. 노용 올에서 발견된 은제교구에는 이리 혹은 늑대와 비슷한 용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곤명 양이두 금제교구에서도 이 특징이 보입니다. 몽골 흉노 고분(노용 올 20호분, 골 모드 20호분)에서는 감입기법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금사와 금립을 붙여서 난집을 만들고 그 안에 터키석을 감입한 장식품도 발견되었습니다. 몽골 흉노 시대 분묘에서 주요 제작 기법(타출, 누금세공, 감옥)이 모두 확인됩니다.

흉노뿐만 아니라 기마 민족 무덤에서 유독 금과 은 장신구 혹은 장식이 많이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귀금속들로 권력 혹은 부유함을 과시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신앙, 전통 사상과 철학, 신화와 전설 관점에서 본다면 부와 권력의 과시 말고도 다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먼 태고 시절부터 사람들이 품어온 광명 숭배 사상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천제天帝(혹은 천신天神)께서 태양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왕이란 천제天帝(혹은 천신天神)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은 존재로 천자天子(천제지자天帝之子)입니다. 그래서 천신의 빛나는 속성을 닮고자 했습니다. 번쩍이는 금과 은으로 몸을 치장하여 태양으로부터 받은 광명을 다시 빛내는(반사시키는) 이가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곧 천제의 아들(천자)임을 과시하는 방법입니다.

향기의 정치 그리고 향로


봄에 공원이나 들판에 나가면 화사한 꽃들이 만발합니다. 향기로운 꽃내음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향기를 즐기는 생활은 아마도 인류가 지구상에 문명을 건설하기 이전부터 시작됐으리라 생각됩니다. 향기는 상고 시대로부터 주요한 정치적인 요소였습니다. 제왕이나 고위 귀족이 행차할 때는 향로를 든 사람이 앞서 걸어가며 고급스러운 향기를 피워 내어 고귀함을 과시했습니다. 제왕이나 귀족의 공식 행사를 할 때면 어김없이 귀한 향을 피워 엄숙함과 정갈한 분위기를 지어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좌우에도 거대한 세 발 향로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 시대까지도 정치 행사에 이러한 향기가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악 3호분 고구려 벽화에도 한 여성이 새 모양이 장식된 향로를 받쳐들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수천 년 전부터 이러한 향기 문화는 중근동 지역부터 동아시아까지 널리 퍼져 사랑받았습니다. 이런 향기를 다루는 의례 혹은 생활에는 두 가지 물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향료이며 다른 하나는 향로입니다. 향로香爐(incense burner)란 향을 피우는 도구입니다. 향로는 고대 중동, 이란,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 고대 조선 영역인 동아시아까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께서도 멋진 향로를 유물로 많이 남겨 주셨습니다. 백제의 금동 대향로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향로라고 평할 만합니다. 이 금동 대향로보다 더 오래된 것은 평양 석암리 무덤에서 발견된 향로입니다.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원형으로 향반(향로 받침대)이 있고, 산 모양의 향로 본체를 날개와 꼬리를 펼친 새가 머리로 받들고 있습니다. 이 향로 머리 부분의 형태를 가리켜 “박산博山”이라고 부릅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이 향로 본체 모양 때문에 석암리 향로를 낙랑군(한사군) 유물로 취급합니다. 그 이유는 진한秦漢 유적(기원전 3세기 말)에서 산 모양 향로가 발견되어 학자들이 “박산향로”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입니다.

석암리 향로의 모양을 보면 상층부(본체)는 “산악”을 형상화한 그 당시 디자인 트렌드에 충실합니다. 그런데, 이 박산향로 디자인은 한나라 고유 양식이 아닙니다. 중첩된 산악의 모습은 실상 페르시아나 아시리아의 산을 표현한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한나라에 전해져 CHINA풍으로 변형됐을 뿐입니다. 어쨌건, 낙랑 향로도 박산을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 향로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향로 본체를 받치는 기둥 부분입니다. 이 기둥 부분이 한나라 사람들이 만든 향로와 차별점을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가장 중요한 차별점이 기둥 역할을 하는 새와 거북이입니다. 새가 박산을 머리로 받치고 있는데 이 새는 꽁지와 날개를 힘차게 펼쳐서 두 발로 힘껏 거북이 등을 밟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와 거북이 기둥 향로는 한나라 유물 중에는 보이지 않는 양식입니다. 이와 거의 흡사한 유물이 하북성 평산 중산국 고분에서 하나, 내몽골 포두시 유적에서 하나가 발견됩니다.

이 중산국 향로는 석암리 향로와 다르게 새의 머리와 꽁지를 위로 치켜들어 박산향로를 받치고 있습니다. 한편 날개는 뒤쪽을 향해 뻗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을 모아서 거북이 등을 밟고 있습니다. 거북이는 석암리 향로와 같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모습입니다.

포두시 향로도 중산국 향로와 비슷합니다. 새의 머리와 꽁지를 위로 치켜들어 박산향로를 받치고 있습니다. 한편 날개는 옆쪽을 향해 펼치고 있어 새 날개는 석암리 향로와 비슷합니다. 발을 벌려 거북이 등을 밟고 있습니다. 거북이는 역시 고개를 하늘을 향해 치켜든 모습입니다. 새와 거북이라는 구도는 한나라 향로 양식이 아닙니다. 한나라 향로는 새를 기둥에 장식하기 보다는 향로 위에 배치하는 식입니다. 새와 거북이로 기둥을 삼는 것은 흉노의 디자인에 더 가깝습니다. 흉노의 유물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흉노 제왕이 사용했던 금동관입니다. 이 금동관에도 거북이 등을 새가 밟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새와 거북이라는 소재를 봤을 때 낙랑과 흉노의 긴밀한 문화적 연관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낙랑국은 흉노와 빈번하게 교류하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세운 나라입니다. 낙랑국을 건국한 이후에 본래 낙랑 지역과 단절하고 살았을까요? 분명히 사람이 왕래하고 빈번하게 물자를 교류했을 겁니다. 사람의 왕래와 교류는 향로 디자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단순 물자의 교류라면 같은 디자인의 향로가 다수의 장소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같은 듯 약간씩 다른 양식을 가진 세 개의 향로는 같은 문화 코드를 공유했지만 각기 다른 장인들이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흉노의 왕관, 거북이와 새


- 거북이 세상을 받들다, 설화 속 거북이

낙랑국 사람들은 왜 새와 거북이를 향로 구성 소재로 활용했을까요? 흉노 사람들은 왜 새와 거북이라는 소재를 제왕의 관에 사용했을까요? 어떤 신화와 전설이 있었는지, 어떤 철학과 사상에서 유래했는지 속시원하게 설명해 줄 직접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관점에서 새와 거북이를 생각해 볼까 합니다.

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복도에는 월랑 선사비가 세워져 있는데, 신비한 용머리 거북이 거대한 비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거북이가 등에 비석을 받치고 있는 형태가 많습니다. 이를 신도비神道碑라고 합니다. 왜 거북이가 비석을 지고 있을까요? 이러한 설정은 여와女媧씨 설화에서 유래된다고 합니다.

전설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큰 변국이 일어납니다. 여신인 여와씨가 오색 빛깔 넓은 돌을 다듬어 하늘의 무너진 구멍을 메웁니다. 그리고 무너진 하늘을 땅으로부터 떼어 내 본래대로 돌려놓기 위해서, 거대한 거북이(혹은 자라)의 네 다리를 잘라 사방 땅끝에 세워 하늘을 떠받칩니다. 이렇게 하여 하늘과 땅이 본래대로 돌아가 안정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설화로부터 유래하여 거대한 비석(천지와 세상)을 거북이가 떠받치는 상징이 널리 사용됐다고 합니다. 여와씨는 태호복희太昊伏羲씨의 누이 혹은 부인입니다. 태호복희씨는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었으며 복희팔괘를 그리신 문명의 시조입니다. 여와씨와 거대한 거북이의 전설은 아마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유명한 설화였을 것입니다. 흉노 제왕의 관에 있는 거북 등, 박산향로를 지고 있는 거북이와 새, 신도비의 신비한 거북이. 이러한 유물들은 모두 같은 설화 문화권을 공유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와씨의 거북이로는 낙랑 향로의 새에 대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부족함을 메워 줄 또 다른 설화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나반과 아만 이야기입니다. 최초의 사람, 나반과 아만이 “아이사비”(바이칼호수)라는 곳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어느 날 둘은 천신의 계시를 받아 혼례를 올립니다. 맑을 물을 떠놓고 하늘을 향해 부부로 맺어 주심을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예식을 올리던 날 천신은 두 사람을 지켜 줄 수호신들을 내려보냅니다. 산의 남쪽엔 주작이 날아와 기쁜 듯이 날갯짓하고, 물(호수, 하천)의 북쪽에서 신성한 거북이(현무)가 상서로운 기운을 뿜어 주고, 골짜기의 서쪽에는 백호가 와서 산모퉁이를 지키고, 동쪽에서는 청룡이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리고 나반과 아만이 혼례를 치르는 곁(중앙)에는 누런 곰(황웅黃熊)이 웅크리고 지켜 줬다고 합니다.


다섯 신비로운 동물, 오신五神 이야기는 고구려 벽화 사신도로 너무나 유명합니다. 향로의 거북은 현무, 새는 주작 혹은 봉황이 아닐까요? 오신 이야기는 배달국 그 이전부터 전해져 온 우리 민족의 문화 양식입니다.

그러면 왜 거북이가 아래에 있고 새가 위에 있을까요? 너무도 황당한 의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향로의 거북이와 새의 구도를 이해하는 힌트일 수도 있습니다. 백제의 금동 대향로도 물을 상징하는 용을 아래에 배치하고 불을 상징하는 봉황을 향로 위에 배치했습니다. 이것은 음양 오행 사상의 대표적인 도상인 하도河圖로부터 유래됩니다. 하도와 같이 고래로부터 북방을 아래쪽에 배치하고 남방을 위쪽에 배치했습니다. 그러므로 거북(현무)은 아래에 두고 새(주작, 봉황)는 거북의 위에 놓이게 됩니다.

낙랑국과 흉노, 고대 조선


- 반고의 한서에 기록된 고대 조선과 흉노

낙랑과 흉노는 어떤 사이였을까요? 어떤 사이이기에 금속 가공 기술과 같은 문화 양식(동질성 혹은 친연성)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한민족 역사에 흉노 같은 기마 유목 민족이 다양하게 개입 혹은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고조선(혹은 북부여와 한민족 국가들)과 흉노가 실제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세세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흉노도 고대 조선도 그와 관련해 남긴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CHINA)인들은 우리 민족과 흉노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반고의 한서에서 간단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반고의 『한서漢書』 「권卷73 위현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東伐朝鮮(동방조선) 起玄樂浪(기현낙랑) 以斷匈奴之左臂(이단흉노지좌비)

풀이하자면 “동쪽 조선을 정벌하여 현(도)와 낙랑을 일으키니 이로써 흉노의 왼팔을 자른 것이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한무제漢武帝의 고대 조선 정벌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흉노의 왼팔’이라는 표현을 볼 때 고대 조선과 흉노의 관계를 한족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한무제는 흉노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저 멀리 대월지국에 사절을 파견하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지만, 반대로 고대 조선에게는 이러한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고대 조선과 흉노의 관계는 한나라가 외교적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비약해 보면 흉노는 고대 조선의 식구(연맹국) 관계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고대 조선과 흉노의 관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단군께서 욕살 삭정을 감숙성 약수에 유배시켰다가 그 땅의 통치자로 봉하여 흉노의 시조가 됩니다. 수천 년 전부터 낙랑 사람들은 흉노 등 기마 유목 민족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이에서 문화 경제적으로 깊은 교류 관계를 지속해 왔습니다. 낙랑국 고분 유물에서 보이는 말발굽형 황금 허리띠 고리, 말 재갈, 마구 장식, 향로의 형태 등 여러 유물들을 볼 때 흉노와 낙랑국 간에 깊은 친연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낙랑국과 흉노와의 관계가 아니라 한민족과 흉노의 관계로 확장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한민족은 기원전 1천 년 전부터 기마 민족적 특성을 보이기 시작해서 주변 기마 유목 민족들과 갈등 및 협력 관계를 오가며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해 왔습니다. 흉노는 저급한 야만 민족이 아닙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오랑캐가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종교와 사상 철학을 공유했던 문화적 한 갈래입니다. 어쩌면 혈통적으로도 한민족과 아주 가까웠을지도 모릅니다.

낙랑국 유물을 가지고 북방 기마 민족 흉노 이야기까지 살펴봤습니다. 평양 지역 고분들이 한나라 군현으로 오해받게 된 것은 칠기와 청동거울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칠기와 청동거울은 유라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던 무역품에 불과했습니다. 한사군의 덫에서 빠져나와서 넓은 시야로 유물들을 보면, 북방 초원을 통해 동서 교류를 했던 선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선조들이 세우고 경영했던 낙랑과 열국 시대 국가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먼저, 작은 것부터 바로 세워서 진정한 한민족사로서 낙랑을 복원하기 위해 같이 노력해야겠습니다.




『수경주水經注』
『수경水經』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저작된 지리서로 양자강, 황하 등 40여 개 강의 본류와 지류, 흐름, 지역 특색 등을 기록해 놓은 책이며, 『수경주水經注』는 수경이라는 책에 주석을 달은 해설서이다. 수경水經은 전한前漢 시대에 상흠桑欽이, 수경주水經注는 북위의 역도원酈道元이 편집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두 책 모두 정확하게 저자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북방 기마족 자체 기술 VS 한나라 약탈품
1920년대 일본 학자들은 석암리 9호분 금제교구金製鉸具(황금 허리띠 고리)는 한나라 조정에서 만들어서 사여賜與한 것으로 주장했다. 이 주장이 최근까지 별다른 비판이나 이견 없이 보편적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 주장은 평양 지역이 한사군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또한 한漢나라만이 수준 높은 금은 세공 기술을 가졌고 한나라 주변 국가들은 수준 높은 공예 기술을 가지지 못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흉노보다 국력이 약했다고 생각되는 지역에서는 한나라 정권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간주했고, 흉노와 같은 강력한 유목 민족들의 경우에는 철이나 금은, 청동기, 칠기 등 예술품들을 전부 한나라에서 수입하거나 약탈해 왔다고 보았다. 식민사관에 기반을 둔 일본 학자들로부터 유래된 학설이다. 한국 사학자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계승해서 정설인 양 받아들였다.

최근 일각의 학자들을 통해서 다른 방향의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몽골, 투르판 등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허리띠 고리, 향로, 마구 등의 금은 세공 유물을 비교 연구한 결과, 그 당시 한나라 정권과는 무관하며 낙랑국이나 흉노는 이미 수준 높은 금속 세공 기술을 보유했고 제작 공방을 운영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평양 지역 낙랑 고분에서 발견된 한나라 공예품(칠기와 청동거울)이 몽골과 중앙아시아 지역 및 우크라이나 크리미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나라 공예품이 유라시아 대륙 내에서 광범위한 분포를 보이는 것은 당시 중국산 공예품이 한나라 제왕 혹은 정부가 지방 혹은 속국에 제공한 사여품이 아니라 경제적 교역품이었음을 의미한다. 낙랑 고분을 한사군 낙랑으로 오해받게 만든 우크라이나 우스터 알마의 스키타이 고분에서 출토된 칠기 중에는 낙랑 석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칠기와 구조, 크기, 형태, 문양 등이 유사하다.

카라샤르 & 언기국
카라샤르는 지금의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 언기현으로 타림 분지와 투르판 지역에 위치한다. 2천 년 전에는 언기국焉耆國이 있던 곳으로, 위구르족이 그 지역에 정착하면서 ‘카라샤르(喀喇沙爾)’로 불리게 되었다. 통일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혜초慧超가 쓴 『왕오천축국전』에는 그가 장안으로 들어갈 때 언기국, 돈황, 난주를 거쳐 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불교 기록에는 이 나라 명칭을 오이국烏夷國으로 기록하고 있어, 동이족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측케 한다.

2천 년 전 언기국은 쿠차국 다음으로 인구수가 많은 비교적 큰 나라였다. 주요 경제 활동은 농경, 원예, 동물 육종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당시 철제 농기구를 사용했고, 농산물로 목축민들에게서 가죽을 구입했으며, 야금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변 유목민들과 상업적,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특히 흉노와 밀접하여 한나라 사기에는 흉노의 속국으로 분류하였다. 언기국 왕王의 성姓이 용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