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6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가가도장]

    보은으로 충만한 믿음의 도방(여수오림도장 안기수, 박현숙 도생)


    신앙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다. 이는 태상종도사님께서 도생들에게 늘 강조해 주시던 말씀 중 하나이다. 자연의 섭리이자 만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참된 이치를 ‘진리眞理’라 하고, 바로 그 진리에 감화되어 관심을 갖고 마음을 열어서 인생의 행로를 정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관하는 것을 우리는 대체로 ‘신앙信仰’이라 부른다. 그런데 한 번 진리에 충격을 받아 각성된 그 마음과 정신을 한결같이 일관하여 가슴에 간직하고, 때때로 되새기며 인생의 축으로 삼는 진득한 ‘도인道人’은 생각만큼 그리 흔한 것은 아닌가 보다.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의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나 심지를 굳게 지켜 신앙이라는 이름에 위배되는 언행은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불러 주어야 할까. 정작 당사자 본인은 당연하고 일상적인 루틴의 경지에 도달해 있어, 새삼스레 신앙을 놓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게 부담스럽고 남사스런 일이겠지만, 적어도 인류의 생사존망을 염두에 두고 상제님 진리로 사람을 건져 살리겠다는 의지를 가진 도생이라면, 결국 심법을 바탕으로 하는 신앙의 본질에 충실한 도생의 신앙과 삶의 방식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신앙의 중심을 지키고 유지하는 마음의 자세, 그 저력의 근원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두 사람 공히 30년에 육박하는 신앙 역사를 지닌 여수오림도장 안기수(56, 녹사장), 박현숙(56, 교무녹사장) 부부 도생의 이야기다. 이 부부는 20대 중반의 젊은 시절 상제님 진리를 만나면서 받은 정신적인 충격과 감화를 구체적인 진리 확인의 과정에서 세세한 열정으로 더욱 승화시켜 가슴에 굳건한 진리의 축을 세운 사람들이다. 이번 도방 취재기를 바탕으로 이들이 진리를 이성으로 인식해서 가슴으로 오롯이 받아들인 과정을 살펴보고, 현실 삶의 과정에서 신앙이 어떻게 뿌리를 내려 갔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특히, 자녀 삼 남매 가운데 출생하면서부터 생사를 다투는 험한 고비를 넘긴 막내아들의 사례를 통해 태상종도사님께서 내려 주신 영적인 은혜를 치유라는 인사로 실현시킨 감동적인 체험을 살펴봄으로써 이신사의 진리 법칙을 공감하는 대열에 동참해 보시기를 권한다.

    지난 5월 둘째 주 화요일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19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날이었다. 이날 오후 취재진은 전남 여수시 웅천동에 소재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5층에 있는 가정도장에 들어서면 출입구에서 바라다보이는 내부 통로 벽에 세로로 걸린 태을주 액자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거실과 주방이 이어진 공간이 나온다. 먼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준 도방의 주인장 안기수, 박현숙 도생 부부와 장남 안태성 도생, 둘째 안순형 도생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거실 바로 옆에 위치한 도방에서 상제님, 태모님께 예를 올렸다. 천신단이 모셔져 있는 도방은 넓지는 않으나 가족들이 모여 앉기에는 적당한 공간이었고, 한쪽 벽 좌측에 배치되어 있는 책장 옆 벽면 상단에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이 크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아래에는 순백색으로 빛나는 청수그릇이 원목으로 제작된 고급스런 단 위에 깔끔하게 놓여 있다. 취재진은 다시 거실에 자리를 잡고 네 가족과 마주 앉아 지나온 신앙의 출발과 과정, 그리고 가족이 겪은 애환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구도의 길에서 만난 동반자의 인연


    조상이 붙잡은 구도의 방황
    안 도생은 전남 보성에서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 시절 여러 사정으로 인해 가정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탓에 여유롭게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자신의 중심을 지키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그리며 생활했다. 고교 시절에는 기독교 계통의 미션 스쿨에 다니면서 나름대로 삶의 방향을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채플 모임 등을 통해 얻은 결론은 여러 측면에서 진리를 설명하는 논리가 부족하고 모순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결국 대학에 진학하여 군 복무를 마치고 1986년 복학을 한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마음에 품어 온 삶의 목적과 해답을 찾는 그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우선은 마음을 닦는 일이 중요해 보여서 수행을 하는 동아리를 친구와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불교와 증산도가 괜찮아 보여 관심을 갖다가 증산도 동아리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안 도생은 동아리 회장이었던 김철식 도생에게서 ‘다이제스트 개벽’ 책을 받아 와 친구와 같이 읽었다. 책에서 말하는 놀라운 정보와 메시지를 접한 안 도생은 ‘이것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크게 주저할 것 없이 바로 증산도 동아리에 참석하면서 늘 갈망하던 상제님 진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다이제스트 개벽’과 ‘증산도의 진리’ 책을 가지고 주로 공부를 하였으며, 이렇게 한 6개월 정도가 지나자 진리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수행을 해도 특별한 기운이나 체험을 하지 못하고 정체 상태에 빠졌다. 뭔가 가시적인 체험을 너무 기대했던 탓일까, 진리 이해의 차원을 넘지 못한 채 동아리방에 나가는 재미도 별로 없고 복학해서 공부도 해야 한다는 여러 생각들이 중첩되면서 차츰 동아리 방에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공부하던 ‘증산도의 진리’ 책은 다른 책들과 함께 잘 묶어 다락방에 올려놓고 말았다.

    이런 상태로 얼마가 지나자 갑자기 진리책이 무척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그리하여 진리책을 다시 꺼내 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 도생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때 왜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졌을까에 대해 이따금 돌이켜 볼 때가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상님께서 자손줄을 건지려고 제 생각을 돌려놓으신 것입니다. 선령들께서 얼마나 애를 태우셨을지 상상이 됩니다. 이후 저는 지금까지 마음을 지키며 상제님 진리 안에 잘 머물고 있습니다.”

    친구와의 공감을 위해 건넨 진리책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을 당시 안 도생은 지금의 아내인 박현숙 도생을 만나고 있었다. 그는 교제 중인 박 도생에게 자신이 인생의 길을 찾아 이렇게 진리 공부를 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싶었다. 안 도생이 전하는 진리 공부 얘기에 박 도생의 첫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사람이란 대부분 일상적이지 못하고 수용 범위를 벗어난 얘기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경계를 하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갑자기 생소하고 생전 처음 듣는 증산도 공부 얘기를 듣고 박 도생이 반대한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그러자 안 도생은 ‘증산도의 진리’ 책을 박 도생에게 건네주면서 ‘읽어 보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나도 공부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은 평소 박 도생이 독서를 무척 좋아하는 성향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안 도생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 벌어졌다. 박 도생은 진리책을 아주 진지하고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건지 대략 살펴나 보자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책을 읽으며 많은 감화를 받은 박 도생은 안 도생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안 도생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설명을 해 주면서 진리를 대화의 주제로 삼는 장면이 펼쳐졌다. 이러한 공감대가 크게 확장되어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고 살아 온 지금까지도 두 사람은 상제님 진리를 함께 신앙하고 있다.

    친구를 걱정하다 몰입한 진리 세계
    박 도생은 전남 보성에서 3남 3녀 중 셋째 딸로 출생했다. 부유한 집의 막내딸로 성장하면서 박 도생은 아버지로부터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늘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 교육 탓인지 박 도생은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삶의 고비마다 행보를 결정하는 든든한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어느덧 20대 중반이 되어 아름다운 청춘 시절을 보내고 있을 즈음 박 도생은 친구처럼 지내던 안 도생의 권유로 ‘증산도의 진리’와 ‘셈과 컴퓨터’라는 두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셈과 컴퓨터’ 책은 박 도생의 전공과 무관하지 않아서 큰 부담이 없이 받아들였지만, ‘증산도의 진리’ 책은 처음 보는 생소한 것이어서 일단 궁금하다는 생각이 있었고 한편으로 이를 권유한 안 도생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구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더구나 당시 천주교 신앙을 하고 있던 박 도생은 기성 신앙의 범주를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이 친구가 잘못된 사상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 도생이 취한 그 다음의 선택과 대응은 분명 남다른 것이었다.

    “당시 친구가 무언가 평범치 않은 사상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저의 짧은 소견과 편견으로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었지요. 그것이 새롭고 뭔가 도움을 주는 어떤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제대로 살펴본 후에 얘기를 하더라도 하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증산도의 진리’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제가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일상의 도움이 컸어요.”

    이렇게 정면 돌파의 선택을 하고 책을 정독한 박 도생은 뜻밖으로 심오한 진리 내용에 빠져들었고, 이후 증산도에서 출간한 책들을 모두 사서 읽었다고 한다. 인류의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는 희망과 비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증산도의 진리는 편협된 진리가 아니고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마음이 커지고 의식이 진보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친구인 안 도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네가 하는 것은 그른 게 아니다.”
    박 도생이 증산도 진리에 몰입을 한 것은 책을 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박 도생은 자연스럽게 그간 공부한 내용을 아버지께 말씀을 드릴 기회를 가졌는데, 아버지께서는 어릴 적에 박 도생의 증조할아버지께서 아버지 손목을 잡고 동네를 한 바퀴 산책을 하시며 들려주던 말씀을 전해 주셨다고 한다. 당시 증조부께서는 어린 손자에게 “우주에도 사계절이 있고 우주가 법칙적으로 원형이정 이법으로 순환한다.”는 말씀과 함께 “네가 오래 살면 좋은 세상을 볼 수 있겠다.”는 말씀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말씀들을 기억해 내시며 “네가 공부하는 것은 그른 게 아니라 좋은 진리이니 열심히 해 보라.”는 격려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박 도생은 본격적으로 증산도 진리를 더욱 세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롭게 펼쳐지는 진리의 세계는 실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역사의 뿌리와 진실은 어떤 것인가’라는 근원적 문제를 비롯하여, 시원종교의 핵심과 가르침, 철학 및 과학의 의미와 관계, 신교문화의 원형과 유·불·선·기독교 신앙의 본질 등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역을 통합된 사고로 공부하는 것은 무척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박 도생은 증산도 진리가 가진 위대한 힘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기적인 사고에서 출발하여 자기 만족을 위한 진리 탐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갖추고 모든 사물의 본질과 현상을 조감해 볼 수 있는 이 진리가 더 품격 있는 지성인으로 이끄는 힘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박 도생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람이 진리에 감화되어 자신의 삶을 바꾼다는 것, 조상의 음덕과 인연으로 새롭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보여질 수 있는지, 그 과정과 모습을 다시 한 번 느끼고 확인하게 되었다.

    입도와 결혼에 얽힌 사연


    입도와 괴정동 본부의 추억
    안 도생은 서울마포도장에서 태상종도사님을 처음 뵙게 되었으며, 진리책과 더불어 동양학에 관련된 강의를 들으면서 진리가 깊어졌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안 도생은 드디어 1988년 4월 19일 서울숭인도장에서 박 도생과 함께 입도를 했다. 입도 후 본부 교육은 당시에 태전 괴정동에 있던 본부 건물로 가서 받았는데 안 도생은 약 30년 전 그때의 귀중한 추억들을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괴정동 본부는 태상종도사님께서 어렵게 마련하신 곳이었는데, 제가 갔을 당시엔 2층으로 증축하기 전의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어요. 그곳에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열정적으로 진리 공부를 하고서 다음 날 새벽에 서울로 출근을 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도 못하는 진짜 공부를 한 거였어요. 그 자부심과 만족감, 그리고 벅차오르는 환희에 피로조차 잊고서 출근해 일을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후 마침내 성전이 2층으로 증축이 되었을 때는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몰랐던 모습도 제게는 흐뭇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안 도생이 전하는 3변 도사道史의 한 장면이다.

    결혼보다 입도가 먼저였던 이유
    누군가 사람 사이의 일과 관계라는 것은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천변만화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는 많은 변수와 사연과 인연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에서 부부로 만난 박 도생과 안 도생의 사이에도 묘한 인연이 작용했다. 박 도생에게는 아버지 남자 형제분이 세 분 계시는데 둘째 큰아버님과 결혼하신 둘째 큰어머님은 바로 남편인 안 도생의 이모님이시다. 박 도생의 시어머님과 자매지간이니, 겹사돈이 된 것이다. 둘째 큰아버님 기일 날, 한 자리에 참석한 안 도생을 만나게 되어 인연이 시작되었고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기에, 박 도생은 이것이 돌아가신 큰아버님께서 맺어준 인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고 한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理 신神 사事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그 순간부터 삶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신중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1988년 올림픽이 열린 해, 호돌이 마스코트가 눈에 선하게 밟히던 그 해 음력 4월 19일에 안 도생과 박 도생은 입도를 먼저 하고 이어 음력 7월 3일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한 이유를 물으니, 두 사람이 공히 결혼보다는 입도가 우선이고 신앙의 근력으로 맺어진 인연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리 순서를 정했다고 했다.

    그 결혼의 열매로 두 도생은 삼 남매(2남 1녀)를 두게 되었다. 안태성 도생(29세, 사감), 안순형 도생(24세, 교무종감), 안근호 도생(17세, 도감)이 그들이다. “모태 신앙을 해 온 우리 아이들은 상제님 진리와 함께 성장해서 진리 중심의 가치관으로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했어요. 남들은 요란스런 얘기를 하며 자식에 대해 만족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데, 저희 부부는 그런 거보다는 심지가 바르고 옳고 그른 판단 능력을 보이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자신을 보살피고 지키는 에너지가 든든하거든요.” 박 도생이 엄마의 입장에서 자식들을 바라보는 평가이자 깊고 잔잔한 애정이 드러나 있는 말이다.

    진리에 보은하는 마음은 신앙 정착의 비결


    정성의 기도로 끌러진 이직과 녹줄
    안 도생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여느 부부가 그렇듯이 현실 가정 생활에 바탕이 되는 것은 녹줄, 곧 경제력의 문제였다. 녹줄이 불안정하고 어려워지면 때때로 부부 간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는 가정 생활상의 문제에서 나아가 신앙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결혼 후 처음에 안 도생은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박 도생도 맞벌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 도생이 불가피하게 회사를 옮겨 이직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녹줄이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면서 이직을 위한 기도에 정성을 쏟고 있던 무렵, 아내인 박 도생이 ‘호남정유(주)’에서 사원 모집을 한다는 신문 공고를 발견해 안 도생에게 보여주었다. 당시 대부분의 회사는 신규 사원에 한해 채용 공고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경우는 마침 신규사원과 경력사원을 모두 모집하는 특별한 케이스였다. 기도에 응해 하늘이 내려 준 기회라 여긴 안 도생은 모집에 응시해 합격을 했다. 지금은 ‘GS칼텍스(주)’로 상호가 바뀐 이 회사의 여수 지역 공장에서 안 도생은 현재까지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며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과거에 어려웠던 시절이나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룬 지금이나 그 시기를 막론하고 안 도생은 봉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도장 신단에 성금을 헌성했다고 한다. 그러한 신앙 습관은 안 도생의 신앙 자존감이자 진리와 선령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안 도생은 그러한 헌성 얘기와 더불어 지금까지 가족 모두가 무탈하게 신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지혜롭게 살림을 꾸린 아내 박 도생의 공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성스러운 가정도장의 기틀을 유지해 나가는 것도 알고 보면 안주인의 심법과 덕성에 의해 운영되는 결과임을 생각해 본다면, 안 도생이 박 도생을 향해 한 그 말은 단순한 덕담을 넘어 진심이 담긴 말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은 자신을 위한 선택과 기쁨
    한편 아내인 박 도생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경제적 문제 등 여러 요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신앙 정착의 과정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박 도생은 신앙 정착의 문제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시각에서 자신이 생각해 온 바를 쏟아냈다.

    “신앙의 길은 자신을 위한 선택이고 누군가 끝까지 책임질 사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의 과정에서 누군가와 도움을 주고받을 수는 있지만 신앙의 길, 인생의 길을 찾아서 걷는 자신의 행보가 강요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진리를 찾는 기쁨과 함께 책을 통해서 성숙하고 넓고 깊어지는 자신을 느낄 때, 비로소 신앙에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철학 과학 예술 역사 음악이 망라된 종합 예술이 종교라고 생각해요. 막힘이 없는 진리 세계, 보편적 진리 세계를 향해 열린 공간, 열린 심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아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소중하고, 가까이 있는 이웃들이 소중하며, 더불어 사는 모든 인간이 소중함을 공유하는 신앙, 그렇게 경계가 없는 신앙이 저는 너무 좋았거든요. 나의 근본을 알게 하고 근본 뿌리에 대해 긍정하는 것은 나 자신을 건강히 살도록 하는 본질이라고 봅니다. 저에게 상제님의 진리는 질풍노도의 인생을 아름답고 가슴 따뜻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선물이었어요. 그래서 그 진리의 고마움에 대해 감사하고 이에 대해 보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면서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성숙과 은혜의 성소, 도방


    신앙을 성숙시킨 가정도방의 힘

    가족의 일원에게 닥친 힘든 일을 기도와 지혜로써 극복한 이 가정에 ‘가가도장’이란 어떤 의미로 자리 잡고 있을까. 이 부부 도생은 입도한 직후부터 자연스럽게 집안에서 가장 밝고 깨끗한 공간에 천신단을 모셨고, 매일 조석으로 봉청수와 함께 기도 수행을 하며 근본신앙을 유지하여 왔다. 집에 출입할 때, 그리고 중요한 문제나 소식이 있을 때 항상 천신단에 인사를 올리고 진심과 정성을 다해 고하는 것은 이 가정에서 당연한 신앙 문화가 되어 있다.

    “우리 가족에게 가가도장은 아주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생활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가가도장은 우리에게 상제님 신앙의 성소이며 지역 진리의 사령탑으로서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의통성업을 완수하는 현장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가가도장을 선포하신 종도사님 말씀 취지를 잘 받들어 준비된 상제님의 진리의 사령탑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부부의 신앙이 한 단계 성숙되었던 것은 셋째 아이가 태어나 병을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서였습니다. 가족의 안위를 살피고 기도와 정성으로 구하며 은혜와 감화를 받는 일이 모두 가족 중심의 가정도장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늘 감사하고 은혜로운 곳이 곧 가가도장입니다.” 이 부부가 가정도장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솔직 담백한 메시지다.

    포교와 도장을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
    안 도생은 입도 이후 부모님, 형제자매, 가족 등을 포함해서 열 명이 넘는 포교를 했다. 안 도생의 남동생은 진리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입도를 했으며, 부모님도 개벽에 대해 들으시고 큰 반대 없이 입도를 하셨다. 대부분이 가깝고 편한 가족관계라서 신앙 결속력이 오히려 강하지 못한 측면도 있으나 열성을 갖고 진리를 전한 체험을 하는 과정 속에서 신앙의 기본을 되새기며 일정한 신앙의 성숙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박 도생도 신앙의 기본인 치성 참석 등 근본 신앙에 일심하는 가운데, 신앙하시는 도생 한 분 한 분을 매우 소중한 동반자로 여기면서 무엇이든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형제애를 발휘하는 것이 포교나 도장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안 도생 부부가 함께 증산도 신앙을 하다 보니 3명의 자녀들도 전부 모태 신앙을 하며 자연스럽게 ‘가족신앙’이 형성되었다.

    마음 지키며 함께하는 보은 신앙을 위하여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신앙 계획이나 다짐해야 할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안 도생은 “이제까지 신앙을 하면서 직업 등 여러 환경 요인들로 인해 기대한 만큼 많은 활동을 하지 못하여 늘 아쉬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상제님과 태모님,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서 늘 마음을 지키고 일심하는 신앙인으로 살겠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가장 귀중하고 무엇보다 우선하는 신앙의 목표입니다.”라고 신앙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박 도생은 “신앙의 길은 저의 소중한 인생길입니다. 저에게도 꽃다운 청춘이 있었고, 쉼 없이 신앙과 함께 달려온 가운데 어느덧 지천명인 오십 하고도 중반에 이르렀습니다. 도성덕립이 되는 그날까지 힘 닿는 데까지 봉사하고 작은 음덕이라도 나눌 수 있는 심법을 지키면서 위대한 상제님 진리를 전하는 전법자 신앙을 하겠습니다. 부모 형제들이 함께하는 신앙, 이웃과 함께하는 신앙. 그것이 보은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라는 유려한 메시지를 남겼다.

    이 부부만큼이나 이번 인터뷰에서 주목을 받은 세 남매의 생각은 어떨까? 부모의 신앙을 바라보는 각자의 입장과 장래 계획을 주제로 물었고, 이에 대해 장남 안태성 도생은 우선 자녀들을 차별 없이 가르치고 기르신 부모님의 교육 방식에 대해 감사와 지지를 보냈다. 막내 동생이 아팠을 때 자신이 여동생과 함께 집안일을 챙기고 스스로 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알게 모르게 체화된 부모님의 교육과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신앙과 관련된 일에 철저한 부모님의 마음을 배우고 이해하면서, 지금 하고 있는 영화 편집에 관련된 일을 더욱 잘 닦고 연구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보겠다는 꿈도 밝혔다.

    초등학교 교직에 뜻을 두고 있는 둘째 안순형 도생은 평소에 어려운 일은 늘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오랫동안 꾸준한 신앙을 해 오면서 도장 일을 집안일보다 더 챙기시는 부모님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현재 고교 1학년에 재학 중인 막내 안근호 도생은 이날 인터뷰 현장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국익國益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 평소 강조하는 장래 희망이라고 전한다.


    가장 아팠던 가족의 시련, 태사부님의 은혜로 끌러 내다
    갓난아이에게 닥친 모진 고통
    안 도생과 박 도생은 진리를 보는 관점이 분명하면서도 한결같다. 지역도장과 가정도장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고, 늘 꾸준한 관심과 노력을 통해 때때로 직면하는 어려움을 이기고 안정을 찾는 저력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가정이 늘 평온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 가족에게 가장 어렵고 아팠던 시련은 2001년 막내아들 근호의 출생과 함께 찾아왔다.

    막내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얼굴에 사이즈가 커다란 혈관종을 입 안에 달고 있었다. 혈관 조직의 기형이 커서 얼굴 한쪽이 부풀어 올라 있었고, 입 안의 공간 확보가 안 되어 우유를 먹일 수가 없었다. 병원측에서는 생존율이 5~10% 안팎이라고 했을 만큼 상태는 심각한 것이었다. 막내 출산 후 박 도생은 몸조리는커녕 태어난 아이 모습조차 보지 못하였고, 아이는 최초 진료 의사의 강한 권유에 의해 태어난 지 겨우 3시간 만에 신생아실이 있는 광주의 큰 병원으로 이동을 했다.

    박 도생은 아이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보낸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산부인과에서 퇴원하고 일주일 만에 처음 만난 막내아들의 얼굴은 비대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잘생긴 한쪽과 달리 반대쪽 얼굴은 너무도 달라 박 도생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아이를 보지 못하게 했던 것도 산모의 건강 회복을 염려했기 때문임을 알고서 원망도 사라졌다. 이제 어떻게 하면 소중한 생명을 치유할까 하는 오직 한 생각에 집중해야 했다. 옮겨 간 광주의 큰 병원에서도 진단이나 치료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자, 최종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의료진이 있다는 서울 삼성의료원 암병동으로 다시 옮겨 갔다. 그곳에서는 흔치 않은 케이스라 의료진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였고 담당 의사들이 보호자와 함께 상담을 거듭하며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되었다.

    네 번의 조직 검사를 했으나 병명이 분명하지 않아 일단 종양에 대한 항암 치료를 진행하며 깊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안 도생과 박 도생은 그 초조함과 긴박함 속에서 그냥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침 저녁으로 종이컵에 청수를 모시고 간절한 기도를 했다. 천지일월 사체, 그리고 조상선령께 간구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와는 별개로 병실에서 막내를 담당한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의 극진한 보살핌도 가족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고마운 그분들의 정성과 노고를 잊을 수 없어 박 도생은 막내 아이의 사진 앨범에 고생하신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 성함을 적어 두기도 했다.

    “우유를 먹일 수 있게 해 주마.”
    밤낮으로 올린 기도의 원력이 생겨서인지 박 도생은 쪽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태상종도사님을 뵈었다. 병실에 들어오신 태상종도사님께서는 박 도생에게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싶으냐?”고 물으셨고, 박 도생은 “네 그렇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아이에게 우유를 먹일 수 있게 해 주마.”라고 약속을 해 주셨다. 박 도생은 꿈에서 깬 후에도 태상종도사님의 그 음성과 말씀이 떠오르며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이튿날 조직 검사를 위해 기다리는데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학술회의에 가신다는 이유로 다른 분이 아이를 담당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런데 이 의사 선생님은 본래 담당하던 분과는 달랐다. 조금은 조심스럽고 소극적 치료를 하던 이전 의사와는 달리, 바뀐 의사 선생님은 적극적인 치료 방법을 시행하여 입안에 있는 조직들을 과감히 도려내고 공간을 확보했다. 수술이 성공하고 아이를 보는 순간 박 도생은 감탄을 했다. 꿈속에서 “우유를 먹일 수 있게 해 주마.” 하신 태상종도사님의 약속이 의사 선생님의 손길에 의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박 도생은 이신사의 이법이 현실 세계와 합일되는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결코 잊지 못할 일이었다. 이렇게 험난한 치료와 은혜로운 체험의 과정을 겪은 막내아들 안근호 도생은 무사히 퇴원을 한 후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일 년에 두 번씩 입원을 거듭했지만, 현재는 고등학교 1학년으로 성장하여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삼 남매가 만든 작은 반전
    막내의 건강과 관련해 아픈 시간들을 보냈던 가족 중에는 삼 남매 가운데 맏이인 형 안태성 도생과 둘째인 누나 안순형 도생도 있었다. 막내가 태어나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했을 때 형은 12세, 누나는 7세로 아직은 모두 어린 나이였다. 동생이 출생 후 집에 오지 못하고 치료와 투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무척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고, 동생의 치료 때문에 집에 부모님이 없는 시간이 많아지자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내의 투병 때문에 우리 남매 사이는 더 좋아졌어요.” 의외의 말이 형 안태성 도생으로부터 나왔다. 당시의 상황이 조금은 혼란스럽고 불안하며 힘들기도 했을 텐데 반대로 남매 사이가 좋아졌다고 하니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졌다. 대체로 가정에서 부모님의 부재는 아이들의 심신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생활도 다소 무질서해질 것이라고 추정하는 시각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남매는 동생의 투병과 부모님의 부재 등 평범하지 않은 상황을 겪자 곧바로 자신들이 집에서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 행하기 시작했고 혼자서 어려운 일은 서로 의논하고 돕기도 하면서 자율과 협력의 의미를 체득해 나갔다. 동생의 투병으로 공백이 생긴 상황에 적응하며 스스로 채우고 개선하는 총명한 모습을 보여 준 셈인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 오히려 남매의 사이는 이전보다 더욱 굳건해지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신뢰하는 폭도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시련에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초립동들의 자유로운 창의성과 순수한 심성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리다고 마냥 아이 취급을 하는 것이 반드시 타당한 것은 아니다. 독자 여러분은 혹시 ‘이러면 저러할 것이다’라는 고정된 기성 관념으로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이번 호 가가도장은 오랜 기간 동안 신앙을 해 오면서 심법의 중심 축을 바로 세우고 진리에 대한 보은의 자세를 견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도생 부부와 자녀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아 전했다.

    이 부부는 증산도의 진리 책을 통해 사상적으로 깨지고 심화되는 스스로의 변화 과정과 조상으로부터의 직간접적인 감화를 통해 더해진 확신의 과정이 결합되어 그들 자신도 미처 감지하지 못한 신앙의 견고한 기틀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 신앙의 귀중함을 진리의 은혜로 알고 이에 보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로 살아온 그 마음이 바로 신앙 정착에 좋은 토대가 되었고 동시에 강력한 신앙 버팀목으로도 작용을 했다.

    또 하나, 이 가족이 출생과 동시에 엄습한 병마의 큰 고통으로 위태로웠던 막내아들의 생명을 태상종도사님의 영적 은혜를 받아 곧바로 인사화시켜 건져낸 것은 이신사의 진리 법칙을 직접 확인한 놀라운 체험이 되었다. 결국 이를 통해 그들은 진리를 더 깊이 각인하고 가족의 결속과 안정을 다지는 효과를 얻기도 했다.

    오랜 신앙으로 남은 것은 마음을 지키고 서로 함께하며 보은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 말하는 이 부부의 명료하고 담백한 메시지에는 수많은 경륜과 진리와 신앙의 중요한 기본 틀이 온전히 녹아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진중하고 넉넉한 신앙의 심법과 정성이 반드시 소기의 결실로 이화되기를 기원드리며, 안기수, 박현숙 도생과 그 가족들의 도방이 상제님과 태모님, 그리고 조상선령신의 크신 가호와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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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06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