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을 위한 보이지 않는 이끌림 외 (배근호, 김홍, 서희지, 몬르디 아카한, 조국형, 윤성찬)

[입도수기]

인연을 위한 보이지 않는 이끌림



배근호(37, 남) / 부산가야도장 / 147년 음력 2월 입도

2017년 2월 무렵 몸과 마음이 갑자기 쇠약해져 도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의 사촌 누나와 자형이 증산도 수행을 한 지가 30년쯤 되었고,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에 사촌 누나를 통해 증산도에 대해 잠깐 들었습니다. 하지만 교리, 수행, 기도 등의 단어들은 그때 저에게는 상당한 거리로 느껴졌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 이렇게 입도식까지 마치다니... 예전에 저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2016년 11월쯤 집을 알아보다 우연히 어느 부동산을 알게 되었습니다. 관계자와 같이 매물 확인 차 부산 어느 지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 보니 우연찮게 증산도 도장 앞이었습니다. 그때 도장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어렴풋이 20여 년 전에 사촌 누나로부터 들었던 증산도가 떠올랐습니다. 그렇다고 인연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며칠 후 길을 가다 우연히 ‘대진성주회’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익히 알고 있었고 가끔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던 터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근데 그날따라 그 사람들이 집요하기도 했고 저도 중간에 시간이 남는 바람에 얘기는 들어보자라는 생각에 커피 한잔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아까웠지만 ‘이것도 작은 경험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만약 존재하더라도 신은 인간의 영역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또한 스스로 만들어 내는 불안과 공포를 비현실적인 신의 영역과 결부시키려는 태도는 고통을 회피하려는 관념의 또 다른 모습이며 스스로 무지하고 약한 존재라는 증거다.”라는 정도의 표현을 그 사람들에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논리든 사상이든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는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허구적인 믿음을 통해 같이 소통함으로써, 힘듦을 극복하는 하나의 문화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고, 저는 그럴 여유도 없을뿐더러 지금껏 제 스스로 책을 통해 신념을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1월에 들어서자,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채무 관계에 있던 친구가 자살을 해서 금전 손실을 보고, 20년을 알고 지낸 친구와 갑자기 문제가 생기고, 사기꾼에게 금전 손실을 보고, 그 외 크고 작은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결국, 내키지는 않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액땜한다는 생각에 대진성주회 쪽에 연락을 하고 치성을 올렸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변화는 있을 건데 치성 정도는 올리자. 제사 정도는 지낼 수 있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치성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한 두어 번 정도 가서 주문을 읽고 기도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신앙과 믿음에는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물론 애초에 마음가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의 방문은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연으로 제대로 된 태을주를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고, 후에 증산도를 찾는 계기로 작용한 것에는 지금 보면 감사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설 연휴가 끝난 직후부터 갑자기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가수면 상태가 지속되고, 심장 박동 수 증가로 불면증에 손끝 마디가 붓는 증상 등등...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도 안 되는 고통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의학 서적과 신경계 관련 자료를 보고 스스로 진단하고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지자 나중에는 화가 났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먹자.’고 다짐하는 한편으로, 의학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갑작스런 범불안장애 또는 공항장애 같은) 그런 것만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이어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났고, 한 달도 되지 않아 결국 증산도 가야도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병원이 아닌 신앙과 수행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일정을 한 달 뒤로 미루고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처음은 온전히 저를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제가 잘 아는 개신교, 천주교, 불교, 대진성주회를 뒤로 하고 왜 증산도를 택하였나에 대한 의문에 답하긴 힘들지만, 어떤 이끌림이지 않았을까, 인연을 위한 보이지 않는 인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합니다. 순리에 따라 모든 생명이 그렇듯 힘든 순간에는 가장 편하고 안전한 곳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포정님을 만나 처음으로, 그간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경험들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사업, 주식, 사기, 파혼, 자살 등등... 과거에 저는 그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고통을 통해 나는 더욱 강해진다’라는 신념으로 극복해 왔었습니다. 책을 탐독하고 의학 서적을 보고 신경 과학을 통해 해석하고 상담을 하고 여행을 가고, 허나 그런 것들이 해소되지 않고 저에게 겹겹이 쌓여 있었다는 걸,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걸 후에 수행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과 마음은 회복되고 안정되어 갔습니다. 수행을 통해 심신이 안정되고, 기도를 통해 정신도 건강해졌습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이 만들어 내는 관념적인 허상이다’
‘편도체 작용이며 약물로 회복된다’
‘고통은 정신력과 인내심으로 극복된다’
‘약한 자들의 변명이다’ 이런 생각들이 과거의 저였다면

‘신은 존재하며 모든 신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도 존재한다’
‘생각이 만들어 내는 관념적인 허상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편도체 작용은 몸이 나에게 말하는 관심의 신호이다’
‘정신력과 인내심으로는 고통을 잠시 억누를 수 있을 뿐이다’
‘깨달음의 결과이다’라고 바뀌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탄생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한 종의 탄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노력과 과거의 영향 안에서 탄생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앞으로는 온전히 나를 위한, 나 중심의 삶이 아닌 이타심을 가지고 상호 공존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라고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기도와 수행을 통해 스스로와 대화를 하며, 불안한 자아, 이기적인 자아, 관념적인 자아, 겁 많은 자아, 부끄러운 자아들과 대면함으로써 지금껏 나를 둘러싸고 있던 관념들을 하나씩 벗겨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입도식을 위한 과정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신앙인, 구도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21일 후 마침내 입도식을 무탈하게 치렀습니다. 증산도의 진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저의 자아관에 변화를 주었으며, 왜곡된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가는 길이 상제님의 진리 안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다가올 고통은 저를 위한 또 다른 의미라고 믿습니다. 지금 비로소 저는 욕망 좇음 안에서 느껴왔던 수많은 고통의 흔적들 속에서 느리지만 조금씩 해방되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삶 속에서 느끼는 고통은 행복의 전조 현상일 수 있으며, 그 순간순간에 내가 느낀 고통의 크기만큼 남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이것 또한 상제님께서 의도하시는 나를 위한 계획이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항상 조상님들과 함께하며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를, 상제님의 진리 안에서 깨달은 삶을 살기를, 훗날 천지대업에 힘을 보태어 인류를 구원하는 일꾼이 되기를 소망하고 다짐합니다. ◎

진정으로 살 곳이 바로 여기에



김 홍(73, 여) / 대구대명도장 / 147년 음력 2월 입도

저는 1944년생이고 중국 길림성 연변延邊에서 왔습니다. 아버님은 강원도 평창군에서 살다가 7살 때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님들을 따라 피난을 가서 중국 연변 완청에서 살았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인 저는 9남매의 맏딸이며, 총 7명의 자매와 2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지금은 5명의 자매가 생존해 있습니다.

2013년 12월에 작은딸이 한국에 시집온 후 저는 2004년 4월에 초청 받아 한국에 왔습니다. 이후 식당, 모텔카운터, 청소, 간병 등의 일에 종사하다가 2012년 4월 골다공증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2달이나 누워 있다가 건강이 회복된 후에는 예전처럼 일을 못 하는 상황이 되어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애를 썼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수십 년의 파란곡절 많은 인생살이를 되돌아보면, 지난 33년의 세월은 기독교 신앙생활을 했었고, 한국에 와서 지낸 13년 동안은 기쁜 일, 행복한 일도 많았지만 아픔과 슬픔, 고통과 상처, 좌절과 절망의 나날도 많았습니다. 가정의 불행, 배신감, 자식과의 생이별 등을 겪으면서 절망 끝에 몇 차례 자살까지 하려고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는 딸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어 또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살았습니다.

붉은 닭띠 해인 2017년 2월 초에 드라마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던 중에 우연히 상생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상생” 두 글자가 눈에 띄었고 마음에 확 들었습니다. ‘증산도 도전’, ‘환단고기’, ‘춘생추살’, ‘생장염장’, ‘환국-배달-조선’ 등등 상생방송에서 나오는 단어가 너무도 신기하고 재미있고 호기심에 끌려 매일 상생방송을 보았습니다. 특히 “만병통치 태을주, 소원성취 태을주”, 이 말이 마음에 들어 한 글자 한 글자 적으면서 태을주를 매일 따라 읽었습니다.

그런데 상생방송을 본 지 며칠 안 된 2월 6일 밤에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러 가던 중 우연히 하늘을 쳐다보다가 ‘증산도’ 간판을 보았습니다. 너무 기쁘고 반가워서 그 즉시 전화를 하고 상담을 했습니다. 너무나 친절하고 속 시원하게 상담해 주신 대명도장의 수호사님께서 “이곳에 와야 됩니다. 빨리 오세요.”라고 하신 말씀에 저는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딸과 손녀를 살릴까. 앞으로 돈도 잘 벌고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답을 얻으려고 도장을 찾아왔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태을주를 많이 읽어서 딸과 손녀를 살려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침 6시 수행과 밤 수행을 하고 상생방송을 매일 보고 『도전』 공부를 하면서 너무나 신기하고 놀랍고 감동되고 이제 우리 모두 살 곳을 찾아왔구나 하여 감개무량했습니다. 진짜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도장에 와서 몇 번 공부를 했는데 하루는 꿈에 큰 집안에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문어귀에서 밖을 향해 앉아 있었습니다. 앞을 보니 몇 미터쯤 앞에 자그마한 방이 있는데 환한 그 곳에 몇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남자분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리는데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고 저 집으로 가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몇 번의 『도전』, 태을주 공부를 통해 천지개벽 시대에 새 생명의 길은 이 길밖에 없고 열심히 공부하며 부모 형제 자식과 조상님들도 구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하루속히 돈도 잘 벌어서 조상님들 천도식도 올려 드려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얼마 전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흐뭇해하시면서 저를 보고 왼손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환히 웃으셨습니다. 저도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증산도 진리의 참 모습과 상생의 참뜻, 후천 가을 문화의 새 진리, 인류 새 문화의 교과서 『도전』을 공부하면서 얼마나 좋고 즐겁고 신기하고 신비스럽고 감동적인 새로운 지식을 깨닫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가을 개벽, 현대 문명의 대전환 시기에 9000년 한민족의 국통맥을 바로잡고 한민족의 자긍심과 사명을 일깨워 주시고 미래의 희망과 비전을 알게 해 주신 상제님이시여, 태모님이시여, 태상종도사님이시여, 종도사님이시여, 천지신명이시여, 조상선령신이시여. 이 좋은 증산도로 인도해 주신 은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어머니를 믿고 진리와 함께하다



서희지(여, 20) / 태전유성도장 / 147년 음력 2월 입도

저는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3살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엄마 혼자 가정 형편도 넉넉지 않은 채로, 우리 두 자매를 키워 주셨습니다. 엄마는 아버지와 사별하고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오면서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제가 고등학생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을 때부터, 엄마가 방 한쪽에다가 물을 떠 놓고 기도를 드리시는 걸 보았습니다. 엄마는 그것이 우리 조상님들을 모시는 것이고, 옛날부터 한민족이 해 오던 건데 지금은 일본에 의해 많이 없어진 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태을주’라는 주문이 있는데, 항상 마음속으로 잘 읽으면 좋은 기운이 생긴다고 해 주셨습니다. 뭔지는 잘 몰랐지만,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읽기도 하고, 긴장이 될 때나 몸이 아플 때도 읽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태을주는 입에 붙게 되었습니다.

집의 TV에는 항상 STB상생방송만 켜져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내용이 자주 나오는 걸 보았고, 오며 가며 보다가 특히 ‘우주1년’과 ‘개벽’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엄마는 당신께서 지금 증산도를 신앙하고 있는데, 같이해 보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자매는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 교회도 다녔다가, 원불교, 불교 등 여기저기를 다니다 보니, 종교 자체에 몸서리를 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증산도를 같이 신앙해 보자는 말에, ‘엄마가 또 다른 종교에 빠졌구나’라고 생각하고 어머니 말씀을 들은 체 만 체 하였습니다.

그래도 딸로서 엄마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왜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기에 대화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엄마는 진리를 찾아서 여기저기 여러 종교를 찾아다니셨는데, 다 아닌 것 같아 다른 데를 찾아보던 중 증산도를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 이야기를 찬찬히 듣다 보니 증산도가 이상한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증산도 신앙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김해장유도장 포정님은 김해에서 여수까지 먼 길을 오가면서 같이 아버지 제사도 지내 주시고, 인체와 우주의 신비 등 증산도 진리를 많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항상 연락을 주시면서 기쁜 일에 함께 축하해 주시고, 슬픈 일에는 위로를 해 주시며 많이 챙겨 주셨습니다.

그러다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전북대와 충남대 중 선택을 해야 했는데, 등록을 하는 과정에서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충남대에서 장학금 받은 것을 제외하고 학생회비를 더한 금액을 보니, 그 숫자가 항상 부모님이 쓰시던 비밀번호 숫자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학자금 대출을 통해 등록금을 납부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등록금 납부 전날, 어머니의 가게 수입으로 등록금을 납부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기숙사비도 하루 전날 어머니의 수입과 금액이 똑같았습니다.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이 일어나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나를 충남대에 보내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마침내 충남대 진학을 결정하였습니다.

충남대 진학 소식을 듣게 된 포정님께서는 증산도 동아리에 들어가면 되겠다고 하시며 충남대 동아리 회장 도생님께 연락을 미리 취해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입학 전에 충남대 선배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태전에 본부가 있다 보니 좀 더 활발한 것 같아 보였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충남대에 진학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빨리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증산도에 대해 잘 모르고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엄마 혼자서 남편 없이 자식들 키우느라 힘들어 하셨는데, 증산도 신앙을 하면서 크게 좋아지시는 모습을 보았고, 또한 엄마를 믿었었기 때문에, 일단 공부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입학하고 나서 3월 6일부터 7일 수행, 그 이후에 이어서 21일 정성 수행을 이유현 도생님과 함께 하면서 봉청수도 해 보고, 도장도 가 보고, 다른 도생님들도 만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진리에 대한 확신이 점차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손님으로만 있을 수 없고, 소속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정식으로 상제님의 말씀을 같이 공부해 보고 싶어 입도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태을주로 변화된 나의 삶



몬르디 아카한(여, 37) / 원주우산도장 / 147년 음력 3월 입도

저는 태국인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돈을 벌러 한국에 와서 회사를 다니다 작업 환경도 좋지 않은 데다가 과로까지 겹쳐서 결국에는 늑막염이 걸렸습니다. 원주기독병원에 가 보았으나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의료 보험이 되지 않아서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치료를 포기하고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픈 몸으로 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회사 동료로 알고 지내던 현재의 남편 박수환 부포감님이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었습니다. 저를 집으로 데려가 매일매일 태을주를 읽어 한 달 만에 제 병을 완치시켜 주었습니다. 제가 아프고 돈이 없어 아무도 저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는데 저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며 태을주로 놀라운 체험을 시켜 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병이 다 나은 다음 우리는 결혼도 하여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 후 딸 소은이를 낳아 기르면서 집에서 매일매일 청수 모시고 태을주를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문득 조상님(할아버지와 아버지)께 제사를 모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얘기해서 태국 음식과 술을 마련하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과 통화하던 포정님이 이것을 들으시고 포정님과 손석준 포감님, 박시연 포감님을 데리고 오셔서 이왕이면 상제님과 태모님을 모시고 증산도식으로 가정 치성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증산도식 가정 치성을 하고 태국식 제사를 올렸습니다. 포정님으로부터 저의 입도를 위해 도장 성도님들이 이미 칠성경을 읽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두 살배기 어린 딸이 있으니 따스한 봄날이 오면 입도하라는 포정님과 남편의 권유를 받고 3월이 되고 날이 따스해지면서 입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도식이 끝나고 집에 와서 자는데 흰옷을 입으신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나타나셔서 무척이나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불교 문화권에서 생활한 저는 신을 모시는 것이 낯설지 않습니다. 저는 남편 승용차에도 이름을 붙여 주며 마치 사람을 대하듯이 “남쵸 고마워 고생 많이 했어”하며 가끔 막걸리를 부어 주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한국어 이해력이 부족하여 상제님 진리를 잘 모르지만 태을주 수행과 봉청수 기도를 올리며 도장 신앙 문화에 적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태국인을 상대로 태국 식재료와 생필품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7천만 태국 사람들에게 상제님 진리를 전하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천지일월 하나님과 조상선령님께 보은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은.

많은 길을 돌아와 찾은 진리



조국형(남, 60) / 수원인계도장 / 147년 음력 2월 입도

오래간만에 선후배들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등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이것이 운명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전부터 저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하여 약간의 지식이 있었던 터라 등산로에서 만난 홍보전시대에서 그것을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이 옮겨졌었고 ‘환단고기 소책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 딸은 아빠의 요청에 따라 생일 선물로 『환단고기』 원본 책자를 선물하였고, 이윽고 만사를 제쳐 놓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중간중간에 저를 인도해 준 포감님의 안내에 따라 각종 세미나에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포감님은 『이것이 개벽이다』, 『생존의 비밀』, 『춘생추살』등 생전 처음 보는 책들을 보내 주셨고, 워낙 책 읽기를 좋아하는 제 성격대로 저는 그것을 모두 읽었습니다. 책들을 읽어 나감과 동시에 뭔가 멍한 생각이 머릿속을 흔들고 있었고, 때론 밤잠을 설쳐 가면서 읽고, 생각하고, 또 읽고 하면서 ‘설마 이런 세상이...’ 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소식에 가슴까지 뛰기 시작했습니다. 더욱더 진리에 대해 알고 싶어졌고, 도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도장의 책임자인 수호사님께서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저의 멍했던 머릿속을 정립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하나가 논리적으로 꿰맞추어지기 시작했을 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평생을 살면서 ‘내가 내 자신도 못 믿는데 세상의 어느 누구를 믿겠는가’ 하는 신앙생활과는 동떨어진 철칙을 가지고 있었기에, 교육을 받는 그 당시에도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도장에서 우연히 북소리와 함께 태을주 도공 수행을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너무도 황당했지만 모든 것에 자신이 있던 나였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호사님께 ‘진리 교육’을 받고 나서 나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은 오로지 이 길이구나. 이 길을 찾는 데 너무나 많은 길을 돌아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이 끝나 갈 무렵 내가 상제님을 만나 증산도를 신앙하고 진리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너무나도 감사하여, 나를 이곳으로 인도해 주신 포감님과 나에게 진리 교육으로 충만시켜 주신 수호사님께 진심으로 무릎 꿇고 감사드리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제 입도한 지 3~4일밖에 되지 않아 지식도, 신앙의 깊이도 그 모든 것이 서툴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입도식 날 상제님 앞에서 다짐했던 ‘입도서원서’의 지침을 반드시 지킬 것이며 또한 육임의통구호대의 강력한 일꾼으로서 굳세게 전진하는 태을랑으로 태어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육임군공사의 수행을 완수하기 위하여 주변 지인들과의 만남과 진리 포교를 위해 더욱 정진하여 천하사 큰 일꾼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진리 공부와 수행에 더욱 정진할 것이며, 아울러 상제님의 진리에 의거 복록 창출 사업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로운 변화, 달라진 삶을 위하여



윤성찬(남, 30) / 안성봉산도장 / 147년 음력 2월 입도

저는 용인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0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방황을 하게 되었고 불량한 학생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오토바이 사고로 4개월 동안 혼수상태로 지냈습니다. 의사도 희망이 없다고 했고 주위에서도 모두 포기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만이 끝까지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저는 기적적으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멀쩡하던 저는 하루아침에 말이 어눌하고 몸이 부자연스러운 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고 후 용인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습니다. 삶을 포기하고 싶어서 잘못된 생각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용인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던 차에 안성에 직장을 구해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성에서 대순진리회를 만나 4개월 동안 신앙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은행 가는 길에 『생존의 비밀』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순에서도 생존의 비밀을 봤기 때문에 같은 대순 사람이 하는 줄 알고 가져왔습니다. 제가 먼저 카톡으로 인사를 건네게 되었는데 대순이 아니고 ‘증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추 포감님을 만나서 대순에 대한 진실을 듣고 그날로 도장을 방문하여 21일 정성 수행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21일 정성 수행 첫날부터 105배례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습니다.

저는 몸이 건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했습니다. 정성 수행과 더불어 진리 공부도 했는데 ‘우주1년 이야기’가 너무도 신기했습니다. 도장 천도식에 참석하여 봉사도 했습니다. 저도 꼭 조상님께 천도식을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정님께서 하루도 빠지지 말고 105배례를 하라고 하셔서 집에서도 꾸준히 했습니다.

그전에는 늘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 들었는데 105배례를 꾸준히 한 후로는 그런 기분이 사라졌습니다. 허벅지에 있던 가려운 증상도 없어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회사 사람들도 제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더욱더 변한 모습을 보여서 포교로 이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증산도를 만나 태을주 수행을 하며 많은 변화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려서 조상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몸과 마음을 완전히 회복하여 상제님 천하사의 일꾼이 될 것을 다짐합니다. 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