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길이라 생각해 온 그 가르침, 증산도 외 (정수연, 배연수, 서수진, 유승자, 유혜안)

[입도수기]

옳은 길이라 생각해 온 그 가르침, 증산도


정수연(여, 22) / 서울목동도장 / 146년 음 12월 입도

제가 증산도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윤리와 사상이라는 교과목을 공부하면서였습니다. 그때 수능 특강에서는 구한말의 민족종교들을 소개하면서 증산교를 다루었습니다. 그 책에는 해원상생, 원시반본이라는 증산교의 종지 두 가지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중 해원상생이라는 것이 유난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증산교에 대해 검색하다가 증산도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우리 학교에도 증산도 동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입학 초 친해진 기독교 동아리 사람들이 증산도를 나쁘게 말했고, 저도 다른 동아리에 흥미가 생겨 들어가게 되었기에 결국 증산도 동아리를 찾아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증산도에 대한 끌림은 계속 있어 왔습니다. 2학년이 된 후 어떤 친구가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전생과 사후세계, 세상의 이치에 관심이 있고 저랑 세상을 보는 관점이 많이 통하는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사주를 공부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사주를 봐 달라고 말했습니다. 친구의 사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후 제 사주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사주대로 안 사는 방법이 있는데 궁금하지 않냐고, 네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전생의 업보에 대해 알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해 보지 않겠느냐고. 그러면서 자기가 그 분야에 대해 깊게 공부하는 사람을 안다며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가정집 같은 곳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거기를 공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서는 척신 이야기를 하며, 정성을 들여서 척신을 풀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곳에서도 해원상생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가 증산도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조금 주저하며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럼 대순진리회인가요.”라고 말했고 그 사람들은 그렇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순진리회라는 이름에 편견을 갖지 말아 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결국 거기서 정성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두세 번 이야기를 들으면서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증산도는 어떤 곳이냐고 물었더니 거기는 종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애매한 답변만 돌아왔고, 질문을 해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오히려 선감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을 싫어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인터넷에서 대순진리회 피해 사례들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계속 증산도를 한번 찾아가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대순진리회와 연을 끊고 증산도 도장을 찾아갔습니다.

도장에서 증산도 진리에 대해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증산도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증산도는 제가 늘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과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페미니즘feminism입니다. 저는 성 평등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종교, 문화, 교육 등에서 ‘여성’ 이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받는다거나, 남성의 시각에 의해 편집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여러 페미니스트들이 누누이 말하는 ‘여자는 믿을 종교도 없다.’라는 말에 공감하며 살아왔습니다.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남방 소승 불교)에서, 여자는 해탈하지 못합니다. 덕을 쌓아서 더 높은 존재인 남자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대승 불교의 여자는 해탈할 수 있지만 남자보다 그 가능성이 적은 존재로 여겨집니다. 기독교에서는 여자를 ‘유혹자’로 묘사하며 죄의 책임을 여자에게 돌립니다. 대부분의 기성 종교에서, 그렇게 성차별을 숨 쉬듯이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증산상제님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증산도의 후천선경은 정음정양의 세상이며, 남녀 동권의 세상입니다. 상제님은 성차별에 대해 구구절절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차별은 부당한 것이며, 이로 인해 여성의 원이 천지에 쌓였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남성의 완롱거리로 취급당하는 것과, 애 낳고 가사노동을 하는 존재로 취급받던 것에 대한 문제의식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상님께 보은해야 한다는 내용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사주를 보거나, 신점을 보러 가면 그 사람들은 항상 저에게 “너는 조상 복이 많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제 삶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힘든 사건도 많았고 위험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의 흉함이 나중에 가면 거의 다 길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저 스스로 한 게 없는데도 어느 날 없던 능력이 생겨나고, 자연스럽게 노력하게 되고 좋은 결과를 얻게 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대로 제가 변화해 가는 경험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저를 도와주는 존재가 누군지 몰랐는데, 나중에 가서 그분들이 조상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꼭 보은하고 싶어졌습니다. 증산도는 조상님을 모시는 천도식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상제님께서도 “조상님을 제1의 하나님으로 모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 때문에 저는 증산도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곳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2017년 1월 1일에 입도했습니다. 입도하기까지 공부를 하는 게 힘들었고, 저 스스로도 수많은 내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갈등들이 입도를 마치고 나면 사라질 것임을 알았기에 입도할 수 있었습니다. 입도식 날,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목욕재계를 하고 밝은색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일찍 도장에 가서 도적부를 작성하고 도복을 갈아입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도를 축하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입도 치성을 올리는 중에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잡생각에 빠지려고 하면 갑자기 깨어나는 것이 여러 번 느껴졌습니다. 이전에 느끼던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문수행을 하는 것도 더 경쾌하고 좋은 느낌이었습니다. 수행이 끝난 후 청수를 마셨고 태을주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입도 소감을 말하라고 해서 “많은 사람 끌어당기는 참 도인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모두 웃었습니다.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입도는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더 많이 증산도의 진리에 대해 공부해 나갈 것이고, 증산도 동아리에 들어가 대학생 포교단 활동도 하게 될 것입니다. 수행도 일상이 될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저에게 온 이 인연들이, 제가 증산도 신도가 된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제가 증산도에 이끌려서 도장을 찾아가고 입도까지 하게 된 것이 절대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를 가르치느라 애쓰신 포정님과 포감님, 그 외 입도를 축하해 주신 도장의 모든 사람들과, 저를 가장 챙겨주신 조상신명 및 보호신명님. 제가 여러 가지 방해를 뿌리치고 증산도에 입도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수도하겠습니다. ◎

상생방송으로 대순과 증산도의 차이를 확인하다


배연수(남, 65) / 인천주안도장 / 146년 음 11월 입도

제가 태어나기 전에 위로 형이 있었는데 시두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노심초사 하시다가 자식을 얻기 위해서 용왕님께 100일 기도를 드리고 1953년 음력 2월 16일에 아버지 연세 54세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 한학을 하셨기 때문에 6세 때부터 천자문을 시작으로 명심보감, 소학, 대학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까지는 부러움 없이 자랐습니다. 그리고 중학생 때는 70세가 되신 아버지께서 농사일 하기가 벅차니 학교를 그만두고 당신의 일을 도우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면서 주경야독으로 중고등 과정을 3년 만에 검정고시로 합격하고, 검정고시 합격 다음 해에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다니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서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을 여러 군데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산업은행 본점 필경사(프린트 가리방)로 5년을 근무하다 복사기, 컴퓨터가 나오면서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 후 초창기 휴대폰 개통업무를 대행하는 사무실을 운영하였으나 가격 경쟁에 밀리고 자금력 부족으로 폐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면서 주방장에게 중화요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후 중국집을 서울 서초동으로 옮겨서 중화루 간판으로 운영하였으나, IMF 이후 급속하게 매출이 떨어지고 배달사원이 사고를 내는 등의 일로 많은 채무를 얻게 되어 그만 폐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중국집 주방장으로 20여 년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 친구의 소개로 부부가 같이 대순진리회에 10여 년 다니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내는 처음에만 같이 다녔고 저만 혼자 다녔습니다. 그간 교회를 다니며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대순을 신앙하며 조상 제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집에서 아내와 같이 제사를 다시 지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순을 신앙하다가 알게 된 것은 조상 제사의 중요성과 증산 상제님의 강세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순에 다닐수록 무언가 이상하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조금씩 갖게 되어서 대순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5년에 우연히 상생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방송을 통해 대순과 증산도의 차이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문 읽는 것이나 청수 모시는 방법, 진리 전개가 많이 다르며, 전체적으로 대순이 진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대순 신앙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습니다. 그러다 올 10월에 상생방송에 전화를 해서 책 다섯 권(이것이 개벽이다, 개벽실제상황, 춘생추살, 천지성공, 환단고기 가이드북)을 계수기와 함께 구입하여 책을 통독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올해 10월 즈음에 일을 쉬면서 아내와 속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많이 먹게 되었는데 이 여파로 살이 빠지며 몸이 많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술을 먹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고 그러던 중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나타나셨는데 아버지는 저를 몽둥이로 마구 때리셨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말리셨습니다. 많이 놀랍고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술을 끊게 되었고, 대순 신앙을 정리하고 마음을 추스려 상생방송에 연락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주안도장 홍정자 포감님이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 주셔서 인천주안도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도장 수호사님과 상담을 한 후 여러 도생님들의 성심어린 지도하에 8관법 입도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육을 통해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어 입도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찾아온 하나님이 증산 상제님임을 알게 되어 너무나 기쁘고, 신앙을 하게 된 것이 감사합니다. 앞으로 성실한 자세로 신앙을 잘 하고 싶습니다. 보은. ◎

이 진리는 놓치기 싫었습니다


서수진(남, 50) / 부산중앙도장 / 146년 음 11월 입도

저는 대학 졸업 후 부산 모 피혁공장에 취직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생기면서 단란하게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2009년 저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2009년 추석 당일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남해에 가야 했으나 이날따라 운전하기가 싫어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한쪽으로 넘어가 급히 인근 동의대 병원으로 가 진단 결과 뇌경색 판정을 받고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고모님이 중풍이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을 미리 알아 두었고 이와 관련된 보험도 넣고 있어서 치료비는 걱정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조상님이 제게 벌과 동시에 살길을 열어 주신 거라 믿습니다.

저희 집은 아버지께서 차남이라 자손이 없으신 작은 할아버지 제사를 모셨는데 제가 결혼하고 어머니께서 제 걱정에 제사를 일찍 지내시게 되었습니다. 이게 조상님의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퇴원 후 직장에 복귀했으나 경기가 안 좋다는 이유로 저는 17년간 다니던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그만둔 영업부 동생이랑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3개월 만에 접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2011년 10월 가벼운 접촉 사고가 있었는데 저는 별 상황이 아니라 생각하고 갔습니다. 그것이 뺑소니로 되어 합의금 200만 원과 벌금 500만 원을 내게 되어 그나마 있던 퇴직금도 다 날아갔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때 집사람이 제 고등학교 때 친구의 도움으로 어린이집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어린이집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석 달간 직업교육을 받았으나 나이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재취업을 못하다가 장애인 공단의 소개로 식재료를 만드는 회사에 재취업하였습니다. 그곳에 1년간 다니던 중 장기간 복용한 피부약의 스테로이드 성분 때문에 뼈가 약해진 결과 허리가 아파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2015년 설 명절 전이었습니다.

어느 날 실의에 빠져 집에 있는데 대순성주회의 여자 두 분이 저희 아파트에 포교하러 왔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지푸라기도 잡아 보자는 심정으로 따라 나갔습니다. 첫날 제사를 지내야 한다기에 돈을 내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처음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러려니 생각하고 없는 돈에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 날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교육을 받다 보니 조금 체계가 없고 교육 프로그램도 없이 하루하루 교육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교육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육 진행 중에 또 제사를 지내야 한다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또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대순성주회에서 잠시 책을 보니 종도사님이 지으신 ‘이것이 개벽이다’의 옛 책을 보고 교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에 이 책을 알아보니, 그제서야 종도사님을 알게 되었고 놀랍게도 직장 다니던 때 꼭 보고 싶었던 환단고기 역주본의 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퇴원 후 서점에서 환단고기 역주본 책을 구입하여 두 달 만에 다 읽었습니다. 이후 증산도와 상제님에 대해 알고 싶어져서 도장을 찾아본 결과 부산중앙도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때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논쟁도 많았고 또 앞의 대진성주회와 같은 곳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겨 주저주저하다가, 일단 들어나 보자 싶어 전화를 하고 중앙도장에 방문하여 상담 후 교육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교육을 받는 동안 도장에 나오는 것이 너무 편하고 좋았습니다. 집에서는 종도사님이 강의하신 환단고기 북콘서트를 다 찾아보고 도장에서 주신 책들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개벽문화강좌와 역사특강도 찾아가서 경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육이 끝날 때쯤에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너 여기 왜 오니?” “네가 찾는 답이냐?” 아니면 “심심해서, 역사공부가 재미있어서?” 이런 질문에 제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했고, 결론적으로 상제님 신앙을 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건강상으로 많이 힘들기는 하지만 이 진리는 놓치기 싫었습니다. 여러 가지 주문과 정공수행, 도공수행, 그리고 도전 말씀이 정말 와 닿았습니다. 앞으로 저에게 어떤 고난이 와도 이제는 옆에서 상제님과 조상님이 든든한 저의 후원자가 되어 주실 거라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곧 닥칠 환란의 시대에 꼭 필요한 일꾼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신앙을 하겠습니다. 보은.. ◎

갈급증을 해소시킨 상제님 진리


유승자(여, 74) / 천안구성도장 / 146년 음 12월 입도

저는 1944년 일제 시대에 천안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천안에서 살고 있는 유승자 도생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1년 후 해방이 되어 기억은 없지만 선친께서 일제 시대의 혹독한 나라 잃은 어려움과 설움, 고난을 겪다 보니 일본을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생각에서 저의 이름에 이길 승勝 자를 넣어서 지었다고 합니다. 출생신고를 할 때 일본인 호적계가 왜 이길 승 자를 넣어서 이름을 지었느냐고 추궁을 해서 일본이 전쟁(태평양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뜻이라고 둘러댔더니 일본인이 선친의 본심도 모르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선친의 염원대로 다행히 1945년에 해방이 되어 저는 일제 시대의 서러움은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남북 분단이 되고 6.25전쟁을 어린 나이에 겪게 되었으나 저를 비롯한 가족들은 별 탈 없이 모든 고난을 이겨냈고, 저도 전쟁 중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63년에 천안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생활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남편이 50세도 못 넘긴 중년의 나이에 지병으로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식 양육과 교육에 힘쓴 결과, 다행히 두 아들은 명문대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에 안착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집안이 대대로 단명하는 편이라 두 아들의 건강도 염려가 되고 혼자 살면서 느끼는 공허함과 괴로움도 견뎌내기 위해 저는 불교에 귀의하였습니다. 마음공부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두 아들의 무병장수를 축원하면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무엇이든 공부하면 어설프게 하는 성격이 아니고 적극적인 정신과 봉사하는 마음가짐이 있던 터라 불교 교리 공부를 통해 법사 자격증도 받았고 공양주 보살 생활도 하면서 여러 가지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가피加被를 받아 본 사실도 여러 번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 신앙과 공부에 심취할수록 마음 한구석에는 무언가 허전함과 부족함이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 중에 미륵부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중생구제를 위한 일을 하고 가셨다는 증산도를 접할 기회가 있어서 모악산 금산사에도 가 보고 구릿골에도 가 본 사실이 있습니다. 증산도를 지켜보니 불교나 기독교 등 기존 종단과는 달리 젊은 학생들과 청년층이 많고 신도 층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많은 것이 흥미롭고 특이하게 느껴졌습니다. 대순진리회는 살펴보니 너무 모순과 불합리한 점이 많아서 사이비라는 느낌이 강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증산도는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언젠가는 꼭 가 봐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던 차에 상생방송을 보면서 인연이 있다면 꼭 가 보고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천안에서 열린 건강세미나에 참석하여 지금의 인도자인 유혜안 포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조상이 같은 본관과 성씨이고 증산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뭔가 제게 인연이 있고 제가 갈구하던 목적을 찾을 수 있는 인연줄이 되겠다는 강한 확신이 와서 도장 방문을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도장 방문을 약속한 전날 밤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에 절의 대웅전 앞에 키도 엄청 크고 둘레도 몇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가 갑자기 빙글빙글 돌더니 쓰러져 넘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서 천상에서 이미 돌아가신 외가 가까운 친척 세 분이 가마 비슷한 탈것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다음 장면은 앉은 상태로 공중에 떠서 날아가는데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세 마리의 시커먼 개 같은 짐승이 나를 쫓아와 허리를 물어서 손으로 뿌리쳐 떨쳐 내고 잘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신기하고 기이한 꿈이라 해석이 잘 되지 않았는데 도장에 방문하여 도담을 나누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도장에서 도담과 상담을 받으면서 불교의 총 결론이 미륵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말법시대에 오신다는 것이며 그 미륵부처님이 우주의 주재자이자 통치자 하느님이신 증산상제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이 이미 146년 전에 조선 땅에 강세하시어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천지공사를 통해 말법시대에 중생구제의 프로그램을 이미 짜 놓고 가셨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21일 정성 수행을 하면서 특히 좋았던 것은 조상님을 지극히 모시고 받드는 천도식과 우리 전통 문화를 계승한 치성 지내는 모습이 너무나도 경건하고 우리 문화와 정신 양식에 합치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비록 노년의 나이이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증산도를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만 팔관법 교리 공부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입도 정성수행과 함께 해 왔습니다. 증산도 공부를 통해 불교에서 항상 2% 부족했던 목마른 진리 갈증과 공허함이 해결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늦게 들어온 만큼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을 통해 선지후각하여 깨달음을 열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도생이 되겠습니다. 보은! ◎

[인도자 수기] 증산도 진리로 부족한 2%를 채워 주었어요


유혜안(여, 57) / 천안구성도장, 교무종감

유승자 도생을 만나게 된 계기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더구나 참석하려고 생각지도 않았던 1박 2일 건강세미나에 누가 저의 등을 떠밀고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참석을 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유승자 도생과 인사를 하게 되면서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나서는 또다시 같은 방 숙소에 둘이서만 배정을 받았습니다.

유승자 도생은 학창 시절에는 교회를 다녔었고 결혼 후부터는 50여 년 동안 불교를 믿으면서 50대에는 법사 공부를 마치기도 하는 적극적인 불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부족한 불교 진리에 갈급해하면서 누가 톡하고 건드려만 주면 깨달음이 올 텐데 하는 생각을 늘 품고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제가 증산도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유승자 도생은 오랜 세월 불교에 귀의를 해서 진리를 갈구했지만 뭔가 2% 부족한 불교의 진리에 목이 마르다고 했습니다. 증산도와 증산상제님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고 또 불교의 도반들과 오래 전에 금산사에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부족한 2%를 증산도 진리를 통해서 시원하고 통쾌하게 뚫어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해 드렸더니 증산도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하는 제 모습에서 뭔가 찾을 수 있겠다는 말씀과 함께 수일 내에 도장에 방문하겠다고 흔쾌하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건강세미나 일정을 마치고 헤어져 집에 온 이튿날 유승자 도생과 수요일에 만날 것을 다짐하는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유승자 도생은 저와 통화를 한 그날 밤에 신기한 꿈을 꾸었다며 그 다음 날 아침에 격양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꿈의 의미에 대해 해몽을 해 주겠다고 하며 도장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꿈 이야기는 큰 절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아주 큰 아름드리 나무가 빙그르르 돌더니 쓰러져 넘어졌고, 돌아가신 친척 세 분께서 천상에서 가마를 타고 내려왔으며, 세 마리의 검은 짐승이 자신의 허리를 물고 놓지 않는 것을 손으로 뿌리쳐 떼어 내며 앉아서 날아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도장 포정님께서 도전을 펼쳐 불교 막장공사를 보신 상제님 성구 말씀에 대해 이야기해 주자 그제야 본인이 꿈을 꾸게 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증산도 진리가 참 진리임을 어렴풋하게 알게 되면서 동지 대천제에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입도를 하기 위한 정성공부와 팔관법 중심의 진리공부를 하게 되었고, 하루도 거르는 날 없이 21일 정성 공부를 마치는 적극성과 지극한 정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와 함께 태을주 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작고한 남편 신명이 찾아와 “잘했다.~”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는 신도 체험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비록 연세는 노년층이지만 도장 일에 적극적인 참여도 하고 도장 살림살이에도 신경을 써 주는 등 도장에 새로운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서 유승자 도생을 만나게 된 것과 도장으로 인도를 하여 입도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유승자 도생의 보호신이신 할머니께서 인도하신 것임을 태을주 수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상제님 말씀대로 삼생의 인연과 조상의 음덕이 있어야 증산도를 만날 수 있는 인연줄이 생겨나고, 그 인연줄을 따라 조상님들이 신도세계에서 자손들을 살 길로 인도해 준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천지일월 사체 하느님과 조상님께서 유승자 도생을 받아 주심에 감사드리며, 유승자 도생이 가을 개벽기에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일꾼이 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거듭 노력하겠습니다. 천지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