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성도 | 복록소 도수의 주인공 신경원辛京元

[이달의 성구]

●본관: 영월寧越
●출생: 1863년 2월 14일(음)
●순도: 1947년 12월 16일(음)
●입도: 관운장 삼각수의 징표를 보고 45세에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다. 상제님께서 태인에 오시면 항상 물심양면으로 수종을 들었다.(도전 3:295:1 측주)

관운장에게 세계 대전쟁의 천명을 내리심


4월에 신원일을 데리고 태인 관왕묘 제원(關王廟 祭員) 신경원(辛京元)의 집에 머무르실 때 하루는 원일, 경원과 함께 관왕묘에 가시어 관운장(關雲長)에게 천명을 내리시며 공사를 행하시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동양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약소국을 건지려면 서양 열강 사이에 싸움을 일으켜야 하리라.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극진한 공대를 받았으니 그 보답으로 당연히 공사에 진력 협조함이 옳으리라.” 하시고 양지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며 관운장을 초혼하시니 경원은 처음 보는 일이므로 이상히 생각하니라.

이 때 자못 엄숙한 가운데 상제님께서 세계대세의 위급함을 설하시고 서양에 가서 대전쟁을 일으키라는 천명을 내리시거늘 관운장이 감히 거역할 수는 없으나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는지라 상제님께서 노기를 띠시며 “때가 때이니만큼 네가 나서야 하나니 속히 나의 명을 받들라. 네가 언제까지 옥경삼문(玉京三門)의 수문장 노릇이나 하려느냐!” 하고 엄중히 꾸짖으시니라. 관운장이 그래도 대답을 아니하매 상제님께서 관운장의 수염을 휙 잡아당기시고 옷을 찢어 버리시니 이 때 조상(彫像)에서 삼각수(三角鬚) 한 갈래가 바닥에 떨어지니라. 이렇게 하룻밤을 지새시며 ‘이놈, 저놈’ 하고 불호령을 내리시거늘 관운장이 마침내 굴복하고 상제님의 명을 받들어 서양으로 가니라.

이후에 김경학(金京學), 최창조(崔昌祚), 최내경(崔乃敬), 최덕겸(崔德兼) 등 태인 사람들이 상제님의 면모를 숭배하여 상제님을 따르니라. (5:166:1~12)

행군하는 북 도수


이어서 응종의 집에 가시어 응종으로 하여금 태인 신경원(辛京元)의 집에서 새 수저 한 개를 가져오게 하시고 일전에 빚으라 하신 식혜 아홉 사발을 가져오라 하시어 단지 한 개에 쏟아 부으니 단지에 꼭 차더라.

이에 양지와 백지와 장지(壯紙)를 각각 여러 권씩 준비하여 놓고 말씀하시기를 “비인(庇仁) 복종(覆鍾)이 크다 하므로 이에 행군하는 북 도수를 보노라. 북은 채가 있어야 하나니 이 수저가 북채가 되리라. 행군할 때에 이 수저로 북채를 하여야 녹(祿)이 진진(津津)하여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양지와 백지와 장지를 모두 조각조각 떼어 그 조각마다 글을 써서 수저로 단지에 말아 넣으시니 종이가 단지에 가득 찼으나 식혜는 넘치지 않더라. (5:203:1~8)

후천 선경 낙원의 복록소·수명소·대학교 공사


또 형렬에게 물으시기를 “법이 시골에서 만들어져 서울로 가느냐, 서울에서 만들어져 시골로 가느냐?” 하시니 형렬이 “법이야 서울에서 만들어져 시골로 내려오지요.” 하고 대답하거늘 “그러면 그렇지. 무릇 법이란 서울로부터 내려와 만방에 펴내리는 것이니 서울 경(京) 자 이름 가진 사람의 기운을 뽑아 써야 할지라. 그러므로 경수(京守)의 집에 수명소(壽命所)를 정하노라.” 하시니라. 또 경학(京學)의 집에 대학교(大學校)를 정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경학의 학(學) 자가 배울 학 자이니 대학교를 정하노라.” 하시고 경원(京元)의 집에 복록소(福祿所)를 정하시니라. (5:274:7~12)

두문동 성수 공사


태인 신경원의 집에 머무르실 때 천지대신문을 열고 벽 위에 두문동(杜門洞) 성수도(星數圖)를 써 붙이시니라. 그 글을 쓰실 때 옆에서 지켜보던 경원이 상제님께 여쭈기를 “신농패(神農牌)가 무엇입니까?” 하니 “귀신이 차는 것이다.” 하시고 경원이 다시 “그러면 유사표(有司標)는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니 “너희들이 찬다.”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일후에 누가 찾으러 올 사람이 있으리니 이것을 뜯어 주어라. 혹 먼저 떼는 자가 있으면 멸문지화를 당하리라.” 하시매 경원이 그 옆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더니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에 김경학이 찾아와 떼어가니라. (5:329)

정괴산에게 주신 복솥


하루는 상제님께서 그 집에 가시니 괴산이 상제님께 대접하려고 질솥에 개장국을 끓이다가 갑자기 질솥이 깨어지매 괴산의 아내가 낙담하여 울고 서 있거늘 상제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신경원(辛京元)에게 명하시어 그가 경영하는 솥점에서 철솥 한 개를 가져다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솥을 잘 간수하라. 그러면 집안 살림이 일어나리라.” 하시더니 이로부터 그 부부가 돈을 많이 벌어 가세가 점점 넉넉하여지니라. 그 뒤에 괴산이 태인 방아다리(芳橋)로 이사할 때에 그 철솥을 환평에 사는 정동조(鄭東朝)에게 팔았더니 괴산은 도로 가난하여지고, 동조는 넉넉하게 되거늘 사람들이 그 철솥을 복솥이라 일컬으니라. (9:108:2~7)

성도들을 소집하심


마침 신경원(辛京元)이 오거늘 말씀하시기를 “네가 올 줄 알았노라.” 하시고 양지 한 장을 주어 ‘유(儒) 불(佛) 선(仙)’ 석 자를 쓰게 하신 뒤에 상제님께서
‘유(儒)’ 자 옆에 ‘니구(尼丘)’라 쓰시고
‘선(仙)’ 자 옆에 ‘고현(苦縣)’이라 쓰시고
‘불(佛)’ 자 옆에 ‘서역(西域)’이라 쓰시어 불사르시고 그 길로 약방에 돌아오시어 각처 성도들에게 “유월 스무날 구릿골 약방으로 모이라.”는 통지를 띄우시니라. (10:21:7~10)

천하를 통일하는 도(道)


태모님께서 신경원(辛京元)과 김병욱(金秉旭)으로 하여금 태인 장에서 흑우(黑牛) 한 마리를 사 오게 하시어 그 소를 기르시며 도정(道政)을 집행하시고 백남신(白南信)에게 이르시기를 “상제님께서 맡겨 두신 돈 10만 냥을 들여와서 도장 운영비로 쓰게 하라.” 하시되 남신이 듣지 않으니라. (11:29:3~4)

비인복종혈庇仁覆鍾穴
庇(덮을: 비) 仁(어질: 인) 覆(뒤집을: 복) 鍾(쇠북: 종)
종을 엎어 놓은 형국으로 예로부터 유명한 혈이다. 도선국사의 결訣에 “우리나라의 제일갑지第一甲地는 금강산 천황봉天皇峰의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이요, 둘째는 서천 문수산하紋秀山下 복종이라” 하였다. (도전 5:203:4 측주)


비인이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 15년에 ‘비인현’이라는 이름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조선 세종대왕 시절, 왜구들이 들끓어 골치를 앓던 곳이다. 조선 고종 32년에는 ‘비인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에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이 서천군으로 합쳐졌다. 현재는 충남 서천군의 서해 바다 가까운 곳에 ‘비인면’이란 이름으로 그 흔적이 있다.

비인복종혈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서천 군지』에 남아 있다.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 선생이 이곳 비인에 와서 100일 동안 기도를 올려 꿈속에서 산신령을 만났다. “그대의 정성에 뜻이 있는 것 같아 내가 복종의 명당 터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는 구경만 하여 봐라.” 토정 선생은 산신령이 알려준 곳으로 가서 땅을 파 보았다. 깊게 파지 않았는데도 금싸라기가 손에 잡혔다. 그는 기뻐하며 장소를 알아 두기 위해 지장 풀을 묶어 표시를 했다.

그날 밤 꿈에 그 산신령이 나타났다. “누가 명당을 구경하라고 했지 그 장소에다 표를 해 놓으라고 했느냐.” 산신령은 매우 노하였다. 토정 선생은 묶어 둔 표시를 찾으려 했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산신령이 나타나 “그대가 지세를 아는 것 같아 명당자리를 가르쳐 준 것이지, 그대가 쓸 명당은 아니야~.”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가 죽을 때 천하의 명당은 종천鍾川에 있다 하고 죽었는데, 그 명당이 바로 비인복종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