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후예 이탈리아

[세계지역문화탐방]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제국의 적통국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18세기까지 서양문명의 주류를 형성했고 오늘날에도 문화 예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5세기부터 게르만, 롬바르디아, 프랑크, 사라센 등의 지배를 겪은 이탈리아는 교황국가와 도시국가로 정치적 분열의 길을 걸었다가 19세기 후반에 비로소 통일 왕국을 이룬 후, 파시스트 정권 시기를 거쳐 1946년 공화국으로 새롭게 출범하였으며 좌파와 우파가 각기 연정체제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해 오고 있다. 보수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표현 방식의 문화 역량을 바탕으로 예술의 본고장, 세계문화의 수도로 불리고 있는 이탈리아의 유수한 역사와 문화 정신을 찾아가 본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이탈리아공화국(Repubblica Italiana, Italian Republic)은 지리적으로 보아 한반도와 몇 가지 점에서 비슷하다. 대륙에서 남쪽 바다를 향해 쭉 뻗어 나온 반도라는 점에서 그렇고 위도도 북위 35~47도로 비슷하다. (한반도는 33~43도) 면적은 한반도의 1.5배 정도에 해당하는 301,340㎢이며 남쪽에 큰 섬이 있는 것도 비슷하다. 시칠리아Sicilia 섬인데 우리나라의 제주도보다는 훨씬 크다. 면적이 열 배 이상 되는 넓은 시칠리아는 지금도 간혹 화산분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에트나 화산으로도 유명하지만 고대로부터 식량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두 번째 큰 섬인 사르데냐Sardegna도 시칠리아와 크기가 비슷하다.(24,000㎢)

이탈리아가 한반도와 비슷한 또 하나의 지형적 특성은 북쪽에 높은 알프스Alps 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아펜니노Appennino 산맥이 알프스로부터 남쪽으로 등줄기처럼 뻗어 있다는 점이다. 높이로 봐서는 알프스 산맥에 4,000m급 봉우리들이 있기 때문에 알프스 산맥이 유럽과 교통을 크게 저해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스위스 등으로 넘어가는 편한 고갯길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브렌너 고개이다. 1,300m 정도의 높이인데 실제로 넘어보면 험준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동서를 가로막고 있는 아펜니노 산맥이 넘기가 더 힘들었다고 한다. 동쪽의 아드리아 해안에서 로마로 넘어가는 고속도로를 가다보면 우리나라 백두산보다 더 높은 코르노그란데Corno Grande 산(2,912m)이 하늘로 치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높은 산들이 즐비한 아펜니노 산맥이 우리나라 백두대간처럼 북쪽에서 이탈리아 반도의 끄트머리까지 뻗어 있는 것이다. 근대 이탈리아가 정치적으로나 언어상으로 통일하기 어려웠던 것은 동서간의 교통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펜니노 산맥이 반드시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산맥에서 흘러나온 구릉지대는 포도나 올리브를 재배하기에는 오히려 적합하다. 구릉지대로 인해 다양한 고도와 토양이 존재하기 때문에 와인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현재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더불어 세계 2대 포도주 생산국으로 많은 양의 포도주를 생산할 뿐 아니라 그 품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地中海(Mediterranean Sea) 국가이다. 대서양과 태평양이 근대에 들어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이전 고대 서양에서는 바다는 곧 지중해였다. 페니키아문명과 그리스-로마 문명은 지중해를 배경으로 발전한 문명이었다. 이 바다를 통해 물자가 교역되고 사람들이 왕래하였으며 사상이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지중해로부터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듯이 기후 역시 지중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여름에는 건조하고 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반면 겨울은 비교적 온난하고 습윤하다.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와 해안지대는 이러한 지중해성 기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물론 알프스 산록을 비롯한 북부 산악지역에서는 겨울이 혹독하게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역사


초기 왕국 및 로마 제국 시대
이탈리아는 기원전 1,000년경 켈트Celt족, 에트루리아Etruria족, 그리스Greece족 등 다양한 인도 유럽족이 이동해 정착한 곳으로 유럽에서는 축복받은 땅, 아름다운 나라로 지칭되는 나라이다. 이탈리아의 역사를 언급하는 데에 있어 바로 연상되는 단어가 ‘로마Rome’일 만큼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적통국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로마제국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되어 전 지중해 세계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 섬을 포함한 서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중동 일대까지도 그 지배하에 두었다.

이탈리아에는 BCE(기원전) 753년 라틴족의 일원인 로물루스Romulus에 의해 로마가 창건되었다는 건국신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BCE 8세기경부터 라틴Latin과 사비나Savina 도시국가(city-state)를 병합하여 에투르스키Etruschi 왕조를 포함한 7왕국 시대가 형성되었다. 이어진 로마 공화정 시대(BCE 509년 ~ BCE 27년) 이탈리아는 귀족을 중심으로 원로원을 구성하였으며 원로원이 매년 선출하는 2명의 집정관(consul)이 통치하였다. BCE 3세기경에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되었으며, BCE 146년까지의 카르타고Carthago, 마케도니아Macedonia 병합 과정에서 집정관의 장기 독재화 현상이 대두하였다. 카이사르Caesar, 폼페이우스Pompeius, 크라수스Crassus가 집권하던 제1차 삼두 정치를 계기로 공화정이 퇴조하였다.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안토니우스Antonius, 레피두스Lepidus가 통치하던 제2차 삼두 정치의 권력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자는 옥타비아누스였다. 그는 BCE 27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란 칭호를 받고 황제로 추대되면서 제정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네르바Nerva, 트라야누스Trajanus,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등 5현제(Five Good Emperors)가 집권하던 BCE 27년 ~ CE 180년의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은 최고의 번영과 평화를 유지하며 팍스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평화)를 구가하였다.

하지만 CE 180년 이후 사회 기강의 이완과 변방 속령의 반란, 특히 게르만 등 국경 너머 만족蠻族들의 준동으로 인해 로마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로마 제국의 국경은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이었는데 그 너머에는 다양한 게르만계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게르만German족들의 혼란스런 이동은 37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방아쇠를 당긴 것이 아시아에서 온 훈Hun족 유목민이었다. 훈족의 공격으로 살던 곳에서 밀려난 고트족, 반달족, 수에비족, 알란족 등의 여러 만족들이 로마 국경을 넘어 쇄도하였던 것인데 이는 오늘날 시리아 난민들이 안전을 찾아 유럽으로 몰려드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대규모 난민이 발생한 것인데 문제는 로마 제국이 이 난민들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해 제국이 정치적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난민들의 무리는 자신들의 우두머리 하에 하나의 군사집단으로 조직되어 로마를 위협하였다. 당시 로마는 이들을 군사적으로 제어하기에는 군사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온 훈족에 크게 의존하였다. 기마민족인 훈족의 전투력이 게르만족보다는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훈족은 로마 제국의 동맹국으로 행세하며 로마제국으로부터 많은 공납을 받아내었다. 5세기 전반 훈족은 로마 국경 너머 지역 즉 라인 강으로부터 다뉴브 강 북부 그리고 흑해 북안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렇게 막강한 훈 제국은 453년 아틸라Atilla 왕이 사고로 죽은 후 금방 붕괴해 버렸다. 훈 제국의 제도적 기반이 미약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되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로마 제국도 그로부터 한 20년 뒤에 망했다는 것이다. 게르만족을 통제할 수 있는 유력한 세력이 사라지자 로마 제국은 그 게르만족의 공세로 망해버린 것이다. 위기에 빠진 제국의 쇠퇴를 막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대제(재위 284년~305년)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재위 306년~337년) 등이 로마의 부흥을 기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너무 커져버린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분할 통치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그러다가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가 다스리던 395년 제국의 영토는 결국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완전히 분열되었다.

만족의 지배 시대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게르만 출신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고, 뒤이어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릭Theodoricus이 들어와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아드리아 연안에 위치한 라벤나에 있었는데 라벤나는 동고트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서로마 말기의 교회와 영묘 외에도 테오도릭 왕의 궁정이 있다. 동고트 왕국은 60년을 넘기지 못하고 비잔틴 제국Byzantium Empire(동로마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게르만족들의 수중으로 들어간 서로마 제국 영토의 탈환 작전을 펼쳤는데 이탈리아도 당연히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새로운 만족들이 밀려들었다. 롬바르디아Lombardia족(랑고바르드longobardo족이라고도 한다)이 569년 이탈리아를 침공, 정복한 것이다. 그로부터 200여 년 후인 774년 롬바르디아족의 이탈리아 왕국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Charlemagne(영어식으로는 찰스대제Charles the Great)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샤를마뉴는 당시 롬바르디아족으로부터 위협을 받던 로마 교황의 원조 요청을 구실로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이탈리아를 자신의 프랑크 왕국에 통합시켜 버렸다. 그러나 롬바르디아 귀족들은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베네벤토 공작령은 그러한 롬바르디아 귀족들의 영토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프랑크 왕국이 북부를 장악한 후 시칠리아 섬을 비롯한 이탈리아의 남부 지역은 또 사라센Saracen(무슬림 또는 이슬람의 범칭)의 침입을 받았다. 북아프리카의 사라센 해적들의 약탈행각은 지중해 전역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북아프리카와 가까운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남부는 특히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지금도 이탈리아 해안 곳곳에는 사라센 해적의 습격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가 많이 남아 있다. 이탈리아 남부 지역의 사라센 지배는 노르만 기사들에 의해 끝이 났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11세기 후반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망디 지방의 기사들이 이교도들에 대한 기독교 땅 탈환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칠리아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물론 이탈리아에는 아직도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영토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곳이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는 훈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452년 아퀼레이아 등에서 피난한 사람들이 와서 세운 도시로 백 여개의 섬을 다리와 운하로 연결하여 만들었다. 베네치아는 비잔틴 황제가 파견한 총독이 지배하는 형식을 띠었지만 실제로 베네치아는 독립적인 국가로 행세하였다.

정치적 분열 시대- 교황국가와 도시국가
로마 제국의 멸망과 만족의 지배를 거치면서 이탈리아는 정치적인 분열의 길로 들어섰다.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같은 나라들이 하나의 왕권 하에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 나갔던 반면 이탈리아는 독일과 더불어 정치적 분열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탈리아를 정치적으로 파편화시키는데 일조한 것이 교황국가였다. 주지하다시피 기독교권의 여러 주교 가운데 하나였던 로마주교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 시에 대한 행정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함으로써 세속군주권을 쌓아가 결국은 바티칸 교황국가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바티칸은 로마시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중세 초기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후원으로 반도의 동해에 해당하는 아드리아 연안 지역까지 뻗어 있는 상당히 큰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 하나 이탈리아의 정치적 파편화의 결정적 요인은 이탈리아의 도시가 중세 시대에 극히 번성했다는 점이다. 10세기 말부터 아말피Amalfi와 바리Bari, 피사Pisa, 피렌체Firenze, 파비아Pavia, 밀라노Milano, 제노아Genova(Genoa), 베네치아Venezia(Venice) 등의 도시들이 상업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확장하며 독립된 도시국가(city-state)로 발전하였다. 초기 상업자본주의의 첨병이었던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독립과 자유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자신들끼리 동맹을 체결하여 중앙집권적 군주권력에 대항하였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그러한 중앙집권적 권력은 바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다. 962년 오토 1세Otto I에 의해 성립된 신성로마제국은 동프랑크 왕국 즉 독일의 대제후들이 모여서 자신들 가운데 한 사람을 ‘로마인들의 왕’으로 선출하고 그를 교황이 대관戴冠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는 세습제가 아니라 선출제였기 때문에 독일 내에서는 그 권력이 강해질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들은 이탈리아를 황제 권력의 강화를 위한 기반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부유한 도시들이 많아 이탈리아는 더욱 더 매력적인 존재였다. 이탈리아 도시들에 황제권이 강력한 위협으로 등장한 것은 호엔슈타우펜 왕조Hohenstaufen Dynasty(독일의 슈바벤 출신)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Ⅱ 때였다. 프리드리히는 부친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Sicilia 왕국까지 차지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의 모친 콘스탄차가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녀였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왕국은 앞에서 말한 노르망디 기사들이 세운 왕국으로 본토의 남쪽까지 차지할 정도로 영토가 확대되어 있었다. 매우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종교적인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을 근대적인 국가로 개혁하였다. 그는 이 시칠리아 왕국을 기반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교황과 손을 잡고 황제에 저항하여 그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이렇게 이탈리아의 통일이 멀어지자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로 뒤덮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물질문명의 발달, 지리상의 발견 등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활발한 학문, 예술 활동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탈리아는 피렌체의 메디치가와 로마 교황청 등의 후원으로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Buonarroti Michelangelo,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등의 예술가를 배출하였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터키가 지중해로 진출하고, 유럽에서 프랑스, 스페인, 영국, 오스트리아 등 절대군주제 하의 강력한 신흥 왕정국가들이 등장함에 따라 이러한 도시국가들은 정치적으로 점차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갔다. 16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이들 신흥 국가들이 많은 도시국가들을 지배함으로써 이탈리아는 신흥 열강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의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프랑스 세 나라가 이탈리아 여러 곳의 영토를 지배하게 되면서 이탈리아는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국가 통일 시대
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자유, 평등 사상이 이탈리아에 전파됨에 따라 이탈리아인들은 점차 민족의식과 통일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이탈리아어로 통일운동을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활을 의미하며 외세의 지배하에 억눌려 온 이탈리아를 소생시킨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리소르지멘토 운동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유럽 재편을 논의한 1815년 비엔나Vienna 국제회의 이후 본격화된다. 비엔나 회의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반혁명세력들은 프랑스혁명기에 쫓겨났던 유럽의 여러 권력자들을 권좌에 복귀시켰는데 이탈리아에서도 이러한 비엔나 회의의 결과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 급진파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인들은 1820년대 결사 조직(Massoneria), 카르보나리당(Carboneria) 등의 비밀조직 활동을 해오다가 1831년 제노아 출신의 법률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가 결성한 이탈리아청년당(Giovine Italia)을 중심으로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국가 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치니는 이탈리아를 넘어 전유럽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는 큰 이상을 제시하며 혁명운동과 민중봉기를 획책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망명과 감옥생활을 전전하였다.

봉건체제와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혁명들이 휘몰아친 1848년 이후에는 사보이 왕가가 이탈리아 북서부에 세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Regno di Sardegna-Piemonte이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해 나갔다. 이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국왕과 카밀로 벤소 콘테 디 카보우르Camillo Benso Conte di Cavour 재상은 프랑스와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지역을 통일하였다.

한편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장군이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추진되었다. 당시 베네치아, 밀라노 등의 이탈리아 북부 지역들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가리발디는 의용군을 조직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는 당시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손을 잡았는데 이탈리아의 통일을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세력은 사보이 왕가가 지배하는 피에몬테 왕국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1860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Sicilia에서 일어난 봉기를 기화로 하여 시칠리아-나폴리 왕국을 타도하고 로마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는 정복할 수 없었다. 프랑스가 교황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가리발디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빅토르 에마누엘(이탈리아어로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과 회견하고 자신이 정복한 남부 이탈리아 지역을 모두 국왕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와 아직 오스트리아 영토로 남아 있던 북부 베네치아 등 몇 곳을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이 1861년 사보이 왕가의 지배하에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이탈리아왕국Regno d'Italia이 탄생하였다. 이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로부터 1866년에 베네치아를 양도받고, 1870년에는 이탈리아군이 프랑스가 철수한 교황령과 그 수도인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전 이탈리아 영토의 통일이 완수되었다. 통일 이탈리아왕국은 다당제를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적 입헌왕정체제였으며, 이듬해인 1871년에 로마는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파시스트 정권 시기(1924~1944)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전승국이 되었으나, 전후 경제 침체와 정치 불안이 심화되면서 1923년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가 이끄는 파시스트fascist 정권이 대두하며 일당독재 국가가 되었다. 파시스트 당은 대내적으로는 경제근대화의 추진, 전통적인 가치의 보존 및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를 내세우고 대외적으로는 나치 독일과 손을 잡고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전에 장악하고 있던 소말리아에서의 영토 분쟁을 구실로 이탈리아는 1936년 에디오피아를 침공해 점령하였다. 1937년 독일, 일본과 방공협정Anti-Comintern Pact을 체결한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이 눈부신 군사적 성공을 거두게 되자 독일과 추축동맹Axis Alliance을 맺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 진출했던 이탈리아군이 연합군에 패퇴하고, 1943년에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무솔리니는 권좌에서 쫓겨나고 말았고 점령했던 동아프리카 영토도 모두 상실하였으며 아드리아 해 북안의 이스트리아 지방도 유고슬라비아로 넘어갔다. 그 후 이탈리아에는 1943년 7월에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 임시정권이 발족하여 1944년 2월까지 지속되었다. 무솔리니는 독일의 지원으로 북부에서 명목상의 정권을 유지하였지만 연합군의 이탈리아 공략이 절정에 달한 1944년에 항독 게릴라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파시스트 세력도 완전히 붕괴되었다.

2차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 6월, 이탈리아는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왕정의 유지 여부를 묻는 역사적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폐지하고 이탈리아공화국Repubblica Italiana을 출범시켰다. 왕정 폐지가 결정되자 당시 국왕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로 망명하였고, 새로운 정부는 사보이 왕가의 모든 남자들이 이탈리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탈리아는 1948년 1월 1일을 기해 공화국 헌법이 정식으로 공포되었고, 새 헌법에 따라 엔리코 데 니콜라Enrico De Nicola가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기민당 주도 연립정부 시기 (1948-1994)
새로 공포된 이탈리아공화국 헌법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공산당의 집권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정국은 제1당인 보수 기독교민주당(DC)이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중소정당들이 난립하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결국 기민당이 연정을 구성하면서 40여 년간 집권을 이어가게 되었다. 정당이 난립한 데에는 기민당 내 파벌간 알력 등도 작용하여 1996년 5월까지 55회의 내각 변동이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 평균 집권기간은 10개월이었다. 정계 구도는 제1당인 기민당이 제3당인 이탈리아사회당(PSI) 및 기타 중소 정당과 제휴하여 연립여당을 구성하고, 이탈리아 공산당(PCI)이 제2당으로서 야당세력을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공산당은 1991년 2월에 좌파민주당(PDS)으로 개명하였다.

기민당 정권은 직업공무원 제도를 확립하여 정부의 대내외 정책은 안정적인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민당 장기집권 체제는 정경유착(부정부패)의 구조화 현상을 초래하였으며,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이 국영기업 및 공공기업을 통하여 정치자금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부작용을 개선하기 위한 일환으로 1993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종전 100% 비례대표제를 수정하여 총의석의 75%를 소선구제로 선출하는 내용으로 선거제도가 개정되었다.

정계 재편 이후 (1994~2013)
1994년 3월 새 선거제도에 의해 실시된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Berlusconi의 전진이탈리아당 등 우파연합이 중도우파 성향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 구 공산당 등의 좌파연합을 누르고 집권하였으나, 우파연립정권의 구태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에 따라 1996년 실시된 총선에서는 프로디Prodi 총리가 이끄는 전후 최초의 좌파연립내각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프로디 정부는 재건 공산당의 연정 지지 철회로 집권이 중단되었고, 베를루스코니의 2기(2001년 6월)와 3기(2005년 4월) 중도우파 연립정부가 이어졌지만 경제침체, 이라크 파병 등의 영향으로 재집권에는 실패하였다.

경기 부진 속에서 2006년 집권한 중도좌파연합의 프로디Prodi의 2기 신정부는 ‘유럽중심주의 대외정책’ 및 ‘이라크 철군’ 등을 추진하고, 재정적자 감축, 시장자유화 정책 강화, 경제회복 등의 성과를 달성하였지만 2008년초 중도좌파연합의 결속력 약화로 집권을 마감하였다. 이어 치러진 2008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4기 우파 연립정부는 집권 초기 안정적 다수 의석을 바탕으로 높은 지지도를 유지하였으나, 세계금융위기에 따른 마이너스 성장 및 긴축재정예산 편성 등 비인기 정책 실시로 인해 사회 각계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거기에 총리 개인의 사생활 문제와 민·형사상 소추 문제로 여론까지 악화되어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2011년 11월 사임하였다.

이에 나폴리타노Napolitano 대통령은 저명 경제학자이자 EU 집행위원을 두 차례 역임한 마리오 몬티Mario Monti에게 총리직을 제안했고, 몬티는 2011년 11월 정치인을 배제한 채 기술관료 및 전문가로 구성된 과도내각을 출범시키고 국내적으로 재정건전화를 위한 각종 개혁조치를 추진하였으며 대외적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신인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베를루스코니의 자유국민당이 2012년 12월 몬티정부의 경제 부진과 좌파의 영향력 확대를 이유로 지지를 철회하자 몬티 총리는 사임 의사를 표명하였다.

최근의 이탈리아 정세
2013년 2월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 주도의 중도좌파연합이 하원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여 승리했으나, 상원에서는 315석 중 123석 확보에 그쳐 이탈리아 총선 사상 최초로 상원 과반수 확보 정당이 없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민주당은 연정 구성을 모색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정국은 60여 일간 혼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4월에 민주당의 엔리코 레타Enrico Letta 부총재가 신임 총리로 지명되면서 중도좌파에서 중도파, 중도우파까지 아우르는 대연정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오성운동을 제외한 주요 정당이 대거 참여하였다. 또한 80대의 고령인 나폴리타노Napolitano가 여야 정치 지도자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6차 투표까지 간 끝에 2013년 4월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의 재선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한편 30대의 피렌체 시장 마테오 렌치Matteo Renzi는 2013년 12월 민주당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2014년 2월 민주당 간부회의에서 이탈리아의 근본적 개혁을 위한 신정부 구성을 요청하여 당내 승인을 거쳐 레타 총리를 하야시키고 총선 없이 새 총리로 취임하였다. 이탈리아 헌정사상 최연소(39세) 총리인 렌치의 신정부는 중도좌파 성격을 띄고 있으며, 총 16명의 장관 중 8명이 여성장관으로 이탈리아 역사상 여성장관 비율이 가장 높고, 각료 중 30대 비중이 3분의 1을 상회하는 분포를 보였다. 렌치 총리는 경제위기로 생활고를 겪은 시민 및 산업계를 지원하는 즉각적인 경제조치와 함께, 양원제 폐지, 세제개혁, 공공부문 개혁 등 이탈리아의 근본 구조에 대한 개혁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하였고, 현재 동 개혁을 추진 중에 있다.

2014년 5월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 결과 렌치 총리의 민주당이 예상 외의 선전으로 승리(41%)함으로써 총선 없이 출범한 렌치 정부의 집권 기반이 강화되었으며, 2015년 1월에 나폴리타노Napolitano 대통령(89세)이 고령을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헌법재판관 출신의 중도좌파 성향인 세르지오 마타렐라Sergio Mattarella가 2015년 2월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정치 및 행정


정치현황
이탈리아는 민주공화제 국가로서 대통령이 국가원수이며, 정부 형태는 총리가 이끄는 내각책임제로 운영되고 있다. 입법부인 의회는 상하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주요 정당으로는 우파 계열인 자유민중당PDL(Popolo della Libertà), 전진이탈리아당FI(Forza Italia), 국민연합당AN(Alleanza Nazionale), 북부리그당LN(Lega Nord) 등과 좌파 계열인 좌파민주당DS(Democratici di Sinistra), 이탈리아 가치당IDV(Italia dei Valori), 중도연합당UDC(Unione di Centro) 등이 있다. 이탈리아의 독립기념일은 1946년 6월 2일로 공화국이 선포된 날이다.

대통령
이탈리아의 대통령은 국가 원수이며 국민적 통일의 상징이 된다. 임기는 7년이며 재선이 가능한데,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50세 이상의 국민 중 선출한다. 대통령의 주요 권한으로는 입법사항에 관련되는 정부발의 법안의 의회상정 인가권, 법률 공포권, 공포 대상 법률의 의회에 대한 재심의 요청권, 법률의 효력을 갖는 긴급 총리령(Decree Law) 발포권, 일반 국민투표 소집권, 의회 해산권, 상원 종신의원 5인 지명권 등이 있고, 행정사항에 관련되는 총리 및 각료 임명권, 외교사절단 접수 및 파견권, 조약 비준권, 국군통수권, 전쟁선포권, 영전수여권 등과 사법사항에 관련되는 사면권, 헌법재판소 판사의 3분의 1 임명권 등이 있다. 한편 이탈리아 대통령의 역할 중 가장 두드러진 역할은 의회와 정부간의 ‘조정자’ 역할 수행에 있으며, 전형적인 내각제 국가의 대통령보다는 더 많은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입법부
입법부인 의회는 양원제로 운영된다. 하원은 총 630명으로 구성되며 비례대표제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이다. 선거권은 18세 이상이면 주어지며, 피선거권은 25세 이상이면 주어진다. 상원은 315명의 선출직과 7명의 종신의원까지 총 322명이며, 이 중 315명은 주 단위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현재 종신상원의원은 7명(전직 대통령, 국가유공자로서 대통령 임명자)이다. 이탈리아 상원의 임기는 5년이며, 선거권은 25세 이상에게 주어지며 피선거권은 40세 이상에게 주어진다. 이탈리아 의회는 상원과 하원의 권한이 동일하며 독자적으로 결정권을 행사한다. 상원은 민선의원 외에 대통령이 임명한 의원을 포함해서 구성하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는 모두 민선의원으로 구성된 하원이 훨씬 더 중요성을 띤다. 대통령 탄핵의 경우 양원 합동회의가 활용되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의회의 주요 권한으로는 입법권, 정부예산 심의 및 승인권, 정부 감독권(정부 신임 및 불신임권, 대정부 질의권), 대통령 선출권 등이 있다. 의회의 회기는 상원과 하원이 동시에 소집하는데, 별도의 회기를 정하지 않고 연중 상시 운영하고 있다. 매년 2월과 10월에 소집되는 정기의회와 별도로 임시의회가 있으며, 의장이나 대통령 또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 소집할 수 있다. 의회의 입법에 있어 법안 발의권자는 행정부, 상원의원, 하원의원, 유권자(5만 명 이상 서명) 등이다.

행정부
이탈리아는 과반수 확보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전형적인 연정체제를 유지하는 국가이다. 따라서 내각은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연합 소속 정당들 간의 타협과 합의에 따라 구성되며, 내각수반인 총리가 정부정책의 총체적 노선을 결정하고 조정한다. 내각은 총리 1명, 각료(장관) 16명으로 구성되며, 헌법기관은 아니지만 부총리를 둘 수 있다. 그리고 총리를 비롯한 모든 장관들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선거에서 승리한 #다수당 내 최대 계파의 지도자가 총리로 선출#되는 것이 상례이다. 2016년 5월 현재 이탈리아 총리는 민주당 출신의 마테오 렌치Matteo Renzi가 맡고 있다.

이탈리아의 헌법에 의하면 총리는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정부 정책의 총체적 노선을 결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며, 장관들의 권한과 책임을 조정하여 정무와 행정이 일관된 통일성을 유지하도록 지도하는 행정수반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헌법 규정과 상대적으로 강한 대통령의 권한에 따라 이탈리아 총리는 영국이나 독일의 총리보다는 권한이 약한 것이 사실이다.

이탈리아는 총리와 내각 외에 기타 주요 정부기관으로 경제문제와 사회문제에 관한 정부 자문기관인 국가경제노동자문위원회(The National Council of Economy and Labour)가 있고, 법과 행정간의 협의체인 국가 자문위원회(The Council of State), 정부 조치의 합법성 및 국가예산 사용에 대한 감사 업무를 관장하는 감사원(The Court of Accounts) 등이 있다.

사법부
이탈리아의 사법권은 독립이 존중되고 재판관은 종신신분을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임명·경질 등의 인사사항은 국무회의의 권한이 아니라 별개의 회의체인 최고사법위원회High Council of the Judiciary가 관할한다(위원 임기 4년, 연임 불가). 이탈리아의 법원 조직은 민사사건과 형사사건 공히 제1심 재판소, 제2심 재판소, 최고법원의 세 단계로 심리를 한다. 민사사건과 형사사건 외의 사건을 담당하는 법원 조직에는 특별법원으로 행정법원Administrative Courts, 군사재판소Military Courts, 청소년법원Juvenile Courts, 지방수로법원High Court of Public Waters, 형집행감독법원Tribunale di Sorveglianza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헌법상의 쟁점에 관한 최종결정기관인 헌법재판소는 15명의 재판관(임기 9년)으로 구성되며 대통령, 양원합동회의, 사법부에 의해서 각각 5명씩 선출된다. 헌법재판소에서는 법률 및 행정명령의 위헌 여부, 행정부처간의 분쟁 조정을 담당하고, 그 외에 입법부, 사법부 및 행정부간의 분쟁 조정,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간 및 지방자치단체간의 분쟁 처리 등을 담당한다.

지방행정
이탈리아의 지방행정은 헌법에 따라 대폭적인 자치가 규정되며, 지방행정구역은 크게 15개의 주Regione와 5개의 특별자치주Regione Autonoma로 구분되고, 그 아래로 103개의 도Provincia와 8,101개의 시Comune가 있다. 5개의 특별자치주는 역사적 배경, 민족, 언어의 특성 등을 감안하여 자치권을 강화한 행정지역인데, 도서지역인 시칠리아Sicilia, 사르데냐Sardegna와 북부 국경지역의 발레 다오스타Valle d'Aosta,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Friuli-Venezia Giulia, 트렌티노 알토 아디제Trentino-Alto Adige 등이다.

이탈리아의 주, 도, 시의 자치단체장과 의회의원은 주민이 직접 보통 선거로 선출한다. 각 주에는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조정관(Commissioner)이 있으며, 각 주의회가 제정한 법안은 조정관의 서명이 있어야 발효된다. 이는 중앙정부의 재정부담과 관련된 사항 등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경제


경제 개관
이탈리아 경제는 GDP 규모가 1조 8,487억 달러(2016년 IMF 수치)로 세계 제8위, EU내 제4위의 경제대국이다. 이탈리아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산업 근대화가 지연되어 1930년대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0년대에 각각 국영기업을 설립하여 국가 주도로 철강, 석유화학, 에너지, 통신, 해운, 항공, 도로 등의 기간산업과 금융·서비스 산업에 투자를 집중하였다. 이탈리아는 1950년대 초반까지는 기본적으로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유지하였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야 기간산업이 본궤도에 진입하였다. 국가주도로 중화학공업 등 기간산업이 발전하는 한편으로 지방 전통산업을 바탕으로 발전해 온 민간중소기업을 근간으로 하는 산업특화지역이 발달함에 따라 이탈리아는 1950~1960년대 고도성장(연평균 5.5%)을 달성하면서 선진국가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이후 대두된 과도한 노동운동의 영향으로 중소기업은 경쟁력에 타격을 입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세계화 추세와 중국 등 개도국의 저가제품 공세로 점차 경쟁력을 상실하는 추세에 있다. 이탈리아는 1957년 유럽공동시장 창설 당시부터 참여함으로써 농업발전에 혜택을 입어왔으며, 산업분야도 역내 수출확대로 활로를 모색하였다. 또한 EU 통합 확대 추진에의 적극적인 참여 및 EU 차원의 경제정책에 보조를 맞추어 자국의 경제 성장을 추구하였다.

이탈리아는 유럽 경제강국 중의 하나이나, 산업이 발달된 북부지역(주로 민간 기업들 소재)과 그렇지 못한 남부 농업지역(주로 국영기업들 소재)간의 심한 소득 격차 등이 경제발전의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1950년대부터 남부지역개발법을 제정, 각종 지원과 혜택을 제공하고 있으나 낮은 노동 생산성, 사회간접자본의 부족 등으로 그동안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탈리아 경제의 강점과 문제점
이탈리아는 창의적인 기업가 정신을 기초로 제반 산업이 고루 발달해 있다. 전통 중소기업은 세계시장에 신축성 있게 대처하는 경영능력을 배양하면서 세부 분야별로 독자적인 첨단기술을 개발, 각종 기계를 비롯하여 섬유, 의류, 가구, 피혁, 귀금속, 식품, 공예품, 염색,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탈리아 경제는 제조업 부문에 강한 면을 보이고 있으며 주요산업은 자동차, 기계, 화학, 가구, 의류 및 직물, 가죽 및 신발, 식품가공, 세라믹 등이다. 자동차, 기계, 화학 등 기술 집약 제품과 섬유, 가구 등 고급 소비재가 주요 수출품이며, 원유 및 원자재, 부품소재 등을 수입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발칸국가, 북부아프리카 및 중동 등 여러 경제권에 인접한 지정학적 위치도 경제적 강점으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중소기업 중심 산업구조로 인해 규모의 경제면에서 국제경쟁력이 약화되고 방만한 재정 운영, 노동시장 경직성, 인프라 취약 등으로 인해 낮은 경제성장률, 고임금, 고실업, 고간접비용 등의 구조적 취약점을 안고 있다. 공공 분야에서는 연금, 의료, 교육 분야 등에 있어서의 사회보장지출 부담이 커지고, 공기업의 적자 보전,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 지급 등으로 공공지출이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부채가 계속 늘어나 국가예산의 상당 부분이 이자로 지불되면서 효과적인 경제정책 추진에 제약을 초래하고 있다. WEF 국제경쟁력 보고서(2014~2015)에 따른 이탈리아의 국가경쟁력은 세계 49위로 G7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참고로 한국은 26위)

대외교역 현황
이탈리아는 부존자원이 비교적 빈약하고 국내시장이 협소하여 수출 증대를 통한 경제성장을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하고 추진하고 있다. 이탈리아 경제는 대외교역 의존도가 높은 편으로, 이탈리아의 GDP 대비 교역 비중은 47%(2014년)를 기록하고 있다. 20개 각 주Region별 상공회의소 내의 무역센터를 중심으로 지방자치단체와 해외무역공사(ICE) 및 전경련(CONFINDUSTRIA) 등이 유기적으로 협조하여 지방 동종 중소기업간 콘소시엄을 구성하고 공동으로 수출 진흥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EU 역내국가와의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운데 최근에는 중국 등 아시아 신흥국가들과의 교역(특히 수입)이 증가 추세에 있다.

이탈리아 GDP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제조업(연관 서비스업 포함)은 이탈리아 수출의 95%를 차지하고 있는 바, 주요 수출 품목은 기계류, 금속제품, 자동차 등 운송기계, 화학제품, 전기제품과 식료품, 의류, 섬유, 가구 등 소위 전통적인 이탈리아 상품(Made in Italy products) 등이다. 2014년도 기준 이탈리아의 수출액은 5,287억 달러, 수입액은 4,718억 달러로 대외교역 수지는 569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였다.

사회와 문화


민족성과 생활문화
이탈리아는 기원전 천년경 켈트족, 에트루리아족, 그리스족 등 다양한 인도.유럽족이 이동해 정착한 곳이며,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반도국으로서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탈리아인은 유럽 북동부의 독일 슬라브Slav계, 북서부의 프랑스계, 서부의 카탈로니아Catalonia계, 동남부의 희랍 알바니아계, 남쪽의 희랍 아랍계가 혼합되어 있어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다양성’이 민족성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은 절제적이며 온건한 기질에 낙천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이탈리안 라이프 스타일Italian Life Style을 세계에 보급해 인기를 끌 정도로 삶을 향유하고 사랑할 줄 아는 민족이다. 이탈리아인들의 개인주의는 수세기 동안 잦은 외세의 침략으로 새로운 현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적응하고 생존해 나가면서 자연히 발달된 특성이다.

이탈리아인들은 가족 유대감이 끈끈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남부 쪽으로 갈수록 많은 가정이 대가족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회는 강한 남성중심주의 사회로서 양성평등률은 세계 77위에 머물고 있다. 이탈리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종교의식에 의한 혼인을 많이 하는 편이며, 최근 혼인율은 32.4%이며, 이혼율은 최근 10년간 59% 증가하여 4분마다 한 쌍의 부부가 이혼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2004년 총 12만 8,000건의 이혼이 있었다. 반면, 혼인 서약 없이 동거를 통해 가정을 이루는 이른바 ‘사실혼’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이탈리아는 슬로 푸드slow food 운동의 발상지답게 생활 곳곳에서 여유 있는 ‘느림의 철학’을 경험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사회생활 리듬은 아침 8시에서 오후 1시, 오후 4시에서 7시~8시 사이이다.

이탈리아 통계청(ISTAT)의 2006년 5월 자료에 따르면 이탈리아 사회 내 경제적 격차는 예년에 비해 심화되었으며, 특히 이탈리아 남부의 빈부 격차가 북부보다 심화되었다. 극빈층은 이탈리아 전체 가구의 11.7%인 267만 4,000가구로 약 760만 명 정도가 월소득 780유로 미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언어와 종교
이탈리아에서 사용하는 공용어는 이탈리아어이다. 이탈리아어는 이탈리아 반도의 약 6,000만 인구 외에도 전 세계에 퍼져 사는 약 6,000만 이탈리아인들이 사용하는 소수민족 언어이며, 문화의 선구자 지위를 유지하던 16세기까지는 서구 유럽에서 문화인들이 사용하는 국제어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이탈리아 동북부의 트렌티노알토 아디제Trentino-Alto Adige 지역은 이탈리아어와 함께 독일어를 사용하며, 이탈리아 서북부의 발레 다오스타Valle d'Aosta 지역은 프랑스어를 함께 사용하며, 트리에스테 고리치아Trieste-Gorizia 지역은 슬라브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가톨릭은 이탈리아 인구의 90% 이상이 신봉하는 종교로서 1929년 콩코르다트Concordat 협약에 의해 국교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1984년 2월 베티노 크락시Bettino Craxi 총리와 아고스티노 카사롤리Agostino Casaroli 로마교황청 국무장관 간에 서명된 신新 콩코르다트 협약에 의해 국교로서의 지위가 상실되었다. 이에 따라 교육기관에서의 의무적인 종교교육이 폐지되고, 종교기관에 대한 국가의 재정지원도 감소하였다. 그러나 1929년 라테란Lateran 조약에 의해 인정된 바티칸시국State della citta del vaticano의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스포츠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 스키 수영 사이클과 자동차 경주 등이며, 이 중에서 축구는 최고의 스포츠이다. 빗장 수비로 유명한 이탈리아는 2006년 독일 월드컵World Cup을 포함하여, 통산 네 번의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전통의 축구 강국이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리그 중 세리에 A는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 및 스페인의 프리메라 리가Primera Liga와 함께 세계 3대 리그 중의 하나이다.

언론•방송•통신
이탈리아는 자유 언론의 상징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기 간행물과 방송국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이탈리아에는 110여 종의 신문(약 1,200만 부)과 1,000여 종의 정기 간행물이 발행되고 있으며, 일 코리에레 델라 세라Il Corriere Della Sera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 양대 일간지를 비롯하여 여러 전국지와 유력 지방지 외에 유럽 유수의 경제일간지 일 솔레 24 오레Il Sole 24 Ore가 발행되고 있다. 주요 통신사로는 안사ANSA, ADN크로노스ADN Kronos, A.G.I.(Agenzia Giornalistica Italia) 등이 있고, 라디오 방송국이 2,000여 개, 텔레비전 방송국 수는 국영방송인 이탈리아방송협회와 지방 민영방송들을 포함해 500여 개에 이른다.

이탈리아 교육제도
이탈리아의 학제는 초등학교 5년과 중학교 3년 과정이 의무교육이며, 고등학교 5년, 대학교 3년~5년으로 나뉜다. 학교는 운영 주체에 따라 국립학교, 사립학교, 주정부 운영의 직업학교가 있으며, 전체 학교의 90%가 국립학교와 공립학교로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국립학교와 공립학교에 취학한다. 국립학교와 공립학교의 경우, 고등학교 및 대학교 비용의 대부분을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가 부담하여 학부모의 부담이 경미하다.
 
한-이탈리아 문화협력 교류
양국 간 문화교류는 1970년 3월 발효된 한-이 문화협정 체결 이후 점진적으로 증진되고 있다. 특히 1984년 한-이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양국에서 시행된 각종 기념사업은 양국 간 문화관계 및 기존 우호협력 관계를 심화시키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주요 문화협력 교류로는 대학 및 연구기관 간의 교육분야 협력, 이탈리아 내 한국학 강좌 설치 등 한국학 진흥 관련 협력, 정부 초청 외국인장학생 사업 지원, 이탈리아 내 한글학교 운영, 방송 분야 프로그램과 간행물 및 정보교환, 한-이 문화공동위 개최, 지방자치단체 간의 자매결연 등의 분야에서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관계


한국과 이탈리아의 외교관계
한국과 이탈리아의 교류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이후 일본, 중국에 체류하던 이탈리아 신부들을 통한 간접 교류로 시작하여, 1884년 6월 26일 한·이 수호통상조약과 부속통상장정, 그리고 한·이 수호통상조약 세칙 및 세칙장정이 체결되었다. 양국 간의 외교관계는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며 끊어졌다가 한국전쟁 당시 이탈리아가 적십자병원 부대를 한국으로 보내 의료 지원과 구호 활동을 벌이면서 다시 이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양국은 1956년 11월 24일에 국교를 재개하기로 합의하고, 1957년 양국에 설치된 공사관을 1959년 4월 16일에 한국 이탈리아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대사관으로 승격하였다. 로마Rome에 한국 대사관이 있으며, 밀라노Milano에는 총영사관이 2008년에 개설되었다. 2014년 6월에는 양국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한·이탈리아 창조경제 비즈니스 포럼을 밀라노에서 개최하는 등 다양한 정무 경제 문화 행사를 개최하였다.

양국 관계는 2000년대 들어 그 이전과 위상이 달라진 바, 2000년 한국 정상의 첫 이탈리아 방문 이래 10여 년간 양국 정상의 방문이 8차례나 성사되고 G20 등 다자회의 계기의 양자 정상회담도 성공적으로 개최되는 등 그 격과 중요성이 크게 높아졌다.

한국의 대對이탈리아 정책
냉전 종식 후 대두한 이탈리아 대내·외정책의 변화는 한국에게 정치, 안보, 경제,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대對이탈리아 관계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G8(Group of 8) 회원국이면서 유럽단일통화 창설 멤버이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면서 특히 역외 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중시하기 시작한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다.

먼저 한-이탈리아 정치안보분야 협력과 관련하여 우리 정부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정착, 궁극적인 통일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탈리아와의 정치 안보적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남·북 당사자 및 다자간 대화의 추진과 관련해 국제적인 지지 기반을 조성해야 할 필요성과 한국의 경제 재도약 노력과 관련하여 다원적 경제외교의 추진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한국과 이탈리아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관계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양국 간의 실질 협력관계 증진 여지가 큰 점을 감안하여 상호 상대국의 경제, 산업, 문화(언어 포함) 등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높이기 위해 정부와 민간의 각급 인적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보다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다.

한-이탈리아 경제통상 관계
한국은 이탈리아와의 양자협력은 물론, G8(Group of 8), G20(Group of 2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럽단일통화 등 다자경제 협력의 틀을 통한 양국 간 정책협조관계 강화를 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기업의 한국 투자 유치, 한국 상품의 이탈리아 진출 강화를 위해서도 민관 합동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한국과 이탈리아 양국은 세계 10위권 내외의 경제규모, 높은 대외교역 의존도, 대규모 경제권에 인접한 지정학적 위치 등을 감안할 때 상호 경제협력의 잠재력이 큰 편이지만, 교역 및 투자 규모는 다소 저조한 편에 속한다. 양국 간 교역규모는 2001년도에 38억 달러였고 이후 부침을 거듭하다가 2014년에는 97억 달러를 기록했다. 2014년 우리나라의 대對이탈리아 수출은 34.73억 달러, 수입은 62.61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주요 수출품목은 차량과 부품, 플라스틱, 철강, 전기기기, 원자로 보일러, 선박 등이었고, 주요 수입품목은 원자로 보일러, 가죽제품, 전기기기, 철강, 광물성 연료, 의료용품, 의류 등이었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제협력을 증진하는 차원은 물론이고 한국 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해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이탈리아 중소기업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한국은 양국 중소기업간의 기술협력과 합작투자 활성화를 위해 중소기업협력위원회를 개최하는 등 관련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더불어 양국은 정부 및 민간차원에서 경제협력 활성화를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한국 교민 현황
이탈리아에는 한국 교민이 약 4,054명(2013년 기준)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교민들은 영주권자 390명, 일반체류자 1,897명, 유학생 1,520명, 외국 국적자 247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별로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라치오Lazio 지역과 밀라노를 중심으로 하는 롬바르디아Lombardia 지역,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는 토스카나Toscana 지역, 볼로냐를 중심으로 하는 에밀리아 로마냐Emilia-Romagna 지역 등에 거주하고 있다. 로마 지역 교민들은 대부분 여행업, 음식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밀라노 지역 교민은 주로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주요 한국 교민단체로는 재이태리한인회, 로마가이드협회, 북부이태리한인회, 북부이탈리아지상사협의회, 이탈리아한인경제인협회, 제노바한인회 등이 있다.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 이탈리아는 1977년에 처음으로 접촉을 하였다. 1977년 7월 2일 이탈리아 해외무역공사(ICE)와 북한 국제무역촉진위원회 사이에 통상대표부 설치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통상대표부 설치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후 1977년 11월 14일에 북한이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제19차 총회에서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1978년 9월 18일에 유엔식량농업기구 북한대표부를 로마에 개설하였다. 그리고 2000년 1월 4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2000년 7월 27일에 주이탈리아 북한대사관을 개설하였다. 한편 이탈리아는 주한대사관에서 북한대사관을 겸임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문화유산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르네상스renaissance를 통해 알리기에리 단테Alighieri Dante,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Buonarroti Michelangelo 등을 배출하였으며, 18세기까지 서양문명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탈리아는 오늘날에도 문학, 철학, 건축, 미술, 조각, 음악, 패션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세계문화 주류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현대 이탈리아 문화의 구조적 특성은 분권적 다원주의로 로마, 나폴리, 피렌체, 베네치아 등이 각기 문화적 분권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 경제, 사회도 공통된 역사의 소산이다. 이탈리아 문화는 자유스러운 표현 방식 때문에 진보적 색채가 강하나 그 저류에는 가톨릭 종주국으로서의 강한 보수성이 잠재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예술의 본고장, 세계문화의 수도, 열린 박물관 등 역사와 문화가 전국 곳곳에 아로새겨져 남아 있는 문자 그대로 ‘전 국토가 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이다. 유네스코UNESCO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총 유적지의 14%총 586곳 중 35개소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문화유산의 6%를 기록하는 방대한 양의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위치에 걸맞게 이탈리아는 전 세계에서 드물게 국가의 문화유산 보호 의무를 헌법 제9조에 명시하고 있다. 특히, 베네치아, 피렌체, 페라라Ferrara, 아시시Assisi, 티볼리Tivoli의 빌라 데스테Villa d'Este, 시에나Siena 같은 곳은 도시 자체가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2002년 시칠리아Sicilia 섬 남동쪽에 소재하는 후기 바로크baroque 시대의 도시들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