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봉’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세계지역문화탐방]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류가 가장 먼저 거주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15세기에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으로 유럽에 알려진 이래 17세기부터 유럽 지역 백인들의 본격 이주가 이어지고 19세기에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다. 영국 연방 시절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 정책으로 악명이 높았던 남아공은 샤프빌 봉기 사건이 계기가 되어 1961년 공화국으로 독립을 한 후, 1994년 넬슨 만델라의 흑백연합정부 출범으로 새 시대를 여는 역사적 분기점을 마련하였다.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여 ‘무지개 나라’로 불리는 남아공은 역동적인 조화와 문화적 다양성을 바탕으로 또 하나의 희망봉을 찾아 힘찬 진군을 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남아프리카공화국南Africa共和國(Republic of South Africa, RSA, 아프리칸스어: Republiek van Suid-Afrika)은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국가이다. 줄여서 ‘남아공南阿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10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1961년까지의 국호는 ‘남아프리카 연방(남아연방)’이었다.

남아공은 위도 22도에서 35도 그리고 경도 17도에 위치한다. 표면적은 약 1,219,090㎢에 달한다. 북쪽으로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 북동쪽으로는 모잠비크, 스와질란드와 접하고 있다. 남아공 영토 안에는 1966년에 독립한 내륙국인 레소토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동남쪽은 인도양, 서남쪽은 남대서양과 연하고 있다. 수도는 프리토리아(행정), 블룸폰테인(사법), 케이프타운(입법) 세 군데로 나뉘어져 있는데,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약 786만 명의 요하네스버그이다. 남아공의 표면적은 지형학상 내륙의 고원과 해안 사이에 위치한 평원의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두 지형은 단층의 한 형태인 대지형(Great Escarpment)으로 구분된다. 해수면 높이는 서남쪽 현무암으로 덮인 로게벨드의 경우 1,500m, 콰줄루나탈 지역의 드라켄스버그는 약 3,482m에 달한다.

단애로부터 내륙 쪽에 이르면 고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고원은 사하라 사막 북쪽에서 시작되는 대아프리카 고원이 남쪽으로 이어지는 형태를 이룬다. 해수면에서 평균 높이가 약 1,200m에 이르는 드넓은 평원이 특징이다. 레소토 고원은 해발 약 3,000m 높이에 위치해 있다. 단애는 일반적으로 고원의 가장 높은 층을 형성하고 있다. 대단애와 해안 사이에 있는 펼쳐져 있는 지역은 동남으로 80km에서 240km, 남서로 60km 에서 80km에 이르는 등 다양한 형태를 띤다. 이는 다시 동부 고원 경사 지대와 케이프의 접힌 벨트와 주변 지역 그리고 서부고원 경사의 세 개의 소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남아공의 서쪽과 남쪽, 동쪽에 걸쳐서 대서양과 인도양이 둘러싸고 있다. 케이프타운에서 동남쪽으로 약 1,920km 떨어진 외딴 곳에 프린스에드워드와 마리온 섬이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남아공은 약 3천km에 달하는 해안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해안선 앞으로는 난류인 모잠비크―아굴라스 난류와 벵구엘라 한류의 두 개의 주요 해류가 흐른다. 아굴라스 난류는 동남쪽 해안에서 아굴라스 곶까지, 벵구엘라 한류는 서해안을 따라 남부 앙골라까지 북쪽을 향해 흐른다. 두 해류로 인해 생기는 기온 차는 남아공 동쪽과 서쪽 해안의 기후와 식물종 뿐만 아니라 해양 생물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해안의 특징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포구가 적다는 점이다. 남아공 해안에서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자연 포구로는 서해안의 살다나 만Saldanha Bay을 꼽을 수 있다. 이 지역은 밀물이 없다. 따라서 내륙으로의 진입이 어렵다. 남아공의 대부분 강어귀는 포구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커다란 모래톱이 연중 내내 진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모래톱은 파도와 해류의 작용, 하천에서 밀려 내려온 침전물 더미 등으로 인해 형성된다. 오렌지 강이나 림포포 강과 같은 큰 강에서만 모래톱까지 좁은 채널이 길게 유지된다. 따라서 남아공 내에는 배가 진입할 수 있는 강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남아공은 온화한 기온과 기후를 유지하고 있어 연중 내내 화창한 햇살을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열대성 기후로 동부지역이 서부보다 온난다습(연평균 기온 17℃)하며, 지역에 따라 기후가 크게 상이한 특징을 보인다. 남아공의 우기인 여름은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이어진다. 여름철 날씨는 매우 덥고 오후에는 천둥번개가 치는 때도 있다. 건기인 겨울은 비교적 건조하고 선선한 편이다. 일조량이 세계에서 가장 길다. 하루 평균 일조량이 평균 8.5시간으로 기록된다. 런던의 3.8시간, 로마의 6.4시간, 뉴욕의 6.9시간에 비해 높은 편이다. 평균 강우량은 464mm이다. 전 세계 강우량인 857mm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웨스턴케이프의 경우 겨울에 강우량이 더 높다. 반면 다른 주들은 여름철 강우량이 더 높다. 위와 같은 기후와 날씨는 남아공이 농사 짓기에 매우 적합한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공의 역사
백인 정착 이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는 오래 되었으나 기록된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이 지역은 인류가 가장 먼저 거주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남아프리카 지역에 처음 인류가 나타난 것은 300만 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100만 년 이상을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살아오던 코이산Khoisan족은 카메룬 부근에서 남하한 반투Bantu족에게 쫓겨 피시Fish 강 이남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수렵 및 채취 생활을 하던 부시먼Bushman족과 가축사육을 하던 코이코이Khoi-Khoi족은 오렌지Orange 강까지 진출하여 17세기까지 거주했다. 예전에는 남아프리카 전역에 분포하고 있었지만, 북쪽으로부터는 반투족, 남쪽으로부터는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압박을 받아 지금은 나미비아Namibia와 보츠와나Botswana를 중심으로 앙골라Angola 남부, 칼라하리Kalahari 사막 중부와 북부, 남서 아프리카 북부 등 한정된 지역에서만 살고 있다.

반투족의 선조들은 주로 잠베지Zambezi 강과 탕가니카Tanganyika 호수, 그리고 말라위Malawi 호수 주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철기문화와 금속문화를 보유한 채 림포푸Limpopo 강 이남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18세기 후반이 되자 오렌지 강 북부와 칼라하리 사막 동부지역 등을 포함한 남아프리카 전역, 그리고 동부 해안가까지 진출하였으며, 4세기 이전 산San족이 보츠와나 및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수렵생활을 하며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는 코이코이족이나 산족이 살았다. 이들은 수렵이나 채집을 하던 민족이었으나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1,500년 전쯤 반투족이 남아공 일대로 남하해 왔다. 이후 남아공 동쪽 지역에는 반투 종족들이 농경과 목축을 영위했고, 서쪽에는 코이코이족과 산족이 수렵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동북쪽 짐바브웨 근처에는 마풍구브웨 같은 왕국이 있었다.

백인 이주 시작
남아프리카 지역의 역사에 백인의 역사가 더해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z(1450년경~1500년)가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발견하고 난 이후부터이다. 1652년에는 해상 교역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동인도 제도와의 무역을 위한 중간 보급항 차원에서 케이프타운Cape Town에 정박소와 함께 정착촌을 설립하고 나섰다. 자국 선박의 보급기지를 만들고 노예와 천연자원, 귀금속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백인들이 남아프리카에 거주하게 되었고, 케이프타운은 백인들을 위한 개척과 보급의 기지가 되었다. 남아공에 살고 있는 토착 흑인들에게는 슬픈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679년에는 동인도회사가 유럽에서 들어온 이주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네덜란드인과 독일인의 이주와 함께 정착농업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인은 전매회사를 통해 코이코이Khoi-Khoi족 등과 교역을 시작했고, 이로 인해 기존의 사회 체제나 경제 체제는 순식간에 잠식되었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임금 노동자 또는 노예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인과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백인들은 스스로를 보어인Boer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라는 뜻이다. 이들 보어인과 1688년 이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프랑스의 위그노파 등 백인들은 케이프타운 해안 주변의 정착촌에서 벗어나 점차 내륙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18세기 무렵에는 동부 해안으로 진출한 보어인들과 동케이프 지역으로 진출하던 반투Bantu족이 그레이트피시Great Fish 강 근처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분쟁은 약 100년 동안 이어졌으나 19세기 후반, 반투족은 우세한 화기를 갖춘 백인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이미 18세기 무렵부터 백인들은 유색인 차별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권한이라고 주장하면서, 인종간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백인의 생활양식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영국의 진출
남아프리카에 영국이 진출하여 케이프타운Cape Town을 점령한 것은 1795년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중에 프랑스와 체결한 아미앵조약Treaty of Amiens에 따라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게 되면서, 1803년에 케이프타운을 바타비아 공화국Batavian Republic, Bataafse Republiek에 돌려주게 되었다. 바타비아 공화국은 1795년부터 1806년까지 네덜란드 본토에 성립된 공화국을 말한다. 이로 인해 케이프타운은 곧 네덜란드령이 되었지만, 1806년 다시 영국에 점령되었고, 1814년에는 정식으로 영국령 케이프로 편입되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820년부터 영국인들이 남아프리카로 이주해오기 시작하면서 보어인Boer은 내륙의 오지로 소개疏開되는데, 이로써 영국인과 보어인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1834년에 영국정부가 노예제도를 폐지하면서, 특히 노예에 의존해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이스턴케이프Eastern Cape 지역 보어인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보어인들은 오렌지 강 이북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1835년에 북방 내륙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이를 대이주, 즉 그레이트트렉Great Trek이라고 한다.

내륙으로 진출해간 보어인Boe)은 원주민을 정복한 후 발Vaa) 강 이북과 오렌지Orange 강 이북에 두 개의 정부를 수립했다. 영국 또한 이들 지역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나 보어인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1852년에는 오렌지자유국Orange Free State, Oranje-Vrijstaat이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어 1854년에는 트란스발공화국Transvaal Republic의 독립을 인정했다. 트란스발공화국의 정식 이름은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n Republic, Zuid-Afrikaansche Republiek으로, 현재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영어 표기인 ‘Republic of South Africa’와는 구별된다.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을 설립한 아프리카너Afrikaner들, 즉 네덜란드 이주민을 중심으로 한 독일인과 프랑스인 등 소수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지배권과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아프리카 토착인을 노예로 취급하면서 백인과는 엄격히 차별 대우하는 관습을 확립시켜나갔다. 1899년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귀금속 채굴권을 둘러싸고 영국군과 ‘보어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독일의 물밑 지원을 받으며 줄기찬 게릴라전을 전개해나갔고, 영국군은 강경책으로 맞섰다. 영국군이 휩쓸고 지나간 보어인 마을들은 마치 메뚜기떼의 습격을 받은 들판처럼 초토화됐다. 주민들은 닥치는 대로 끌려가 강제수용소에 수용됐다. 십중팔구는 노약자들이었다. 2만8천 명에 가까운 여성과 어린이들이 수용소에서 영양실조와 학대로 죽었다. 영국군의 잔학상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물론 영국 안에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역사학자 골드윈 스미스Goldwin Smith는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를 화형으로 죽인 이래 이처럼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보어전쟁은 1902년 영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중부 내륙 지역은 영국령으로 넘어갔다.

남아프리카 연방의 수립
1909년 9월 20일, 영국 의회는 남아프리카법South Africa Act을 통과시켜 오렌지자유주, 트란스발 주, 케이프Cape 주, 나탈Natal 주 등 4개의 주로 구성된 입헌군주국 형태의 자치제로서 남아프리카연방의 수립을 승인했다. 남아프리카연방이 영국연방국가로 독립한 것은 이듬해인 1910년 5월 31일이었다.

1912년에는 남아프리카원주민민족회의SANNC(South African Native National Congress)가 창설되면서 흑인들의 반정부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원주민민족회의는 1923년에 아프리카민족회의ANCAfrican National Congress로 명칭을 변경했다.

남아프리카의 백인사회는 영국계와 백인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보어계로 여전히 분열된 채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남아프리카연방이 수립된 이후로는 영국계가 상공업과 금속업 등 경제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반면, 아프리카너Afrikaner로 이름을 바꾼 네덜란드계는 농촌을 기반으로 하여 정계에서 실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1948년에는 보어계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정권이 발족하면서 가혹한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과 반영국정책의 실시를 분명하게 선언했고, 보어계 백인과 영국계 백인 사이의 대립 노선은 더욱 뚜렷해졌다. 국민당은 또 1953년에는 흑인들의 고등교육을 제한하도록 한 반투교육법Bantu Education Act을 제정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발족 이후
1958년 헨드릭 페르부르트Hendrik Frensch Verwoerd(1901~1966, 재임 1958~1966) 총리 내각이 집권하였다. 1960년에 샤프빌Sharpeville에서 통행증명서 휴대에 반대하는 흑인들의 평화적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여 67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같은 해 1960년, 페르부르트 정부는 흑인 민족주의 단체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African National Congress)와 아프리카민족회의의 강경파가 분리해 나와서 결성한 범아프리카회의PAC(Pan Africanist Congress)를 불법단체로 규정하여 흑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억압을 본격화했다. 페르부르트 총리는 1960년 10월 5일, 백인들만 참여하는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제로의 이행을 단행했다. 1961년 3월, 페르부르트 정부는 영국연방 수상회의에서 정식으로 영국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1961년 5월 31일에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독립을 하였다.

1966년 페르부르트 총리가 암살을 당하자 발타자르 요하네스 포르스터르Balthazar Johannes Vorster(1915~1983, 재임 1966~1978)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포르스터르 정부는 1971년 반투 홈랜드(Bantu Homeland) 헌법안을 발효시켜, 1959년 반투 자치정부법 제정 후 실시해오던 흑인의 민족분리정책을 가속화해 나갔다. 1976년 6월에는 인구 100만 명의 흑인 집단거주지 소웨토(Soweto)에서 학교 수업의 절반을 아프리칸스어(Afrikaans)로 진행하기로 한 정부의 방침에 항의하여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며 폭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77년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무기금수(Arms Embargo)를 결의했다.

1978년 포르스터르 총리가 사임하자 피터르 빌럼 보타Pieter Willem Botha 국방장관이 총리직을 승계했다. 1983년 보타 정권은 대통령제의 시행을 골자로 하는 신헌법을 채택했고, 1984년 9월에는 신헌법의 발효에 따라 백인, 유색인, 인도인에 의한 인종별 3원제 의회가 구성됨으로써 혼혈인 및 아시아인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다. 보타는 1984년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985년에 인종차별과 관련된 모든 규정을 수정하거나 철폐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985년 4월에는 1927년에 제정된 ‘부도덕법’과 1949년에 제정된 ‘이종족 간 결혼금지법’이 폐지되었다. 1985년 9월 흑인 거주지역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한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폭력 소요가 잇따랐다. 보타 정부는 1986년 6월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한편, 언론 검열과 보안군의 권한을 강화하고 나섰다. 한편, 1987년 5월에 치러진 백인의원 선거에서 집권 국민당이 압승을 거두자 개혁 분위기는 퇴조하고 보수성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1988년 2월에는 17개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단체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조치가 단행되었고, 이어 해외정치자금 도입금지법과 반정부 성향 2개 신문의 정간 및 노동법 개정안이 의회에 상정되는 등 일련의 흑인세력 탄압책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흑인들의 소요를 수차례 강경 진압하고,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청년동맹Youth League을 창설한 흑인민권지도자 만델라의 석방도 거부하면서 국제적 고립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런 정세 속에서 1989년 보타 대통령이 사임하고 프레데리크 빌럼 데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가 1989년 총선 승리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데클레르크 대통령은 흑인과의 권력 공유를 통한 민주화정책 추진을 내세우고, 대통령 취임 즉시 완전한 민주주의의 정착을 선언하면서 인종차별정책을 완화해나갔다. 1990년 만델라의 무조건 석방과 함께 정치범들의 석방이 단행되고, 아프리카민족회의의 합법화 등 혁명적 조치를 잇따라 시행했다. 1990년 6월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비상사태가 해제되었고, 1991년 6월에는 거주지역법, 토지법, 주민등록법 등 인종차별을 주도해오던 3대 악법이 폐지되었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1991년 7월 공산당SACP(South African Communist Party)과 연합하여 당 체제 정비에 착수했고, 넬슨 만델라를 의장으로 선출하여 민주화 활동을 가속화해 나갔다. 1994년 4월 마침내 최초의 흑백 다인종 민주총선이 실시되었고 이 선거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는 63%의 지지로 압승을 거두며 320여 년간 인종차별정책으로 남아프리카를 착취해온 백인정권을 종식시켰다. 1994년 5월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넬슨 만델라 의장을 대통령으로 하는 흑백 연합정부가 수립되었다.

흑인 정부 수립 이후
1994년 4월 최초로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민주적 총선거가 실시된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정부, 타보 음베키Thabo Mbeki 정부, 그리고 제이컵 게드레이레키사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 정부가 차례로 들어섰다.

1994년 5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국민당NP (National Party)과 잉카타자유당IFP (Inkatha Freedom Party) 등 3당이 참여한 거국연립정부GNU (Government of National Unity)가 수립된 후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주도 아래 민주화 과정이 추진되었는데, 넬슨 만델라의 신정부는 급진적 개혁보다 화합을 통해 흑백의 공존사회를 건설해가는 온건한 개혁 추진 쪽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4년 하반기에는 국제연합UN(United Nations)과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 아프리카연합AU(Africa Unity), 비동맹운동NAM(Non-Aligned Movement), 영국연방Commonwealth of Nations 등 관련 국제기구에 모두 가입했다.

1996년 7월 국민당이 연립정부를 탈퇴하자 이후부터는 사실상 아프리카민족회의 단독으로 정부 운영을 해나가게 되었다. 1996년 10월, 제헌의회는 신헌법을 채택하여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인권보장을 강화했다. 1999년 6월 에 치러진 제2차 민주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는 다시 압승을 거두었고 부통령이던 타보 음베키Thabo Mbeki는 같은 해 6월 아프리카민족회의 후보로 만델라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어 제2대 흑인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다. 음베키 대통령은 2004년 4월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2005년 6월에는 제이컵 게드레이레키사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 부통령을 뇌물수수 혐의로 해임시켰다. 그러나 주마는 2007년 12월, 림포푸Limpopo 주의 주도州都 폴로콰네Polokwane에서 개최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전당대회에서 음베키 대통령과의 접전 끝에 당 의장에 당선되었다.

2008년 9월 타보 음베키 대통령이 사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국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대통령실 장관이던 칼레마 페트루스 모틀란테Kgalema Petrus Motlanthe가 과도기간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아프리카민족회의를 떠났던 이탈세력은 2008년 12월 새로운 정당인 국민회의COPE(Congress of the People)를 창당하였다. 그러나 2009년 4월 22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는 하원의석 400석 가운데 264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었고, 다음 달인 2009년 5월 9일, 제이컵 게드레이레키사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치 및 행정


정치현황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내각책임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중심제의 공화국이다.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는 드물게 다당제를 운영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 및 행정수반으로서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입법권은 대통령과 양원 의회에 귀속되어 있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선출되며, 각료도 대통령이 지명할 수 있는 2개 이내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의원 중에서 임명된다. 대통령은 의회의 과반수 찬성에 의한 제한적 하원해산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의회는 대통령 및 내각에 대한 불신임권을 가지고 있다. 의회 선거는 정당명부제政黨名簿制에 입각하여 정당별 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2016년 현재 남아공의 대통령은 제이컵 게드레이레키사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요 정당으로는 집권 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African National Congress) 외에 백인계 야당인 민주동맹DA(Democratic Alliance), 아프리카민족회의에서 이탈한 세력이 창당한 국민회의COPE(Congress of the People), 콰줄루나탈KwaZulu-Natal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줄루Zulu계의 잉카타자유당IFP(Inkatha Freedom Party) 등이 있다.

입법부
입법부인 의회는 양원제로, 5년 임기의 하원National Assembly과 상원National Council of Provinces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 의석은 400석으로, 의장과 부의장, 그리고 그 아래에 상임위원회와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별도로 구성되는 특별위원회가 있다. 우선 각 위원회에서 현안을 협의하고 검토한 후 필요한 법안은 전체(본)회의에 회부하게 된다. 상원 의석은 90석으로, 전국 9개 주에서 각 10명씩 선출된다. 하원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조정 역할을 맡고 있다.

행정부
행정부는 대통령과 부통령, 그리고 장관 및 부장관 등의 각료로 구성된다. 대통령은 부처 신설을 포함한 각료의 구성과 임명에 대한 전권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헌법상 국가원수 겸 정부의 수반으로 군 최고 통수권자이다. 부통령은 제1당과 하원의석 80석 이상을 획득한 정당에서 선출된다. 대통령 유고 시에는 부통령이 승계하며, 대통령이 권한을 행사할 때 부통령과 상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사법부
남아공의 일반법 체계는 관습법으로 네덜란드의 고법古法인 로마-홀란드법(Roman Dutch Law)을 따르며, 민사, 형사소송, 증거, 상사 문제 등 일부 분야에서는 영미법식을 수용하고 있다. 법원은 대법원Supreme Court of Appeals, 각 주에 1개꼴인 10개의 상급법원High Court, 그리고 310개의 하급법원Magistrate's Court으로 구성되며, 3심제의 사법체계를 가지고 있다.

대법원장은 7년 단임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헌법재판소장을 겸임한다. 헌법재판소는 1994년에 설치되었다. 모든 법관은 법무장관의 추천을 받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국회의 요구가 없는 한 해임은 불가능하다. 법관 임명 및 법행정 관련 주요 사항은 법무장관, 헌법재판소장 등 행정부와 사법부의 핵심 인사로 구성된 사법위원회(JSC, Judicial Service Commission)의 자문을 받도록 되어 있다.

지방행정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방 행정자치단체는 중앙정부(Central Government) 아래에 9개의 지방정부(Provincial Government)와 284개의 시정부(Local Government)로 구성되어 있다. 9개의 지방정부를 구성하는 9개의 주는 가우텡Gauteng 주, 음푸말랑가Mpumalanga 주, 림포푸Limpopo 주, 콰줄루나탈Kwazulu-Natal 주, 프리스테이트Free-State 주, 노스웨스트North-West 주, 노던케이프Northern Cape 주, 이스턴케이프Eastern Cape 주, 웨스턴케이프Western Cape 주 등이며, 각 주의 주도州都는 각각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음봄벨라Mbombela, 폴로콰네Polokwane, 피터마리츠버그Pietermaritzburg, 블룸폰테인Bloemfontein, 마피켕Mafikeng, 킴벌리Kimberley, 비쇼Bhisho, 케이프타운Cape Town이다.

남아공의 최근 정치정세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흑인 민주정부가 수립된 지 18년이 경과한 2012년 현재, 정치적 안정과 보수적 거시경제정책 운용에 따른 제반 경제지표의 안정화는 상당 부분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경제상황의 개선 수준은 대다수 흑인들의 기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5년에 백인-흑인 간의 소득차가 4:1이었으나 2000년의 호구조사에서는 6:1로 더욱 벌어졌다. 2012년 기준으로 흑인의 56%가 빈곤층이었지만 백인 중 빈곤층은 2% 정도에 불과했다. 21세기의 첫 10년간 남아공에서는 흑인 중산층(일명 ‘블랙 다이아몬드’)이 상당히 증가하기는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백인과 흑인간의 빈부격차는 심각할 정도에 이르렀다. 2011년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천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전 국민의 25%가 하루 1.25달러 이하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또한 남아공에서는 계속되는 실업과 빈곤, 범죄, 그리고 감염자 수가 58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와 에이즈AIDS(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후천 면역 결핍증)의 만연이 주요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2009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가 3분의 2에 가까운 득표율로 압승함에 따라 아프리카민족회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가 여전히 확고하다는 것이 증명된 가운데, 2009월 5월 국민적 지지와 기대 속에 제이컵 주마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철저한 인종분리정책, 즉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시절부터 투쟁을 이끌어온 아프리카민족회의에 대한 뿌리 깊은 대중적 지지기반이 여전하고, 아프리카민족회의를 대체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아직 미약한 상황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독주체제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제이컵 주마 대통령은 2011년 2월에 행한 신년 국정연설에서 2011년을 ‘일자리 창출의 해’(Year of Job Creation)로 규정하고, 2020년까지 500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는 ‘신성장전략’(New Growth Path) 이행을 위해 민간과 지역공동체의 일자리 창출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부 및 공공 부문의 일자리 창출 대책도 함께 제시했다. 특히 인프라 개발, 농업, 광업 및 제련 분야, 제조업, 녹색산업, 관광 분야 등 6대 분야를 일자리 창출 가능성이 높은 중점 분야로 선정하고 이들 분야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약속하는 한편,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세제 혜택과 규제 철폐 등을 약속했다.

2011년 5월 18일에 실시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방선거에서는 아프리카민족회의가 62%의 득표율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2006년 선거에서 얻은 66%의 지지율보다 낮은 수치로, 하락세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제1야당인 민주동맹DA은 전통적 강세 지역인 웨스턴케이프Western Cape 주뿐만 아니라 이스턴케이프Eastern Cape 주에서도 선전하여, 2006년보다 9% 상승한 24%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런 결과는 혼혈계와 인도계의 지지율이 하락한 것과 높은 실업률 등 아프리카민족회의의 경제정책에 대한 흑인들의 불만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2011년 5월 지방선거는 주마 행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선거에서의 지지율 하락은 제이컵 주마 대통령의 아프리카민족회의 내에서의 입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으로 평가되었다.

경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고도화된 산업국으로 아프리카 경제를 이끄는 선도국가이자 아프리카 최대의 시장이기도 하다. 또한 남아프리카 지역이나 블랙 아프리카(Black Africa Countries)에서는 최강국이며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의 실질적인 수장국이다. 2010년 기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내총생산GDP은 3544억 달러로, 아프리카 전체 53개국 국내총생산의 약 21%를 점유하고 있다. 또 1인당 국민소득은 2010년 기준으로 약 7101달러로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시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상품교역 규모 또한 2010년 기준 아프리카 최대 규모로, 아프리카 대외 교역의 약 16%를 점유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금융, 유통 등 3차 산업 위주의 성숙된 산업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부가가치 창출 측면으로 볼 때,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에서 3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기준 65.8%에 달한다. 이에 비해 1차 산업 비중은 3%, 2차 산업 비중은 31.2% 수준이다.

3차 산업을 제외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요 산업으로는 광산업, 철강업, 석유화학산업, 자동차산업 등을 들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일찍이 광산업이 발전했는데, 이 광산업은 2010년 기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내총생산의 8.8%를 점유하고 있다. 또 10억 톤에 이르는 철광석의 매장량은 세계 14위 규모로, 이처럼 풍부한 철광석을 바탕으로 발전한 철강산업은 2010년 기준 전체 제조업 생산량의 약 22%를 차지했다. 석유화학산업은 철강산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제조업으로, 2010년 기준 남아프리카공화국 제조업 생산량의 약 21%를 점유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자동차산업육성정책MIDPThe Motor Industry Development Program을 시행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을 세우고 있다. 그에 따라 BMW, 벤츠, 도요타 등 세계 주요 자동차업체들의 생산공장이 속속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자동차 및 관련 산업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전체 제조업 생산량의 약 28%를 점유하고 있다.

부존자원 및 개발현황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풍부한 광물자원과 에너지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석탄 및 석유가스 연관 산업, 나아가 원자력 분야에서도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크롬과 금의 매장량은 모두 세계 2위, 우라늄과 니켈의 매장량은 각각 5위와 8위를 차지할 만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광물자원이 풍족하다. 광산업(mining)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내총생산GDP의 8.8%를 점유하면서 49만 명의 고용 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또 총 수출액 가운데서는 31.7%를 차지하는데, 가공광물(processed minerals)을 포함할 경우 그 수치는 50%에 이른다. 금과 백금류 금속, 다이아몬드, 그리고 석탄이 전체 광물 수출 물량의 89%를 차지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대규모 산업용 에너지 수요로 인해 에너지 집약적Energy-Intensive인 경제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매장량이 적은 석유와 천연가스에 비해 석탄자원은 상당히 풍부한데, 이를 잘 활용하면서 전기의 생산 비용을 낮출 수 있게 했다. 매장량이 세계 9위인 풍부한 유연탄은 저렴한 가격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기술과 함께 석탄 액화(CTL, Coal-to-Liquids)와 가스 액화(GTL, Gas-to-Liquids) 같은 액화석유 추출 기술을 보유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석유의 생산은 주로 석탄으로부터 액화석유를 추출하는 데 의존하고 있다. 에너지산업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내총생산의 15%를 차지하면서 25만 명의 고용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1994년 민주정부가 출범한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과거의 인종차별정책에 의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시키고 흑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흑인경제육성정책BEEBlack Economy Empowerment을 채택했다. 흑인경제육성정책은 액화연료Liquid Feul 부문에서 소유권 이전과 합작 추진 등을 통해 2012년까지 흑인들의 관련 지분을 26%까지 확대시키겠다고 명시해놓고 있다. 그러나 2010년에 발표된 신성장전략에서는, 흑인경제육성정책이 일부 소수 흑인들의 비즈니스 이권에 도움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것인 만큼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경제동향
2000년대 중반 이후 광물 등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면서 대외 경제 여건이 호전되고, 이런 분위기 속에 소비와 설비투자가 늘어남에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는 5%대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견실한 성장세를 지속해가고 있었다. 2009년에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로 마이너스 성장(-1.8%)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2010년에는 월드컵 인프라 투자 확대로 2.8%의 성장률을 보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중기재정운용계획에서 2011년 성장률을 3.5%, 2012년 4.1%, 2013년 4.4%로 예상하며 지속적으로 성장률이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글로벌 경제 여건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건설 부문 등의 2010년 월드컵 관련 투자를 기반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성장 추세는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집권 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내부의 권력 분점에 따른 경제정책의 기조 변경 가능성이 남아 있고, 580만 명에 이르는 에이즈 보균자 등 국민건강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강력범죄율과 기능인력 부족 문제, 그리고 백인 고급인력의 해외유출 등 구조적 제약이 존재하고 있다. 광업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산업구조를 탈피하고 빈부격차 및 실업문제 해결, 거버넌스(governance) 개선, 인프라 확충, 전력 사정 개선 등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ZAR)가 미국 달러화(USD) 대비 강세 흐름을 보이고 있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미국의 양적 완화 조치에 대해 공개 비판하고 외환거래 규제 완화 등을 통해 랜드화의 가치 하락을 시도하고 있다. 2011년 6월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는 달러당 6.8랜드(Rand)로, 달러당 8랜드 대를 유지했던 2009년도에 비해 강세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 2010년 월드컵 이후 둔화된 경제 성장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중앙은행은 2010년 11월 기준금리를 35년 이래 최저 수준인 5.5%로 인하하고 경기 부양을 시도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최근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 동남아프리카공동시장COMESACommon Market for Eastern and Southern Africa, 동아프리카공동체EACEast African Community 등 3개의 지역기구 사이에 2013년까지 상품의 자유로운 교역을 목표로 하는 3자 자유무역지대Tripartite Free Trade Area를 창설하자는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역외 국가들과의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보다는 자국 기업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역내 교역 확대와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연계하는 인프라 건설을 촉진하는 데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 가운데 최대의 무역 규모를 가지고 있는 국가로, 2010년 기준 아프리카 전체 상품교역액의 약 16%를 점유하고 있다. 2010년 기준 상품수출액은 858억 달러, 수입액은 818억 달러로, 아프리카에서는 최대 규모이지만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0.6%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금, 백금류(Platinum), 철합금(Ferro-Alloys), 석탄, 자동차 등이며, 주요 수입품목은 원유, 자동차, 자동차 부품, 항공기, 무선송신기기 등이다.

사회와 문화


남아공의 사회 특성 - ‘무지개 국가’
민족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많은 종족이 혼재해 살고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이 가운데 아프리카 흑인Black African은 79.4%로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 아프리칸 또한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그 종류가 다양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민을 이루는 주요 민족은 반투어Bantu languages족에 속하는 은구니Ngunis족, 역시 반투계의 소토Sothos족에 속하는 츠와나Tswanas족, 총가Tsongas족, 벤다Vendas족 등이다. 은구니족 안에는 줄루Zulus족과 코사Xhosas족, 은데벨레Ndebeles족, 스와지Swazis족 등이 포함되는데, 줄루족과 코사족, 벤다족 등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만 있는 종족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민의 거의 8할을 차지하는 흑인 다음에는 백인White이 9.2%의 비율로 존재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옮겨온 식민 이주자들의 후손들이다. 유색인Colored 또는 혼혈인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전체 주민의 8.8%를 차지하고 있다. 또 인도인 또는 아시아인Indian or Asian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민의 2.6%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
남아공에서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Afrikaans), 그리고 9개의 흑인부족어 등 모두 11개 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9개의 토착어는 줄루어IsiZulu, 코사어IsiXhosa, 은데벨레어IsiNdebele, 북소토어Sesotho saLeboa, 소토어Sesotho, 츠와나어Setswana, 스와지어Siswati, 벤다어Tshivenda, 총가어Xitsonga 등이다. 공식어로서 가장 일반적으로 소통되는 언어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로, 아프리칸스어는 네덜란드 이주 정착민들의 언어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원주민의 언어 및 후기 이주자들의 언어(말레이어,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와 접촉하면서 1650년부터 1850년까지 200여 년에 걸쳐 형성된 언어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의 약 57%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그와 유사한 수의 인구가 아프리칸스어를 구사할 수 있으나 아프리칸스어 구사자는 점차 감소 추세에 있다. 아프리칸스어는 주로 백인 농부들에 의해, 지역적으로는 서부 케이프Cape 주 등 주로 남서부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종교
남아공의 종교 분포를 보면 주민의 대다수인 79.8%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고, 다음으로 이슬람교 1.5%, 힌두교 1.2% 순이다. 종교가 없는 주민도 15% 정도 된다. 국민의 8할이 기독교를 믿지만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토착종교 등 다양한 종교가 혼재하고 있다. 기독교는 대부분이 신교이지만 ‘아프리카 독립교회’(African Independent Church)라는 분파가 있다. ‘아프리카 독립교회’는 유럽 선교사들의 설교에 반발한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 세운 토착 기독교 집단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2500여 개의 독립교회가 존재하며 그 영향력 또한 막강하다. 독립교회에는 아프리카인의 조상 숭배 사상이 일부 반영되어 있으며, 일부다처제를 용인하고 있다.

현장에서 보는 ‘동물의 왕국’
역사적으로 불안과 역경, 고난의 시절을 살아온 남아공은 역설적으로 희망의 땅이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축복받은 땅’이다. 이 나라에는 생물학적 다양성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풍부하다. 국가 정책도 자국의 다양성을 개발하는 데 치중되어 왔다. 다양한 종류의 국립공원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그런 정책의 결과가 이룬 성과중 하나다.

남아공의 크루거 국립공원은 세계 최초로 야생동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공원은 반세기 이상의 역사를 ‘남아공 역사’와 다른 과정을 밟으며 성장해 왔다. 공원에는 많은 동물들이 자유롭게 뛰어 다니고 있다. 매년 약 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 이유다. 관광객들은 현장에서 ‘동물의 왕국’을 경험할 수 있다. 크루거국립공원은 주변의 다양한 공공 및 사설 야생동물공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공원의 영역을 모잠비크와 짐바브웨까지 확장하게 된 것은 이 나라 국민뿐만 아니라 범 (남)아프리카 사람들의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남아공 노던케이프 주에는 또 하나의 국경을 초월한 공원인 칼라가디 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남아공의 칼라하리 겜스복 국립공원과 보츠와나의 겜스복국립공원을 통합한 것이다. 이 외에도 남아공에는 식물계와 동물계를 보호하기 위해 18개의 국립공원이 지정되어 있다.

남아프리카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남아공 요리는 그 역사와 인종만큼이나 다양한 조리법, 독특한 맛의 조화로 유명하다. 케이프 지역에 가장 먼저 정착했던 네덜란드 요리는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민, 특히 케이프 지역 가정 요리사로 일한 말레이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토착민들의 지역 특유 음식이 합해졌다. 사냥꾼이나 개척자들이 떠돌이 생활로 인해 야생에서 먹던 독특한 방식의 요리도 개발되었다. 이후 콰줄루나탈 지역에 터전을 잡은 인도인들과 같은 다른 이민자들은 남아공 음식에 색다른 맛을 더하며 새로운 조리법과 향료를 가미했다.

콩과 메론, 호박, 땅콩 등은 남아공 본토인들이 즐겨먹던 음식이었다. 이들 식재료를 이용한 조리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남아공 음식에서 ‘밀리’로 불리는 옥수수는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식재료이다. 팝이나 부드럽게 찌거나 푸석한 죽처럼 조리한 옥수수 요리가 가장 흔한 음식이다. 전통 아프리카 요리에서 생선이나 닭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등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사냥으로 잡은 동물이나 새는 먹었다.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서 메뚜기나 개미, ‘마숀자’로 불리는 모파니 나무에서 자라는 커다란 애벌레(남아공 별미 요리) 등을 요리해 먹기도 한다.

오늘날 팝 요리는 포이키코스(삼발로 된 무쇠솥에 만든 음식)와 함께 남아공 음식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야생 동물 고기를 재료로 사용한 요리도 브라이 등과 함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 외에도 개척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음식으로는 빌통(남아공식 육포로 소고기나 영양, 타조 고기로 만든다), 브레비스코이트(딱딱한 비스켓류), 폿브루이트(납작한 냄비에 구운 빵) 등이 있다. 남아공 요리의 전통은 남아공의 다양한 문화를 반영하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남아공의 문화 예술
남아공 사람들은 다양한 남아공 지형의 아름다움을 그들의 문화에서도 다양하게 표현해 왔다. 풍부한 문화 속에서 긍지를 갖고 사는 그들은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곳에서는 많은 영웅들과 투쟁의 역사, 인류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인류의 요람’을 비롯하여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유적지들이 세계인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3백만 년 이상, 리틀풋(Little Foot)과 미시스 플레스(Mrs. Ples) 등과 같은 최초의 인류는 남아공 지역에 살았다. 그들이 남긴 화석은 ‘인류의 요람’으로 불리는 요하네스버그 북쪽 스터크포테인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의 영향이 역동적인 조화를 이루는 국가이다. 이 나라의 다양성은 독창성과 창의력의 산실이 됐다. 다양한 문화의 상호작용과 각 민족의 전통 유산을 기반으로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오늘날의 ‘무기개 국가’ 남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역동적인 조화가 남아공의 문화 예술에 표현되고 있는 것도 자랑이다.

남아공에는 석기시대의 그림과 벽화 등의 유적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남아있다. 음악 역시 식민지 시대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다양성 속에서 꽃을 피웠다. 음악은 외부 세계로부터 들여온 형식에 현지의 독창성을 가미하여 창조되었다. 오늘날의 남아공 음악은 혁신적인 장르와 전통 클래식 장르가 조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찬송가에서 재즈로부터 쿠웰라 또는 콰이토에 이르기까지 남아공의 음악인들은 국제적인 추세를 반영하는 동시에 남아공만의 독특한 취향을 추구한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과 함께 주어진 새로운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된 장르는 무용이다. 남아공 무용의 세계는 생동감과 활기, 열정이 넘치는 독특함을 자랑한다(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조).

물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남긴 유산의 그림자도 아직까지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백인의 정치권력 독점이 철폐되고, 흑인에 대한 법적인 규제도 철폐되면서 수천만 명의 흑인 노동력이 도시로,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제대로 된 직업 교육을 받지 못했던 흑인 인력은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다수의 토착 흑인들은 중산층에 진입하지 못하고 빈곤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남긴 최악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남아공이 풀어야 할 ‘숙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남아공은 희망이 있는 나라다. 15세기, 부와 명예를 찾아서 동인도제도를 찾아가던 유럽인들이 남아공은 물론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희망봉을 발견하고, 그들의 이정표로 삼았다. 남아공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나라 안에 위치하고 있는 또 하나의 ‘희망봉’을 찾아서 힘차게 행군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과 남아공의 관계


정치 외교 관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 호주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참전 우방국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은 1개 비행중대를 포함하여 826명의 병사를 한국전쟁에 파병했다. 그러나 양국 간의 이러한 우호관계는 1978년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의 제재에 따라 모든 공식적인 관계가 단절되면서 중단되었다. 이후 1990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정부의 인종차별정책이 철폐되는 것을 계기로 양국 간에 관계 개선이 모색되다가 1992년 12월 수교에 합의했다.

1994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최초의 다인종 선거에 의한 흑인 민주정부가 수립된 이후 양국 관계는 급속히 발전해나갔다. 1995년 7월에는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고, 2010년 11월에는 제이컵 게드레이레키사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 대통령이 주요 20개국 정상회담, 즉 G20(Group of 20) 서울회의를 계기로 방한했다. 이러한 고위급 인사들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양국 간에는 다양한 협력 모멘텀이 조성되고 있다.

경제 통상관계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간의 교역은 1992년 12월 수교 이후 매년 증가하여 약 15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6년 이후에는 30억 달러대로 증가했고, 2014년에는 31억 달러(수출 14.76억 달러, 수입 16.24억 달러)를 기록했다. 한국은 광물 수입으로 인해 2005년과 2006년을 제외하고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교역에서 만성적인 무역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양국 간 경제구조의 상호 보완성이 크기 때문에 한국 기업의 남아프리카공화국 투자 진출 등을 통해 경제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풍부한 지하자원 보유국이자 아프리카 최대의 공업국으로, 중장기적 관점에서 경제·통상 협력관계가 발전 입법수도 케이프타운Cape Town을 주도州都로 하는 웨스턴케이프Western Cape 주에 약 1,800명, 그리고 아프리카의 주요 무역항이자 상공업도시 더반Durban이 있는 콰줄루나탈KwaZulu-Natal 주에 약 150명, 기타 도시에 5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한인회는 프리토리아와 요하네스버그 지역 남아프리카공화국 한인회, 케이프타운 한인회, 그리고 콰줄루나탈 한인회가 있다.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8년 8월 10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94년 5월에 북한의 수교 제의가 한 차례 있었으나,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정부는 북한 핵문제 미해결을 이유로 수교 제의를 거부했다. 이후 1998년 8월 비동맹운동(NAM, Non-Aligned Movement) 정상회의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하게 되면서, 비동맹의장국으로서 보편적 외교원칙에 따라 1998년 8월 10일 북한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2002년 3월 5일에 남아공에 북한상주공관이 개설되었다. 북한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간의 교역 규모는 2010년 기준 2억 2700만 달러 수준이다. 이 가운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북 수출액은 2억 2500만 달러에 이르고, 북한으로부터의 수입액은 150만 달러 정도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철광, 망간, 구리 등 광물자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수입품목은 와이어로프, 파이프, 가구 등이 주종을 이룬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1948년 남아공에서는 우익 국민당이 집권하면서 종래의 인종차별관행을 제도화한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실시됐다. 또한 1950년대에 유색인들의 의회 진출 금지, 피부색이 다른 민족들 간의 성관계에 대한 금지법 등과 같은 반민주 악법들도 시행되었다. 흑인들은 고용된 경우가 아니면 도시 지역에는 출입조차 허가되지 않았다. 그들이 출입했다고 해도 케이프타운이나 더반의 해변, 공원 내 벤치, 공중화장실 등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됐고, 남아공 내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를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감옥에 갇혀 있던 만델라의 영향력은 컸다. 그러나 남아공 정부는 변하지 않았다. 1961년 ‘그들만의 리그(백인들만의 국민투표)’에 의한 개헌이 이루어졌고 영국의 통치를 벗어나 대통령제 공화국이 수립된 것이다.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 Nelson Rolihlahla Mandela
남아공의 현대 정치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1918.7.18.~2013.12.5.)이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철폐된 후 처음으로 실시된 평등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서 백인정권의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에 맞선 투쟁을 이끌었던 인권운동가였다.

1918년 남아공 동남부 음베조에서 출생한 만델라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43년부터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각종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청년동맹(Youth League)을 결성했는데, 여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월터 시슬루(Walter Sisulu)와 넬슨 만델라 등 흑인 인권운동가들이었다. 넬슨 만델라는 1950년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 청년동맹의 의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었다.

1952년 넬슨 만델라는 흑인으로서 최초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부의장에 피선되었다. 1961년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 내에 군사조직 ‘움콘트 웨 시즈웨’(Umkhonto We Sizwe)를 창설하여 최고사령관에 취임했다. 무장 군사조직 ‘움콘트 웨 시즈웨’는 ‘국가의 창’(Spear of the Nation)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MK라는 약칭으로도 불렸다. 1964년 10월 사보타주 및 정부 전복 음모죄로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1963년에 웨스턴케이프Western Cape 주 케이프타운Cape Town 항구 인근에 있는 로벤 섬Robben Island 교도소에 수감되어 19년간 복역하였으며, 1982년에 케이프타운 교외의 폴스무어Pollsmoor 교도소로 이감되어 다시 8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1982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만델라 석방운동이 전개되었다. 1990년 2월에 출감한 넬슨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 부의장이 되어 1991년 9월에는 민족평화협정(National Peace Accord)에 서명했다. 협정은 폭력사태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며 평화적으로 문제해결을 도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넬슨 만델라는 백인정부와 협상하여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 공로로 1993년 데클레르크 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 4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모든 인종이 참가하는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여기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승리하면서 만델라는 대통령에 선출되어 다음 달 5월 10일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1999년 6월 음베키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정치 일선에서 은퇴했다.

넬슨 만델라는 1992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즉 유네스코(UNESC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의 국제평화상을 수상했고, 1993년에는 프레데리크 빌럼 데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 대통령과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1995년에는 영국 영예작위 훈장Honorary Member of the Order of Merit을 받았다. 또 영국의 글래스고 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 짐바브웨 대학교University of Zimbabwe, 미국의 하워드 대학교Howard University 등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6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전 세계 각지의 수많은 대학교로부터 수많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투쟁은 나의 인생』(The Struggle is My Life, 1961)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 1995)이 있다.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은 뉴욕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취미로 권투, 축구, 럭비, 육상 등 운동을 즐기며 정원 가꾸기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 부인 에벌린 은토코 마세Evelyn Ntoko Mase와는 종교적인 차이와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참여 문제 때문에 생긴 갈등으로 이혼했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1남 1녀가 있었다. 두 번째 부인 놈자모 위니프레드 마디키젤라Nomzamo Winnifred Madikizela-Mandela와는 아프리카민족회의 정책노선 차이와 부인의 일탈행위로 1996년 4월에 합의 이혼했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두 딸이 있다. 넬슨 만델라는 1998년 7월 18일 80회 생일에 그라사 마셸Graca Machel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1995년 7월과 2001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방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