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부모와 한마음이 되는 길 2 용서容恕

[이 책만은 꼭]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달라이 라마의 『용서』#}

선천 세상의 상극相克 섭리 속에서 삶을 영위해오고 있는 우리는 많은 실수와 잘못들을 저지르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인간의 몸과 마음에는 수많은 원寃과 한恨의 상처들이 남게 됩니다. 하지만 바야흐로 우주 계절변화의 시운은 봄여름의 상극시대를 마감하고 가을 우주의 상생相生문명이 열리는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상생을 인류 생활문화의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상생의 새 문화를 열고 천지부모와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아야 하고 더불어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명과 신명간의 잘못을 용서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진정으로 호생好生의 덕을 이루는 상생의 문화를 열어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용서容恕에 대한 깊은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너희들은 남 용서하기를 힘쓰라. 한량없는 덕이 있느니라. 원수를 풀어 은인과 같이 사랑하면 덕이 되어 복을 이루느니라.”(도전8:36) 하셨습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는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사는 궁극의 목적은 성통공완性通功完, 즉 우주의 조화주 삼신이 부여한 대광명의 본래 성품을 깨닫고 그 공덕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본성에 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의식과 집단무의식에 있는 기억들을 지워야 하는데 그 실천방법이 감사와 용서입니다. 감사와 용서를 생활화하여 천지부모님의 뜻을 이루는 큰 일꾼이 되길 기원합니다. (감사는 8월호 참조)

제로 상태로 돌아가자


이 책의 요지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제로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제로 상태에서는 어떤 생각도, 말도, 행동도, 기억도, 고정관념도, 믿음도,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호오포노포노’의 정의는 이랬다.

“호오포노포노Ho’oponopono는 우리 내부의 유독한 에너지를 방출해서 신성한 생각과 말, 업적, 행동이 효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과정이다. 간단히 말해 호오포노포노는 ‘바로잡다’ 혹은 ‘오류를 수정하다’를 뜻한다. 고대 하와이인들에 의하면 오류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들로 얼룩진 생각들에서 비롯된다. 호오포노포노는 불균형과 질병을 유발하는 이런 고통스러운 생각들, 즉 오류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방법이다. 한마디로 호오포노포노는 문제해결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우리 내면, 즉 마음속에서 이루어진다.”

심리치료사가 호오포노포노 치유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제일 먼저 밟아야 할 단계는 주체성을 가지고 그의 마음을 근원과 연결하는 일이다. 그 근원은 흔히 사랑 혹은 신神이라는 말로 불린다. 근원과 접속한 뒤 문제를 일으키는 내부의 잘못된 생각들을 바로잡아 달라고 사랑에 호소한다. 우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환자를 위해서. 이런 호소의 과정은 심리치료사가 참회하고 용서를 비는 과정이다.

호오포노포노 훈련은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정체성과 매순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재충전하는 과정을 가르친다. 이 훈련의 밑바탕에는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책임이다! 호오포노포노는 문제를 시련이 아닌 기회로 본다. 문제는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 재생된 것뿐이다. 우리는 문제를 사랑의 눈으로 보고 달리 행동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인생을 사는 두 가지 길: 기억이냐 영감이냐


기억記憶들이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때 나에겐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것들에 얽매인 채로 지내거나, 그것들을 변화시키고 풀어내 달라고 신성神性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내 마음을 최초의 제로zero 상태, 즉 공空의 상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재충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나는 신성이 나를 창조할 당시의 바로 그 상태, 곧 신성한 자아가 됩니다.
내 무의식은 제로 상태에 있을 때 시간도 공간도 죽음도 초월해서 무한해집니다. 기억이 지시를 내릴 때는 시간과 장소, 골칫거리들, 불확실성, 혼돈, 생각, 대처, 관리 등에 집착하게 됩니다. 기억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은 신성과의 연계는 물론이고 명료한 마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호오포노포노의 가장 큰 목표는 자아를 재충전해서 신성에서 비롯한 지혜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래의 리듬을 재구축했을 때 제로의 문이 열리고 영혼은 영감靈感으로 충만해집니다.

“인생을 사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기억으로 사느냐, 영감으로 사느냐. 기억은 쉼 없이 재생되는 오래된 프로그램입니다. 반면 영감은 신이 여러분에게 주는 메시지이죠. 여러분은 영감을 받으며 살고 싶을 겁니다. 신의 목소리를 듣고 영감을 얻는 유일한 길은 모든 기억을 청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은 정화淨化입니다.”

기억이 없고 정체성이 없는 제로 상태에서는 한계 또한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신성만 존재할 뿐, 신성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살면서 어쩌다가 무한한 상태에 도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흔히 ‘기억’이라 불리는 쓰레기더미 속에 파묻혀 삶을 보낸다.

“신성으로부터 나온 영감과 무의식 속에 축적된 기억. 전자는 새로운 것이고 후자는 묵은 것이죠. 제로는 당신과 신성이 거하는 곳이자, 부와 건강과 평화라는 모든 축복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기억은 사고다. 반면 영감은 허용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기억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지만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속에 신성의 메시지가 내려온다. 하지만 기억들이 움직이고 있다면(실제로 기억들은 거의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영감에 따라 행동하기는커녕 영감 자체를 아예 느끼지 못한다. 결국 신성의 말은 한마디도 수용되지 못한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소음 때문에 정작 그것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신성으로 우리에게 오는 영감과 달리 기억은 인류의 집단무의식 속의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내부에서 감지하는 순간 그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의 과제는 그 기억들을 모두 청소해서 영감이 흐를 수 있는 공空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회복의 문을 열어주는 용서


휴 렌 박사는 뭔가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밖’이 아니라 ‘안’에서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핵심은 전적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원망할 사람은 없다. 모든 게 내 책임이니까. 휴 렌 박사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정화 방법은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고맙습니다이다.

“호오포노포노를 행하면 신성이 고통스러운 생각을 중화하거나 정화합니다. 단지 그것들과 나를 연결하는 에너지를 중화하는 것이죠. 즉 호오포노포노의 첫 단계는 에너지의 정화입니다. 에너지를 정화하면 경이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에너지가 중화될 뿐 아니라 해방되면서 새로운 기초가 만들어집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공이라고 부릅니다.”

다음은 호오포노포노의 창시자인 모르나의 기도문이다. (모르나 날라마크 시메오나 Morrnah Nalamaku Simeona, 1913~1992, 하와이의 인간문화재 치료사)

아버지와 어머니, 자식이 하나로 존재하는 신성한 창조주여…
만일 내가, 내 가족이, 내 피붙이가, 내 조상이 당신과 당신 가족, 피붙이, 조상에게 태초부터 현재까지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다면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모든 암울한 기억과 장애물, 에너지, 불안들을 씻어내고, 정화하고, 해방하여 이 원치 않는 에너지들을 순결한 빛으로 변형하소서…. 이제 됐습니다.

용서를 구함으로써 치유의 길을 튼다는 것이 모르나와 휴 렌 박사의 생각이었다. 우리의 행복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결핍’이었다. 용서는 회복의 문을 열어주었다.

『마음의 힘』 중에서



원망을 품는 일은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스스로의 마음으로부터 고립될 위험을 무릅쓰는 셈이다. 증오하는 느낌은 마음속 사랑과 지혜가 자유롭게 흐르지 못하게 한다. 내면에 있는 무궁무진한 사랑의 원천에 접속하면 상대를 용서하고 방해물을 허물어 다시 사랑과 연민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용서하지 않으면 원한에 속박되어 안달하게 된다.

앙심은 과거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기억보다 더 힘들게 우리를 몰아친다. 적의는 물컵에 든 독을 자신의 목구멍에 들이부으며 그것으로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나 살면서 여러 차례 심한 상처를 입고, 소외당하고, 배신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심지어 누군가가 특별히 용서를 구할 때도 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이처럼 용서는 어려운 일이다.

용서는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나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다른 사람이 한 짓을 잊지는 않았으나 상황이 달랐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을 미래지향적인 희망으로 바꿔 더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용서는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보는 것이다. 자동차의 앞 유리가 백미러보다 훨씬 더 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용서는 평생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문제다. 남은 생애 동안 누군가를 미워해야 한다면 정말로 다시는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용서가 그토록 중요하다. 우리는 용서할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상대를 내게 피해를 준 사람으로 바라보는 대신 내가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

용서는 다른 누군가를 위한 행동이 아니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자신의 행복과 신체 건강을 위한 일이다. 사랑과 지혜가 다시 자유롭게 흐를 수 있도록 마음을 오가는 모든 길에서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과정이다. 진실로 누군가를 용서하면 원한에 가득 차 있던 감정들이 무거운 짐처럼 어깨에서 스르르 떨어져나갈 것이다. 내면에서 사랑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맑은 상태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마시 시모프 (Marci Shimoff,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이유 없이 행복하라》의 저자)
용서는 누군가에 행동을 눈감아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를 정확히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용서는 그저 우리가 붙들고 있는 에너지 덩어리, 우리가 지고 있는 그 원망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마이클 벡위스 (Micheal Bernard Beckwith, 아가페국제영혼센타 설립자)
누군가를 용서하면 영혼에서 독소가 풀려날 뿐만 아니라 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빛으로 가득한 존재의 차원을 발견하게 된다. 그 세계를 설명할 적절한 말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용서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