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인의 표상 진표眞表의 미륵불 친견기

[도전속인물탐구]
진표는 나와 큰 인연(大緣)이 있느니라 (도전 2편 66장 3절)



미륵불의 동방 조선 강세의 길을 연 진표 대성사
27세 되는 경자(庚子, 760)년 신라 경덕왕 19년에 전북 부안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들어가 미륵불상 앞에서 일심으로 계법을 구하니라. 그러나 3년의 세월이 흘러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자 죽을 결심으로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그 순간 번갯빛처럼 나타난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살며시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놓고 사라지더라. 이에 큰 용기를 얻어 서원을 세우고 21일을 기약하여 생사를 걸고 더욱 분발하니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온몸을 돌로 두들기며 간절히 참회하매 3일 만에 손과 팔이 부러져 떨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거늘 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 진표를 가호하니 곧 회복되니라.

21일 공부를 마치던 날 천안(天眼)이 열리어 미륵불께서 수많은 도솔천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대광명 속에서 오시는 모습을 보니라. 미륵불께서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시기를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戒)를 구하다니.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내가 한 손가락을 튕겨 수미산(須彌山)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네 마음은 불퇴전(不退轉)이로다.” 하고 찬탄하시니라. 이때 미륵불께서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진표에게 내려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것으로써 법을 세상에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으로 삼으라. 이 뒤에 너는 이 몸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도솔천에 태어나리라.” 하시고 하늘로 사라지시니라. (도전 1편 7장 5절~14절)

백척간두에서 갱진일보


딱! 선천 개벽 이전의 적요를 깨버리는 듯한 일성.
딱! 새로운 생명이 낡은 지난 삶을 던져버리는 몸짓.
딱! 깨달음을 위해 기쁨도 번뇌도 성냄도 욕심냄도 모두 내려놓았다.
동굴 내부는 처절한 구도의 울림 소리가 거셌다. 산새도 부스럭거리기가 미안한 봄날의 새벽. 피투성이의 한 사내가 죽음의 경계를 넘으려 하고 있다. 주변엔 깨어진 돌들이 널려 있고, 새벽 안개에 선명한 피의 색이 더욱 붉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를 지켜보는 수많은 살아 있는 존재들의 숨죽임.
마왕 파순이 나타나 백천 가지 마상魔相으로 수행을 방해하고 시험해 왔었다.

百尺竿頭(백천간두) 進一步(진일보) 十方世界現全身(시방세계현전신)
100척의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리라.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그 모습을 보일 터.
딱! 미륵님 뵈어지이다. 어서 오시옵소서.

아련한 가운데 문득 따뜻하고 조화로운 느낌이 몸속에서 솟아올라 마치 따뜻한 물에 머리를 감고 몸을 달구고 있는 듯했다. 더 이상 끝이 없이 까마득하게 높은 그곳, 깨달음의 극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시방세계와 내가 온전하게 한몸이 되어 현현하는 경지.

천지자연과 내가, 우주와 내가, 우주 광명과 내가 일체가 되는 경지에 다다른 것인가. 길상조吉祥鳥(봉황이라는 상서로운 새)가 울며 일러주었다.

“미륵님이 오셨다.”

과연 도솔천 천주이신 미륵불이 위의를 갖추어 내려오고 있었다. 미륵불은 용안이 백옥처럼 희고 두루 원만하시며 천안天眼이 샛별과 같이 반짝였다. 인경처럼 맑고 크신 옥음으로

“장하도다. 대장부여. 계를 구함이 이렇듯 정성스럽구나. 수미산은 손으로도 쳐 물리칠 수 있을지라도 너의 마음만은 끝내 물러나게 하지 못하리로다.”

며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두번, 세번 찬탄해주셨다. 온몸과 마음이 화열和悅하였고, 맑고 깨끗해지고 쾌락이 가득 찼고 일체의 공덕을 이루며 곧 천안이 열리었다. 마침내 평생의 소원, 미륵불을 친견하였다.

미륵불께서는 삼법의三法衣와 와발瓦鉢
(주1)
을 내어주고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내려주었다.
(주2)
그러면서 “그 중 제8 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新得妙戒)를 비유한 것이요. 제9 간자
(주3)
는 구족계
(주4)
를 더 얻는 것(增得具戒)을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手指骨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것인데, 모든 번뇌를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으로써 세상에 법을 전하여 사람을 구제하는 뗏목으로 삼도록 하라.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의 몸을 받아 뒤에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면서 찬란한 빛을 허공에 뿌리며 도솔 천중을 거느리고 하늘로 사라지셨다.

그러면서 미륵불께서는 사내의 법명을 내려주었다. 바로 진리의 표상이라는 뜻의 ‘진표眞表’이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 구도자의 참된 표상을 보여주어 도솔천 천주이신 미륵불을 크게 감동시켜 친견하였고, 미륵불 오시는 길을 닦은 도승 진표.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종조가 되는 바로 그 분이다. 진표는 곧 미륵불에게서 받은 천의天衣와 천발天鉢을 가지고 산을 내려왔다. 풀과 나무가 그를 위하여 밑으로 드리워 길을 덮어 골짜기의 높고 낮은 차별이 없어졌고, 날짐승 길짐승이 달려와 그의 걸음 앞에 엎드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영접하였고, 항상 두 마리의 범이 좌우를 따라다니며 옹호했다.

출가와 구도의 모습
(주5)


오직 미륵불을 뵙고, 오시는 길을 닦기 위한 삶을 산 진표는 신라 경덕왕景德王(742~765) 때 김제군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지금의 김제시 순동 대리마을(한 우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으로, 성은 정씨井氏이다.

진표는 날쌔고 민첩하고 활을 잘 쏘았고, 사색적이면서도 한번 결심한 것은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적극성과 결단력을 갖추고 있었다. 진표가 출가하게 된 계기는 개구리 때문이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간 진표가 논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반찬을 만들어 먹을 생각에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두었다. 그리고 사냥을 하다가 개구리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다. 이듬해 봄에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물속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듣고 보니, 그때 개구리 30마리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이에 탄식하며 책망하길 “괴롭도다. 어찌 입과 배가 저같이 꿰어 해를 넘기며 괴로움을 받았는가.” 하며 버들가지를 끊어 개구리를 놓아주고 출가의 뜻을 품게 되었다. 이에 아버지의 허락을 얻고 금산사의 숭제崇濟 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게 되었다.

진표의 스승인 숭제 법사는 입당 구도승으로 중국 정토종의 고승인 선도善道의 제자로, 스스로 서원하여 오대산(일명 청량산淸凉山으로 중국 산시성 오대현에 위치한 성산)에 들어가 반야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에게 오계五戒를 받고, 백제 미륵신앙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는 금산사에 주석駐錫하고 있었다. 백제의 미륵신앙은 국토적인 구현을 그 이상으로 하여 현실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숭제 법사는 진표에게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점찰경] 2권을 주면서, 미륵불과 지장보살의 계법을 구하여 널리 전하도록 하였다. 그 방법은 참회뿐이라는 말과 함께.

[공양차제법]은 밀교密敎의 의궤를 기록한 경전으로, 밀교는 진언眞言(주문, Mantra) 수행을 한다. 또한 스승이 자신의 체험을 제자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해주는 통과의례인 ‘관정灌頂’의식을 중시하는데, 물을 길어다 머리에 부음으로써 온 세상의 장악을 의미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점찰경]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僞經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경은 중국에서 새로 만든 경론만을 지목하고, 인도에서 전해온 것은 진경眞經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위경이라는 설을 강하게 부정한다. 이경은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고, 이 경에 의지해서 참회수행을 하고 목적하는 바를 이룬 것이 허망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점찰경]의 설주說主는 지장보살로 참회수행을 가르치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지장보살은 “만일 악한 업이 많이 두텁다면 곧 선정과 지혜를 배울 것이 아니라 먼저 참회의 법을 닦아야만 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래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진표는 곧 일심으로 참회수행에 들어가게 된다.

신라 경덕왕 19년(760년)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장不思議房丈(세상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로 불가사의와 같은 뜻)에 들어갔다. 이곳은 현재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의상봉(509m) 기슭에 위치한 곳으로 변산 최고봉으로 마천대라고 한다. 이곳은 기암절벽들이 만폭병풍滿幅屛風을 이루는 곳으로,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바위 절벽에 있는 밧줄을 이용해야 할 정도로 무척 험하다. 이때 진표는 3.7일을 정하여 1000일을 기간으로 용맹정진하였다. 하지만 이 기간이 다 되어도 수기授記
(주6)
를 얻지 못하자 절망하여 스스로 죽을 결심을 하고 벼랑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靑衣童子: 진표의 뜻은 미륵불에게만 있었으므로 미륵동자로 봐야 한다)가 나타나 진표를 받들어 절벽 위에 올려놓고 아직 법력이 약하기 때문에 감응하지 않는다고 충고해 주었다. 이에 대분심大憤心과 용기를 얻은 진표는 3.7일 수도를 기약하고,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생사를 건 망신참법亡身懺法 수행을 감행한다. 오체五體(머리와 두 팔, 두 다리 곧 온몸)를 바위에 던지듯 절을 하여 참회 수행하니 무릎과 팔꿈치가 깨어지고, 피가 빗물처럼 바위에 흘렀다. 태산이 무너질 듯이 이리저리 땅에 몸을 구르고, 미륵불을 향해 호곡하며 주야로 계속 이어서 하길 죽을 때까지를 기한으로 했다. 7일째 되는 날 밤. 지장보살이 내려와 몸을 가호해 주니 곧 회복되었고, 이에 지장보살은 가사와 바리때를 전하고 직접 정계淨戒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진표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본래의 뜻이 미륵불에 있었기에 그는 능가산 영산사靈山寺로 장소를 옮겼다. “나무를 타고 오르는 것이 기특할 것도 없고 /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아 버리는 것이 장부이다”(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 /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 송宋나라 선승 야보冶父 도천道川의 금강경 주석 중)라는 말처럼 그는 크게 죽기로 했다.

미륵불 친견을 위한 최후의 격전지가 될 영산사는 어디인가? 이에 대해서 [진표전간]에서는 ‘영산사’(일명 변산 또는 능가산)로 기록되어 있다. 즉 지장보살을 친견한 부사의방장을 떠나 내내 같은 변산지역 중 지금의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개암동開巖洞에 위치한 개암사
(주7)
뒤편에 자리한 우금바위(우진암, 위금암, 우금암, 울금바위)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곳은 변산 꼭대기에 있고 바위가 몸은 둥글면서 높고 크고, 바라보면 눈빛이 나며, 바위 밑에 3개의 굴이 있는데 굴마다 중이 살고 있으며, 바위 위에는 평탄하여 올라가 바라볼 수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이 있다. 실제 이곳을 가보면 고즈넉하고 아늑하였고,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평안함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수행처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진안에 있는 마이산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원효대사가 수도했다고 전해진다. 원효굴은 크기가 암자가 들어갈 정도로 컸고, 안쪽에는 한 사람이 하루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의 물이 흘러나왔다. 진표의 수행처를 보면 원효나 의상처럼 우리나라 불교의 고승들이 수행했던 장소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바로 이곳에서 진표는 처음과 같이 치열하게 수행하며 온갖 마魔를 물리치며 마침내 미륵불을 친견하게 되었다.

진표 대성사와 그 전법 제자들


진표 대성사는 미륵불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알리면서 신앙혁명을 이끌었다. 이에 십선업十善業을 강조하였는데, “열 가지 일이 선도 되 고 열 가지 일이 악도 된다. 그 열 가지 일이 무엇인가. 즉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업과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과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이다. 살생(산 목숨을 죽이지 않는다), 투도(偸盜: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는다), 사음(邪淫:간음을 하지 않는다)은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이요. 망어(妄語: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양설(兩舌:이간질을 하지 않는다), 악구(惡口:악한 말을 하지 않는다), 기어(綺語: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이요, 탐진치貪瞋癡(욕심 성냄 어리석음)는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이다”라고 했다. 진표 대성사의 가르침은 간단했다. 이 십선업을 잘 실천하여 참 마음을 갖고 참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라는 가르침이었다. 이후 용화 3회 설법을 상징해서 금산사 미륵전, 금강산 발연사를 창건하였다. 발연사에서 7년 동안 주석하면서 포교활동을 계속하였는데, 포교의 범위는 인간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도 미쳤다.

이후 발연사를 떠난 진표대성사는 미륵불을 친견했던 변산으로 갔다. 그후 고향에 찾아가 아버지를 뵙고, 도반으로 추정되는 대덕 진문眞門의 방에 가 머물기도 했다. 이 무렵 충청도 출신으로 보이는 영심永深을 비롯한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찾아와 도를 구하였다. 그들은 “우리들은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을 주시기 바랍니다.”

진표는 아무 답도 내려주지 않았다. 말 없는 가운데 가르침이 내려졌다. 바로 참회! 미륵불의 도를 닦는 이는 마땅히 먼저 참회를 하여야 했다. 이에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 위로 올라가 거꾸로 땅에 떨어지면서 맹렬하게 참회하였다. 물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참회했는지는 더 이상 알 수 없으나, 진표 대성사가 행한 망신참법이 그 전범이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이 세 사람의 참법 수행결과를 인가하여, 미륵불이 교법을 전수해준 것과 같이, 가사와 바리때, [공양차제법]1권, [점찰경]2권 그리고 간자 189개를 전수하였다. 그러면서 속리산으로 돌아가, 거기에 정사精舍(절)를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서 널리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까지 전하도록 하라는 부촉咐囑(부탁하여 맡김) 말씀을 내렸다. 이를 보면 진표대성사가 용화 3회 도장 건설을 위해 얼마나 용의주도했는지를 알 수 있다. 금산사 미륵전을 짓고, 포교 대장정을 떠나면서, 속리산에 길상초가 난 곳을 표시해 두었고, 금강산에서는 발연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개,중창의 과정을 거친 후였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 용화도장 건립 사명은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영심 등은 그 말을 받아 속리산에 길상사(현 법주사) 창건하고 미륵신앙을 널리 펼쳐 나갔다. 영심은 후에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왕자로 출가한 심지心地에게 도를 전하였다. 심지는 15세에 출가하여 중악中岳(현 대구 팔공산)에서 수도하다 속리산의 영심이 도를 펼친다는 소식을 듣고, 망신참법 수행을 하여 법을 이었다. 후에 팔공산 동화사桐華寺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후 신라 말년 고승 석충釋沖은 진표대성사의 가사 한벌과 간자 189개를 고려태조 왕건에게 바쳤고, 이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친견할 때까지 대대로 내려왔다고 한다.
(주8)


이후 진표대성사는 아버지를 모시고 다시 발연사에 가서 도업을 닦으며 효도를 다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전통적인 불가의 가르침과 다르게, 몇몇 선가의 고승들이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요한 덕목으로 인정하는 사례(일연, 동산, 진묵대사)는 있었지만, 아예 아버지를 절집으로 모시고 효도를 다한 진표의 탈 불교, 초불교적인 모습은 우리 본래의 신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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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진표대성사는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열반에 드니 그 해는 알 수 없었다. 제자들은 대성사의 유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지자 흙으로 덮어 묻어서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 무덤에 푸른 소나무가 바로 났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말라죽고 다시 나무 하나가 났는데, 뿌리는 하나이나 나무가 쌍으로 서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 법을 받은 제자들은 산문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그 가르침은 지금도 미륵불의 하생을 희구하는 중생들에게 면면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미륵신앙으로 가는 놋다리, 지장신앙

진표율사는 미륵불을 친견하기 전에도 혹독한 참회수행을 통해 지장보살로부터 정계淨戒를 받고, 의발을 전수받았다. 한국의 지장신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진표인 것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 그렇다면 지장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는 진표율사의 생애를 조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장地藏은 사찰에서 지장전의 주불主佛로 있으며 다른 보살들이 관을 쓰고 있는데 반해 늘 파르라니 깍은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지장은 인도 고래의 프리비티Prithvi, 이른바 대지大地의 덕을 의인화한 바라문교의 지모신을 불교가 수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지장의 의미는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하는 것처럼 땅도 만물을 화육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보살로 항상 대지와 함께 비유되어 왔다.

지장보살의 특징은 고통받는 중생을 교화하는 대비大悲의 보살이다. 그 이유는 지장보살의 서원이 지옥의 중생을 교화하려는 데 있다는 점이다. 즉 육도六道(불가에서 중생의 업인에 따라 윤회하는 길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로 나눈 것) 윤회하는 중생을 교화하는데, 지옥에 있는 중생들까지 모두 교화한 뒤에 자신은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대비원大悲願의 보살이기 때문이다. [지장보살본원경]에서는 “나는 이제 미래세가 다하고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에 이 죄로 고통받는 육도 중생을 위해 널리 방편을 설해서 모두 해탈케 한 후 나 자신도 비로소 불도를 이루겠다”고 서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대해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이 사람은 이미 동체대비를 얻었으므로, 대지가 초목을 키우듯 모든 중생의 선근善根을 다 키우고 자라게 한다. 다라니로써 모든 공덕을 간직하고, 큰 보물창고(大寶藏)에 진귀한 보물이 끝없듯이 모든 중생에게 끝없이 은혜를 베푼다. 이러한 두 가지 뜻을 따서 그의 이름을 ‘지장地藏’이라 한다”라고 했다. 또한 지장보살의 특징은 항상 대지와 함께 비유되고 남방에서 온 보살이며 도솔천 내원궁에 있다가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온다고 전해진다.

이 지장보살을 소개하는 경전 중 하나가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이다. 바로 숭제법사가 진표에게 전해준 바로 그 경전이다. [지장보살본원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말법시대의 중생을 구원하여 장차 미륵불을 만나뵙고 수기를 받을 수 있게 하라는 부촉을 받은 지장보살은 반드시 이루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즉 미륵불께서 사바세계에 출세할 때까지 말법 중생들을 제도하고 미륵불이 출세할 때 중생들로 하여금 조우할 수 있는, 미륵으로 가는 놋다리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게 된다.

미륵신앙彌勒信仰 그렇다면 진표대성사가 평생 불변심으로 뵈려 했던 미륵부처님, 미륵신앙은 어떤 것일까? 미륵은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Maitreya를 음역한 것이다. 이는 자慈maitri를 갖춘 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미륵은 자씨慈氏, 자존慈尊으로 의역된다. 흔히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데 이는 미륵불(慈)과 지장보살(悲)의 서원과 상통하는 대목이다. 미륵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미래불로서 희망을 상징하고 있으며, 미륵신앙의 기본 경전은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의 ‘미륵 삼부경’이 있다.

미륵상생경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미륵상생 신앙은 사후에 미륵이 천상의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여 도솔천의 복락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종의 정토淨土신앙이다. 그러기에 계율을 중시할 수밖에 없고, 진표를 율사律師라고 부르는 이유가 될 것이다. 만약 계율을 범하고 많은 죄업을 지었다면 미륵 앞에서 지성으로 참회해야 하고, 십선법을 닦으며 미륵부처님 앞에 태어나기를 서원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점찰경]을 통한 망신참법의 수행과정이다. 그런데 이 미륵상생 신앙의 최종 도달지점은 도솔천 상생이 아니다. 도솔천 상생은 미래에 미륵님을 따라 하생하여 지상천국인 용화세계龍華世界의 복락을 함께 누리자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미륵불의 본원本願은 개인이 포함된 국가단위, 국가차원의 중생을 구제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불국토佛國土 건설 사상이 나온다.

미륵하생경 미륵하생 신앙은 도솔천 내원궁 마니전摩尼殿(如意殿)에 머물고 있는 미륵부처님을 따라 하생下生하여 미륵의 용화 3회 설법 도량에 참석하고, 그 지상의 이상세계인 용화세계의 복락을 함께 하고자 하는 정토신앙이다. 즉 미륵 삼부경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그 내용은 수미쌍관 하듯이 서로를 전제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신앙체계라고 할 수 있다. 미륵부처가 하생하게 될 세상은 국토가 장엄莊嚴(아름답게 장식되어 화려하고 엄숙함)된 세계이다. 미륵불의 공덕으로 이미 이상세계를 이루고 있는, 이 세계를 통치하는 지도자는 전륜성왕 양거왕穰佉王(샹커, 양커)이다. 미륵하생신앙의 근본은 석가모니에 의해 구제받지 못한 중생이 지상에서 열리는 용화 3회 설법 도량에 참석하여 구제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미륵부처님이 하생할 당시 지상과 용화세계의 장엄은 미륵 천상세계인 도솔천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륵신앙에서는 천상의 정토인 도솔천이 지상의 정토인 용화세계와 같은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런 신앙이 시대에 따라, 사회적 배경과 신앙 계층에 따라 어느 한 쪽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상생신앙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계율 준수를, 하생신앙을 강조하게 되면 미륵불에 대한 경배를 강조하게 된다. 하지만 미륵신앙의 포괄적인 결론은 모두 미륵불이 하생할 때 용화 3회 도장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용화 3회 도장 -전라도 김제 금산사, 충청도 법주사, 강원도 금강산 발연사
*이 뒤에 진표는 미륵불의 삼회설법의 구원 정신을 받들어 모악산 금산사를 제1도장, 금강산 발연사를 제2도장, 속리산 길상사를 제3도장으로 정하고 용화 도장을 열어 (도전 1편 7장 18절)
*중 진표(眞表)가 석가모니의 당래불(當來佛) 찬탄설게(讚歎說偈)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도전 2편 30장 13절)


모악산母岳山 비옥한 만경평야의 너른 들녘 김제의 동남쪽에는 포근한 산세를 지닌 모악산이 있다. 모악산은 그 상봉에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의 바위가 있어서 ‘모악’(엄뫼)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모악산은 또한 금산金山이라고도 한다. 모악산 자락을 흘러내린 물줄기는 주변의 곡창지를 적셔 주는 젖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에 금산사金山寺가 있다. 금산사는 진표율사가 출가한 곳이기도 하면서, 미륵불 친견 후 용화 3도량을 세우는 미륵신앙 대중화를 위한 첫 출발점이기도 하다.

금산사金山寺 미륵불을 친견한 진표율사는 금산사에 머물며 해마다 법단을 베풀고 널리 교화를 펼치면서 금산사에 미륵전彌勒殿을 짓게 된다. 이에 대해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 조에는 “모악산 남쪽에 있는 금산사는 본래 그 터가 용이 살던 못으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신라 때 조사(진표)가 만석의 소금으로 메워 용을 쫓아내고 터를 닦아 그 자리에 대전(大殿:지금의 미륵전)을 세웠다고 한다. 대전 네 모퉁이 뜰아래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고 하여 금산사 터가 못과 관련되어 있음을 전한다.

또한 1199년 금강산 발연사 주지인 영잠瑩岑이 지은 [진표율사진신장골탑비명 眞表律師眞身藏骨塔碑銘](삼국유사 관동풍악발연수석기는 이것을 초략한 것)에서는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세우고자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홀연히 용왕이 나타나 옥가사를 바치고 8만 권속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여 금산사로 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못 되어 절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또한 미륵불이 다시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진표에게 계법을 주니 진표율사는 미륵장륙상을 만들었고, 미륵부처님이 계법을 주는 광경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고 한다. 불상은 갑진년 764년에 만들어 병오년 766년에 금당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미륵불과 좌우 보처불(그중 남쪽 보처불은 33천 내원궁 법륜보살이다)이 모셔져 있는 미륵전은 국보 제62호로 현재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1635년 수문 대사가 재건했다.

철수미좌鐵須彌座 미륵불상은 일반적인 석련대가 아닌 밑 없는 시루(甑)위에 모셔져 있는데 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륵불을 친견한 진표 대성사는 장차 미륵불께서 용화세계를 여실 때 우리 강토에 강세해 주실 것과 누천년 후 인류에 닥칠 대환란의 개벽시대에 자신을 큰 일꾼으로 써 주실 것을 지극 정성으로 기원했다. 바로 이 때문에 미륵님이 다시 성령으로 감응해 주셨고, 그때 당신의 모습 그대로 불상을 건립하라는 신교를 내려주셨다. 이에 진표 대성사는 연못이 있는 이 자리에 흙을 메우려 했으나 잘 메워지지 않자, 숯으로 연못을 메우라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에 도술로 인근 마을에 안질을 퍼뜨린 후, 그 연못에 숯을 한 지게씩 져다 붓고 그 물에 눈을 씻으면 병이 낫는다고 소문을 내어 많은 이들의 병을 치유해줌과 함께 그들의 정성도 함께 모았다. 하지만 중심부에 연꽃을 조각한 연화대蓮花臺(미륵전 앞에 있는 석련대)를 세워 불상을 건립하려 하였으나, 그 연화대가 하룻밤 사이에 20미터나 넘게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밑 없는 시루를 걸고 그 위에 미륵금상을 조성하라’는 명을 받게 되어 밑 없는 시루를 놓고 그 위에 나무를 우물 정井자로 받친 후 미륵상을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미륵불상 아래에는 큰 철수미좌鐵須彌座(철로 만들어 받친 좌대), 즉 시루를 발견할 수 있고, 바닥 전체가 우물마루(‘井’자 모양으로 짠 마루)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륵전彌勒殿 미륵전은 외관은 3층이지만 내부는 전체가 하나로 터져 있다(총 높이 18.91m, 측면 15.45m). 미륵전에는 ‘大慈寶殿’(대자보전, 1층에 행서체로), ‘龍華之會’(용화지회, 2층에 예서체로), ‘彌勒殿’(미륵전, 3층에 해서체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모두 미륵신앙의 도량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미륵전은 일명 용화전龍華殿, 산호전山呼殿 또는 장육전丈六殿이라고 한다. 특히 2층 용화지회의 ‘지’ 자가 읽기가 까다로워 ‘지之’가 아니고 용화 3회 설법이기에 ‘삼三’으로 읽어야 한다는 이유 있는 문제제기가 있기도 하다.

길상사吉祥寺 서기 750년 경덕왕 10년 33세가 되는 5월 1일 미륵전에 미륵불상을 봉안한 진표 대성사는 2년 후 금산사를 떠나 북으로 만행을 떠나게 된다. 가던 도중 소달구지를 끌고 가던 소가 진표율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자 그 주인이 진표에게 귀의하기도 했으며, 속리산 골짜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표시해 두어 이후 전법제자인 영심에 부촉 말씀을 내려 속리산 길상사(현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법주사)를 창건하게 했다.

법주사法住寺 법주사는 진표의 제자 영심의 창건 혹은 중창 이래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8차례 중수를 거쳐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되었다. 법주사의 중심은 현재 청동대불자리에 있던 ‘용화보전’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용화보전은 2층으로 되어 있고, 크기는 35칸으로 대웅전 28칸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고 한다. 그 전각 안에는 금색의 장륙상丈六像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1872년 고종 9년 경복궁 중건 때 당백전 주조 명목으로 불상을 압수당하면서 용화보전은 헐리게 되었다. 옛터에는 당시의 초석과 미륵 삼존불 좌대 3기가 남아 있다. 이 터에는 1964년 콘크리트로 만든 미륵불 입상이 조성되었고, 1989년에 33m의 청동 미륵대불로 다시 점안되었다. 특이하게도 이 미륵대불 앞에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보물 1417호)이 있는데, 뜨거운 향불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모습이다. 이는 진표대성사나 영심 등이 미륵님을 친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미륵신앙의 표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발연사鉢淵寺 발연사는 현재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용강리 금강산의 동쪽 미륵봉에 있었던 절이다. 발연암, 발연수鉢淵藪라고도 한다. 미륵봉 동쪽의 험준한 계곡 아래 발연鉢淵이라는 못이 있는데, 그 주위의 바위모양이 스님들의 바리때(발우鉢盂)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발연사’라는 절 이름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그 외에도 금강산 서쪽에 장안사(773년 혜공왕 8년 중수), 남쪽에 화암사禾巖寺(769년 혜공왕 5년 창건 당시 이름은 금강산 화엄사)를 두어, 금강산을 중심으로 미륵정토를 이룩하려고 했으며 더 나아가 금산사, 발연사, 그리고 길상사(법주사)를 통해 한반도를 중심으로 지구촌에 용화 3회 도량을 건설하려고 했다. 이로써 금산사, 법주사, 발연사의 용화 3회 도장이 완성됐다. 창건은 법주사가 늦으나 금강산으로 가면서 이미 절터를 잡아놓았기 때문에 법주사를 용화 2회 도장, 발연사를 용화 3회 도장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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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전, 『증산도의 진리』, 상생출판 2014
안경전, 『관통증산도 1』, 대원출판 2000
노종상, 진표, 『미륵 오시는 길을 닦다』, 상생출판 2014
최종례, 『미륵의 나라』, 우리출판사 2006
일연 지음, 이민수 옮김,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1998
일연, 고운기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2』, 현암사 2002
이종익, 무관역, 『미륵경전』, 민족사 1996
김남윤 등, 『금산사』, 대원사 2002

주1.
삼법의는 곧 스님들이 입는 가사를 가리켰다. 와발은 비구가 걸식할 때 쓰는 발우의 일종으로 진흙으로 만들었으므로 와발이라고 했다. 이 사건은 바로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전등법맥傳燈法脈을 상징한다. 즉 미륵불의 도통, 종통 맥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또한 미륵불이 진표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면서 계법을 전한 것은 밀교의 전법의식인 일종의 ‘관정’이다. 밀교에서는 물을 정수리에 부으면서 행하는 의식이지만, 이 사건에서는 미륵불이 직접 감응하여 전법을 행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의식과는 조금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2.
점찰경은 본래 이름은 [점찰선악업보경]으로 제목 그대로 점을 쳐서 선악의 업보를 알아보는 방편을 전한 경이다. 수행자는 자서수계를 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선악의 업을 먼저 점쳐보고 그 악업을 참회하여 제거한 후 계를 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참회불교이다. 이 참회법은 게으름을 피우거나 그만두는 일이 없어야 하므로 이 가르침에 따라 진표는 수행하였고, 그 궁극에 망신참법 수행이 있었다. 증과간자는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은혜를 상징하는 징표로 ‘증과證果’란 수행의 결과로 얻는 과보를 말하고 간자簡子는 작은 손가락 크기로 만든 점대를 말한다. 간자에 점괘의 글이 적혀 있고, 진표는 미륵불의 손가락뼈 즉 육신을 받은 것이다.

주3.
제8,9간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유식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유식사상은 불교 교리사에 있어 정통 사상적 지위를 점유할 뿐 아니라, 인도 불교 교단사에 있어서도 마지막으로 성황을 이루었던 사상으로 대승불교에서 가장 정밀하고 종합적인 교학체계로 알려져 있다. 교단사적으로는 유식설을 교의로 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는 반야 공空을 추구하는 중관파中觀派와 함께 대승불교 2대 조류를 이루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으로 우리는 생명의 근원인 마음(一心)을 말한다. 마음에는 유무형의 세계를 파악하는 식識 작용이 있는데 이를 체계적으로 밝힌 게 유식학으로 모든 존재는 마음의 작용인 식(앎)에 의해서 나타나는 가상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식에서 가장 먼저 육체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5식(眼耳鼻舌身)이 있고 이 5식을 통일하는 주체가 의식意識인 제6식이다. 이 제6식의 뿌리가 되는 근원적인 자아인식, 강력한 자기 통일의식을 제7식 말라식末那識(manas)라 하고, 더 나아가면 인간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심층의식으로서, 모든 표상을 낳는 근본식이자 모든 체험과 기억의 종자를 저장하는 식인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이에는 저장, 집착, 무몰無沒이란 뜻이 있어 무몰식이나 장식藏識이라 한다)이 있다. 아뢰야식을 넘어 궁극의 경계로 들어가면 우주의 절대 순수의식인 아마라식阿摩羅識(무구無垢, 청정淸淨이란 뜻이 있다)에 이르게 된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제8식을 거쳐 제9식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인데 진표가 미륵불에게 받는 제8, 9간자는 유식학의 제8, 9식과 다름이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유식학은 미륵경을 연구하여 법상종 신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주4.
구족계具足戒는 승려가 지켜야 할 계를 말하는데 일체 행위에 청정을 약속하는 것으로 구족(갖추어 족함)이라 한다. 점찰경에 보면 지장보살이 “삼세과보선악차별의 모습은 189종이 있다. 8은 받고자 하는 미묘한 계율을 얻는 것이다(受得妙戒). 9는 받은 계율을 갖추는 것이다(受得具戒).”고 했다.

주5.
진표대성사에 대한 전기는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권4 제5 [진표전간:진표가 간자를 전하다(전수받다)]와 [관동풍악발연수석기:관동 풍악산(금강산)의 발연사 비석의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남행월일기]가 있다. 중국기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송나라 찬영(930~1001)이 송 단공端拱(988~989) 원년에 찬술한 송고승전 권 제14 [명률편] 제4-1 [당백제국금산사진표전]이 전한다. 이에 이 3종의 기술을 적절히 융합하여 글을 전개하였고, 진표가 미륵불을 친견한 장소는 [진표전간]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주6.
사람은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어 발원하고 수행만 하면 부처가 될 수는 있지만, 부처가 되고 싶다고 아무나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부처가 된다는 수기授記를 받아야 한다. 수기란 아무개가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 또는 보증한다는 뜻으로, 기별記別이라고도 한다. 수기를 주는 쪽에서는 授記가 되고 받는 쪽에서는 受記가 된다.

주7.
“진표율사와 진묵대사가 변산에서 공부했고 상제님께서도 변산 개암사를 다니셨으니 우리도 도통하려면 변산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하며 변산으로 향하니라. (도전 11편 420장 6절)

주8.
삼국유사 기록을 통해 본 진표대성사의 전법과정을 보면 호남 출신의 스승은 충청출신 제자를 키우고, 그는 다시 영남출신의 제자를 키운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세 개의 장을 할애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전라도의 금산사, 충청도의 법주사, 경상북도의 동화사라는 삼남지방의 대표적인 사찰이 한 사제간의 계보에 의해 이룩되었다는 점은 무척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이 지역은 신라의 권역 밖으로 훗날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후삼국 시대를 여는 것에 정신적인 맥이 닿아 있던 건 아니었는지, 아니면 훗날 남조선 사상과 연결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주9.
신교문화는 신神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문화적 양식으로는 천지의 주인이신 상제上帝님(미륵불)에 대한 예법인 천제天祭문화, 그리고 개체적인 존재인 나의 하나님인 조상님을 모시고 제사祭祀지내는 문화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