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속의 아시아 헝가리

[세계지역문화탐방]
헝가리Hungary는 유럽 중동부에 소재하지만 ‘유럽 속의 아시아’라 불리는 나라이다. 헝가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이론이 있기는 하지만, 그 역사를 더듬어 보면 훈족(흉노), 마자르(말갈), 몽골, 오스만투르크(돌궐) 등 아시아 유목 기마민족들의 자취가 깊게 배어 있다. 그래서 언어와 성격, 문화 등에 있어서 헝가리는 우리와 친근하고 유사한 부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외세에 의해 많은 고난과 유린을 겪으면서도 강한 민족적 정체성과 문화적 저력으로 그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는 헝가리를 찾아가 본다.



1.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헝가리는 유럽의 중동부 내륙(대략 북위 49~45도, 동경 16~23도)에 위치해 있다. 이 나라의 국가 정식 명칭은 ‘헝가리 공화국(Republic of Hungary)’이다. 오늘날 헝가리 사람들은 자신들을 현지어로 머저르오르싸그Magyarország라 부른다. 헝가리의 수도는 부다페스트Budapest인데, ‘부다Buda’ 지역과 ‘페스트Pest’ 지역이 합쳐져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부다페스트는 23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174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주요 도시인 데브레첸Debrecen에 20만여 명, 미슈콜츠Miskolc에 16만여 명, 세게드Szeged에 16만여 명, 페치Pécs에 14만여 명, 죄르Györ에 12만여 명이 살고 있다.

헝가리의 국토는 그리 크지 않다. 동서의 길이는 528㎞이고, 남북의 길이는 268㎞이며, 면적은 대략 93,028㎢로 한반도 크기의 5분의 2이다.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가,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남쪽으로는 크로아티아와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공화국이, 북쪽으로는 슬로바키아가 국경을 이루고 있다. 7개 국가가 인접해 있어서 헝가리 국경의 총 길이는 2242㎞나 된다.

헝가리에는 2대 주요 강江이 관통해 흐른다. 다뉴브Danube 강과 티서Tisza 강이다. 다뉴브 강은 볼가Volga 강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인데, 헝가리를 둘로 나눈 것처럼 중앙부를 관통해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그 옆에는 헝가리에서 가장 길다고 하는 티서 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헝가리의 서북 국경에는 다뉴브 강의 지류가 발원하는 알프스의 지맥이 위치해 있고, 북쪽 국경은 티서 강이 발원하는 카르파티아 산맥이 아치 형태로 늘어져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헝가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두 강은 유고슬라비아로 들어간다.

다뉴브 강 서쪽 지역은 중앙 산지가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다. 헝가리에는 3개의 호수가 있는데, 이들 중에 육지 내의 바다라고 불릴 만큼 중유럽에서 가장 큰 벌러톤Balaton 호수가 트란스 다누비아의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이 호수의 크기는 동서의 길이가 77㎞나 되고, 남북 간의 거리가 1.6~14㎞나 된다. 그래서 벌러톤 호수는 헝가리에서 수산물의 주 생산지이고, 적당히 건조한 대륙성 기후를 보이므로 최고의 관광 및 휴양지를 제공하고 있다.

헝가리에는 두 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기 때문에 강 유역에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평원은 지형적으로 볼 때 4개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2개의 저지대와 2개의 고지대가 그것이다. 고지대는 알프스 산맥과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다뉴브 강 서안부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평원이다. 저지대는 광대한 평원을 형성하고 있는데, 낮고 평평한 티서강 유역에 걸쳐있다. 이들 중에 헝가리의 동부와 남부에 위치해 있는 대 평원이 있는데, 이곳이 헝가리 전 지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노디올필드 평원이다.

헝가리는 국토가 대부분 저지대이기 때문에 침엽수림이 드물다. 비교적 높은 곳에는 너도밤나무가, 낮은 곳에는 참나무와 같은 낙엽수림이 대부분이다. 산맥 근처의 높은 삼림지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멧돼지와 사슴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평원의 저지대에는 주로 산토끼, 꿩, 설치류 등이 산다. 그 외 국토 전체 면적의 5분의 3이 경작 가능한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농산물 경작이 가능한 지역이다. 특히 티서 강 동부 저지대의 평원과 서부의 죄르 부근 평야는 농작물 경작지가 많아 헝가리의 중요한 농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헝가리의 역사
민족의 기원과 고대국가의 형성
헝가리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학설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 크게 두 가지 학설이 있는데, 하나는 헝가리가 훈족의 후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투르크계에서 분파되어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은 ‘Hungary’란 이름이 훈족의 ‘Huns’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훈족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던 민족이었는데, 기후 등의 문제로 점차 서유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4 세기경에 이르러 훈족은 아틸라(Atila) 왕국을 건국하여 위상을 드러냈다가 5세기 중반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국가적 면모를 갖추어 등장한 헝가리 민족은 여러 측면에서 훈족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후자의 입장은 ‘Hungary’란 명칭이 투르크 어의 “on+ogur(열개의 화살)”란 의미를 가진 ‘오노구르족Onogur에 훈족의 “H”가 덧붙여지면서 ‘Ungar’, ‘Hongrois’, ‘Hungaria’로 정립되면서 나왔다는 것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스스로를 마자르족Magyars이라 부른다. 언어, 고고인류학적 연구에 의하면 마자르족의 조상은 BCE 3000년경 볼가강과 우랄산맥 사이의 스텝지방에 거주한 피노 우그릭Finno-Ugric의 일파로서, 이들은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조상 대대로 살던 우랄 산맥 부근의 땅을 출발하여 오랜 기간 동안 서진하면서 투르크계의 여러 민족과 융합하였다.

9세기경에 민족성이 고취되면서 마자르족에 변화가 일어났다. 마자르 부족장 아르파드Árpád는 895년에 자신의 여러 부족민(7부족)을 이끌고 카르파디아 분지로 침입하였고, 서유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해나가다 955년 아우구스부르크Augusburg 근교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1세Otto I에게 패퇴하면서 현재의 헝가리 지역(당시의 판노니아 지방)에 영구 정착하여 연합 국가를 세웠다. 이때부터 마자르족은 유목의 기마생활에서 정주의 농경생활로 변화된 것이다.

아르파드의 손자 게자Geza(972~997년)와 게자의 아들 이슈트반István( 997~1038년)은 헝가리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봉건국가를 형성하여 아르파드 왕조를 열었던 것이다. 이슈트반은 왕이 되자 그리스도교로 귀의하였고 가톨릭을 국교로 삼았으며, 1000년에 로마 교황 실베스테르Sylvester로부터 국왕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때에 헝가리는 거의 완전한 국가적 통일을 실현하고, 평화스런 정주생활의 터전이 확보됐던 것이다.

몽고 및 터키의 침입
그러나 12세기 말경부터 헝가리는 혼란에 빠진다. 왕령지가 분해되고, 대 호족과 귀족들의 대립 등으로 말미암아 헝가리의 왕권과 국가 체제가 느슨해졌던 것이다. 1241~1242년에 바투Batu를 선봉으로 한 몽골 정복군의 침입으로 헝가리는 전 인구의 절반이나 사망하는 재난을 겪었으며, 전 국토가 황폐해졌다. 이후 벨라 4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대내적으로는 대 귀족의 강화를 추진하였고, 대외적으로 여러 부족을 식민화하여 국토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며, 왕권 강화와 세력을 확장하였다.

1458년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1세Matthias Corvinus I는 중소 귀족의 지지를 얻어 국왕이 되자 대 귀족을 억누르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이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헝가리는 중유럽 제일의 강국이 되어 르네상스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이후 헝가리에서는 귀족세력의 부상에 따른 왕권 약화와 십자군 전쟁에 투여할 모병이 계기가 되어 농민전쟁이 일어났다(1514년). 이런 혼란 속에서 헝가리는 약체화된 국력을 모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세력을 확장한 오스만 투르크제국(터키의 전신)의 슐레이만 1세Suleiman I(1520~1566)는 1526년에 군대를 몰고 헝가리 영토 내로 침공을 개시했다. 이것이 모하치mohácsi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러요시 2세Lasjos Ⅱ 헝가리왕이 전사하면서 헝가리는 대패하게 된다.

1541년 오스만 제국은 다시 헝가리를 침공하여 ‘부다Buda’를 점령하였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헝가리의 영토는 셋으로 쪼개졌다. 중앙부는 오스만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고, 서부지역은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세력권에 들어갔으며, 동쪽의 트란실바니아(지금의 루마니아 북서부)는 투르크 지배하에 자치권을 누리는 지역으로 되었다. 그 후 17세기 말경부터 헝가리 전영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아래로 편입되었다(1686~1867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헝가리 통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Dual Monarchy 시대
19세기에 들어와 나폴레옹 전쟁과 서유럽 사회에서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헝가리에서도 중류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혁명가 로요슈 코슈트Lajos Kossuth의 지도아래 민족 독립을 위한 혁명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헝가리에는 농노 해방이 실현되었다. 다음 해에 헝가리는 독립을 선언했다(1848~1849). 이에 오스트리아는 헝가리를 재통치하려 했으나 1866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헝가리인의 저항운동이 가열될 것을 우려한 유화정책을 시도하여 결국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의 아우스글라이히Ausgleich(화해협정)를 체결한다. 그 결과 헝가리는 일견 내정상 독립을 회복한 듯하였으나, 오스트리아 황제를 헝가리 왕으로 섬기는 2중제국Dual Monarchy이 탄생하게 되었다. 2중제국 시 헝가리는 입법, 행정, 사법권을 갖는 자치정부를 구성하고 외교, 국방 및 연방 재정 문제에 관해 오스트리아와 공동 행정 체제를 갖게 되었으나, 인구와 국부면에서 우월한 오스트리아가 외교, 국방 분야에서 강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2중제국의 형태는 1918년 합스부르크왕조의 해체 시까지 지속되었으며, 이런 체제에서 헝가리는 잠시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기도 하였다.

1,2차 세계대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헝가리는 2중제국의 일원으로 오스트리아-독일 동맹 진영에 서서 참전하였으나 패전을 하였고 1918년 11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1차대전이 패전으로 흐르자 대전 말기에 좌익계열의 미할리 카롤리Mihály Károlyi가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분리와 공화제 실시를 선언하였으나 실패하고, 쿤 베라Kun Béla를 중심으로 하는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쿤 정부도 루마니아 군부의 침공으로 인해 붕괴되었고, 다시 우익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다. 결국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헝가리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였으나 전쟁에 패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패전 후 헝가리는 트리아농Trianon 조약(1920년 6월)을 맺게 되고,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옛 영토의 70%가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이탈리아에 분할되었고 이와 함께 60% 이상의 인구와 80% 이상의 경제력까지 상실함으로써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헝가리는 잃어버린 영토의 일부라도 회복할 목적으로 소련에 대항해 추축국인 독일-이탈리아 측에 가담하였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헝가리의 반 나치 감정 및 전선이탈 동요 등을 우려한 독일은 1944년 3월 헝가리를 완전 점령하였다. 전쟁 말기에 접어들자 헝가리의 국토는 폐허가 되었으며, 전쟁이 추축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헝가리는 또다시 많은 것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공산정권 시대
1944년 12월 데브레첸Debrecen에서 소련 지배하에 헝가리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45년 1월 헝가리는 연합군과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동년 11월에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이어 1946년 1월 신헌법을 제정하고 동년 2월에는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헝가리에 들어와 주둔한 소련 점령군의 지원으로 공산당은 각 국가기관에서 세력팽창을 도모하여 1949년 5월 총선 이후 정권을 장악해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이후 헝가리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소련의 스탈린Stalin 사후 1953~1955년 사이 헝가리에서는 온건노선을 주장하는 나지 임레Nagy Imre 수상에 의해 자유화 정책이 추진되었으나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의 반스탈린노선 채택을 계기로 스탈린식 강압주의를 지향하는 라코시Rakosi파와 온건노선을 주장하는 나지Nagy 파간의 암투가 격화되었다. 이는 헝가리 국내 경제의 파탄을 초래하여 급기야는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에서 대학생, 노동자 등 약 10만 여명의 시민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민중 폭동이 발생하였다.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이 ‘헝가리 봉기’로 인하여 게레 에르뇌Gerő Ernő 서기장은 해임되고 수상도 온건한 나지 임레Nagy Imre로 다시 교체되었으나, 사태는 폭동으로 확산되고 점차로 반공反共 반소反蘇화로 치달으며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 및 중립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소련의 개입을 부르는 요인이 되었다. 소련군은 즉시 부다페스트로 들어와 반정부시위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 결과 헝가리에는 수만 명의 사상자와 수십만의 국외 망명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헝가리 봉기가 진압되고 동년 11월 3일 카다르 야노시Kadar Janos를 당 서기장 및 수상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등장하였다. 카다르 정부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계속 잔류하고,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의 신뢰 회복을 위해 개방 정책을 취하는 동시에 1968년에는 경제개혁 정책을 단행하였고, 경제-문화 분야에 폭넓은 자유화 정책을 도입하였다.

체제의 전환
1985년 3월 소련의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서기장 등장 이후,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개방) 정책으로 헝가리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분야에 걸친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1988년 초 카다르 서기장이 퇴진하고 카를리 그로스Károly Grósz가 실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급진적 개혁주의자인 임레 포즈거이Imre Pozsgay가 정치 일선으로 복귀함으로써 개혁이 본격화되었다. 1989년에는 정치개혁이 더욱 가속화되어 같은 해 6월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당 지도체제를 단일 지도체제에서 4인 집단 지도체제로 개편하고 본격적인 정치개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89년 10월에 이르자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전당대회를 개최, 스스로 일당통치체제를 포기하고 당명도 서구식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헝가리 사회당으로 변경함으로써 공산통치를 종식시키고 다당제와 대통령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채택하였다. 1990년 봄에 헝가리는 국민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자유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자유 시장 경제체제로의 급진적인 이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체제전환 이후의 정세
1990년 3월 실시된 다당제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자유총선 결과, 중도우파보수성향의 헝가리민주포럼을 중심으로 제1기 연립정부가 출범하였고, 1994년 총선에서는 제1당인 좌파인 헝가리 사회당이 우파 성향의 자유민주연합과 제2기 연정을 구성하였으며, 1998년 총선에서는 우파인 청년민주동맹이 중심이 되어 중도 우익 성향의 제3기 연정을 출범시켰다.

2002년 총선에서는 다시 사회당-자유민주연합의 중도좌파정당이 승리하여 제4기 연정을 구성했는데, 2006년 4월 총선에서도 승리하여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2008년에는 세계적으로 확산된 국제금융위기가 헝가리 경제에도 큰 타격을 미쳤으며, 그 결과 사회당의 페렌츠 주르차니Ferenc Gyurcsany 총리가 2009년 3월 사임을 하고 고르돈 버이너이Gordon Bajnai 신임 총리의 위기관리 내각이 들어섰다. 하지만 사회당에 대한 불신과 좌절이 증폭된 가운데, 2010년 4월 실시된 총선에서 청년민주동맹(Fidesz)이 총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점하는 압도적 승리로 1998~2002년에 이어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Fidesz는 1989년 체제전환 과정에서 학생운동가 중심의 중도좌파 정당으로 출범했으나, 오르반Orban 현 총리하에서 1990년대 중반 중도우파 정당으로 변환하였다. 또한 총선 결과, 2002~2010년간 집권한 사회당의 몰락과 극우주의 정당인 우파연합(Jobbik)의 원내 제3정당으로의 부상을 통해 헝가리 정치가 우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집권여당은 2010년 5월 출범 직후 ‘헝가리의 쇄신(Hungary should be renewed)'을 모토로 헌법 개정 등 정치 사회 경제 체제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한 2014년 4월 실시된 헝가리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청년민주동맹(Fidesz) 기독민주국민당(KDNP)이 총의석 199석 중 133석을 획득,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수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데 이어, 2014년 5월 실시된 유럽의회선거(총 21석 중 12석을 획득)와 2014년 10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도 크게 승리하는 등 2014년에 실시된 3대 선거에서 모두 승리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따라 오르반Viktor Orbán 총리는 1998~2002, 2010~2014 집권에 이어, 제3기 정부를 2014년 6월 6일 발족시켰다.

오르반 제3기 정부는 그간 추진해 온 일방적인 개혁 드라이브 등 독단적인 정치스타일, 정부주도의 경제성장 정책 고수, EU에서의 독자적인 목소리표출 등 현 정책을 계속 유지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최근 오르반 총리가 ‘헝가리는 비자유민주주의적인 국가(illiberal state)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연설과 헝가리 시민단체에 대한 탄압, 부패연루 혐의 헝가리 정부 고위인사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국금지 조치 및 이와 관련한 헝가리 정부의 불명확한 대처, 정부의 인터넷세 부과 시도에 따른 반정부 시위 등의 사건으로 인해 오르반 정부의 정통성에 대해 국내외 비판이 다시 고조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2. 정치 및 행정


정치형태
9세기경에 탄생한 헝가리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왕정체제가 유지되었다. 그 이후 헝가리는 1989년 새 헌법이 공표되기까지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체제였다. 1989년 10월 23일에 의회에서 독재국가 사회주의를 철폐하고, 다당제와 대통령제를 도입하며, 국호변경을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통과되었다. 이로부터 헝가리는 공화국으로 바뀐 것이다. 공화국의 형태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골자로 하며,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에 대통령제가 가미된 절충형으로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국가를 대표하고 내각수반인 총리는 내각 구성 및 국정 책임을 맡는 구조로 되어 있다.

대통령
개정된 헌법이 채택하고 있는 대통령은 의회에서 선출되고, 국가의 원수로서 군 통수권을 가지며, 임기는 5년으로 연임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기 때문에 실권은 없으며, 행정권한은 대부분 총리가 행한다. 국회의원 50명 이상의 추천으로 출마하여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된다. 주요권한으로는 법률 서명 및 공포, 법률 거부권, 국회해산 및 총선 일자 결정, 국회 출석 및 입법 제안, 정부구성 위임, 행정부 주요인사 임면, 군통수권, 판사임면, 특별 사면, 헌법재판소 재판 발의 등이 있다. 2015년 현재 헝가리의 대통령은 야노슈 아데르János Áder(2012년 5월 취임)이다.

행정부
행정부는 중앙과 지방으로 구분된다. 행정부의 최고 기관은 중앙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이다. 중앙 각료회의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의회가 승인한 총리, 그리고 대통령이 추천하여 의회의 인준을 받아 선출된 각부 장관들로 구성된다. 각료회의의 의장인 총리가 행정수반을 맡아 실질적인 국정을 관장하게 되며, 총리와 내각은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고 각료는 의원 겸직이 가능하다. 2015년 현재 내각 총리는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2014년 5월 취임)이다.

헝가리는 43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구분된다. 그 중 19개는 주州megyék로 번역될 수 있고 23개는 주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는 도시주都市州megyei jogú városok이다. 또한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된 지방자치단체이다. 지방 행정은 피라미드 구조의 평의회들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수도인 부다페스트에 22개의 구區평의회, 주요 4개 시市에 13개의 지구地區평의회, 각 주州에 촌村평의회가 있다.

입법부(국민의회)
새롭게 개정된 헌법에 의하면, 헝가리의 최고 권력기관은 입법부인 국민의회이다. 단원제인 의회는 입법 및 헌법의 개정, 국가예산안과 국가경제계획의 결정, 감사원과 옴부즈만에 대한 감독을 할 수 있으며, 대통령과 총리 및 행정부각료 헌법재판소장 감사원장 대법원장 검찰총장을 선출하고 대통령 탄핵소추 등을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 국민의회 의원은 18세 이상의 남녀가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로 선출하는데, 소선거구 및 비례대표제를 혼합하여 총 199명(106개 소선거구 106명과 전국구 비례대표 93명)으로 구성된다. 의원 임기는 4년이고 회기는 연 2회의 정기회의(2월~6월, 9월~12월) 및 임시회의가 있다.

헝가리의 주요 정당은 청년민주동맹Fidesz, 기독민주국민당KDNP, 헝가리사회당MSZP, 민주연합DK, 우파연합Jobbik, 대안정당LMP, 다함께1, 헝가리를 위한 대화PM, 자유당MLP 등이 있는데, 각 정당은 총선에서 5석 이상 의석수를 확보해야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법부
헝가리의 법원 조직은 대법원Curia, 고등법원High Court, 항소심법원Court of Appeal, 지방법원Municipal Court, 행정 및 노동법원Administrative and Labor Court으로 구분된다. 모든 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법관은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으며 30세 이상인 자만 법관 임용이 가능하다. 대법원장은 5년 이상 경력의 법관 중 대통령의 추천으로 의회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하며 임기는 9년이다.

일반 법원 조직 외에 모든 법원의 인사, 예산 및 행정 권한을 행사하는 법원행정청NOJ(National Office for the Judiciary)과 법원의 감독 기관인 법관위원회NJC(National Judiciary Council)가 있다. 법원행정청장의 임기는 9년으로서 5년 이상 경력의 법관 중 대통령이 추천하며 의회 재적 3분의 2 이상으로 선출한다. 법관위원회의 경우, 위원장은 5년 이상 경력의 법관 중에서 대통령이 지명하며 의회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하고, 14명의 위원은 5년 이상 경력의 법관 중에서 선출하되 1명은 고등 법원, 5명은 항소심 법원, 7명은 지방 법원, 1명은 행정 및 노동법원에서 각각 선출한다.

검찰 조직은 대검찰청, 고등검찰청, 지방검찰청 및 지청으로 구성되고, 국회에서 선출되는 검찰총장(임기 9년)이 사건의 기소여부를 결정하며 검사들을 임명한다. 법률의 위헌 여부 심사를 위해 설치된 헌법재판소는 국회에서 15명의 헌법재판관을 선출하며, 헌법재판소장(임기 12년, 70세 정년)도 국회에서 선출한다.

3. 경제


최근 경제동향
헝가리는 본래 전형적인 농업국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단행된 1968년의 경제 개혁으로 공업화가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에는 동부유럽국가들 중 소비물자가 가장 풍부한 국가로 알려졌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도 하였으나, 1980년대에 수입원료 및 연료 가격의 앙등과 무역수지의 악화 등으로 성장세가 둔화되었으며 대외채무도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 자유시장경제로 체제를 전환하였는데, 자본주의 도입으로 인한 혼란과 IMF의 경제 안정화 계획에 따른 긴축정책의 부작용, 인플레이션과 수출 시장의 상실 등의 요인으로 인해 1993년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1993년 이후 경제안정화 조치에 힘입어 완만한 경제성장을 이루다가 1997년부터 연간 4~5% 정도의 본격적인 성장 국면에 진입하였다. 1998년의 러시아 경제위기, 1999년의 세계적인 금융불안의 파고에도 헝가리는 금융시장의 안정을 기반으로 하여 꾸준한 상승세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2008년 유로존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헝가리는 IMF와 EU로부터 200억 유로 상당의 긴급자금을 지원받는 진통을 겪었다. 이후 분기별로 채무액을 상환하면서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해 온 결과, 헝가리 경제는 2012년 말을 기점으로 바닥을 치고 성장 국면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2013년 6월 21에는 EU 재정적자시정절차(EDP)를 탈출하였으며 동년 8월 12일에는 IMF 차관을 전액 상환하였다. 헝가리는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 이후 종래 농업 중심의 경제로부터 서비스, 제조, 금융부문으로 산업구조 다변화를 꾸준히 진행하였는 바, 2012년 GDP 구성을 보면 1차산업인 농업, 광업 등은 5%에 그친 반면 제조업(건설업 포함)이 26.5%, 서비스업이 68.5%를 점유하여 산업구조가 상당히 고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제 정책과 구조
헝가리 정부는 재정지출 축소보다는 세수 확대를 통해 재정적자를 줄여나가는 비정통적 정책(unorthodox policy)을 펼치고 있어 국내외의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제조업이 강해 경제 전망은 밝은 편이다. 한편 헝가리의 대기업은 대부분 외국기업으로 헝가리 내수시장 보다는 유럽을 위한 생산기지로 활용하고자 헝가리에 진출해 있는 상황이다. 헝가리는 기본적으로 유럽 내 다국적기업들의 조립, 생산거점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수출입에 있어서도 EU의 수출입과 연계된 생산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EU의 경제상황에 따라 헝가리의 수출입이 동반증가 또는 하락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오르반Orban 정부는 EU에 과도하게 연계된 헝가리의 경제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러시아, 중국 등 신흥 경제권과의 협력

확대를 적극적으로 모색 중이다. 2012년 중국, 일본, 싱가포르에 이어 아시아 국가 중 제4위의 교역대상국으로 부상한 우리나라와의 협력 관계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우리와는 중소기업과 농업을 중심으로 한 교역확대를 희망하고 있다.

향후의 전망
2013년도 초반까지도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헝가리 경제가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였으나, 2014년 10월 현재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헝가리 경제는 비교적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헝가리 경제가 선전하고 있는 이유로는 전세계적으로 과잉 공급되고 있는 유동성 현상으로 인해 헝가리 국내통화인 포린트 환율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고, 제조업 기반의 수출 산업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헝가리 경제구조가 금융산업, 단기자본 유입에 의존하는 여타 국가에 비교하여 위기관리에 양호하며, 2014년 총선과 EU 의회선거 및 지방선거 등에서 여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해 정치적으로 안정된 것이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4. 사회와 문화


인구구성
헝가리의 인구는 2014년 7월 기준으로 약 992만 명 정도로 집계되고 있는데, 오늘날 헝가리 민족의 구성은 매우 애매하고 복잡하다. 이들의 조상은 9세기경에 중앙아시아에서 서방으로 진출하여 헝가리를 건국하였지만, 오래 동안 백인종과 혼융되었고,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으면서 투르크 민족 및 게르만 민족과 접촉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헝가리인의 대다수는 마자르족Magyars으로 불리고(전체 인구의 92.3% 정도), 전체 인구의 97% 정도가 우랄어족의 피노우그릭Finno-Ugric어군에 속하는 헝가리어(마자르어)를 사용한다.

헝가리에는 소수민족도 다수 있다. 독일인이 2.5%를 차지하고 있고, 슬로바키아인이 0.9%, 루마니아인이 1%를 점유하고 있다. 그 외에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 등이 헝가리에 살고 있다.

외국에도 헝가리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루마니아에 약 170만 명, 체코와 슬로바키아에 60만 명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등지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헝가리인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19세기 이후 유럽 전역에서 미국과 캐나다에 이주하여 정착해 살고 있는 헝가리인들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헝가리인의 이민자와 망명자들, 그 자손들까지 합하면 헝가리인들은 400만 명이 훨씬 넘게 외국에 살고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헝가리 내의 자연적인 인구 증가율은 1980년대 이후 동유럽권의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는 편이다. 그 이유는 출생률의 감소와 노령화 현상 때문이다(전체 인구의 20%가 60세 이상의 노인층이다). 인구 증가율을 증진시키기 위해 헝가리 정부는 자녀가 많은 가족에게 아동 보육 수당을 지급하고, 주택 배분의 혜택을 부여하는 등 여러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국토의 많은 부분이 농업을 할 수 있는 평원임에도 불구하고 인구분포도는 농촌보다 도시 쪽에 집중되어 있다. 도시인구의 대부분은 부다페스트 수도에 있는데,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나 된다.

사회생활
헝가리에서는 육체적인 노동자의 임금은 정신적인 근로자에 비해 대체로 높은 편이다. 소득 종사자에 근무하는 근로자의 직업별 인구 구성 비율은 사무직이 약 26%, 노동자가 대략 56%, 농업 생산협동조합원이 14%, 자영업자가 4% 순이다. 근로시간은 1984년부터 주당 40시간으로 정하고 있고, 유급휴가는 연 15~24일이다. 원칙적으로 여성들도 취업을 하고 있어서 출산휴가는 3개월 유급이고, 산전과 산후 3년간은 육아휴가가 보장되고 있는데, 일정액의 유급이 지급된다.

헝가리는 국민들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보건행정을 펼치고 있다. 정부는 산업재해수당, 실업수당, 출산수당, 장애자 수당, 질병수당, 노령수당, 사망수당 등 각종 보조금을 지급하여 사회복지제도에 힘쓰고 있다.

의학수준은 비교적 높은 편이고, 국가의료는 원칙적으로 무료이다. 특이하게도 도시 거주민들은 충분한 의료혜택을 받고 있으나, 진료 때에는 실제로 상당한 비용의 사례가 요구된다고 한다.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연금생활자가 늘어나고 있다. 독거노인의 경우 연금만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없지만, 자녀를 둔 부인은 아동 수에 따라 수당이 지급되고 있다.

1961년 교육법령이 헝가리 교육제도의 기본으로 공산주의 시절 모든 교육은 국립이며 무료였으나, 1990년 이후 사립교육이 부활되고 국립대학은 1998년부터 입시정원을 증가하여 현재 70:30으로 장학생과 자비생이 존재한다. 헝가리는 초등학교 1년부터 16세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중등교육 기관은 일반중학교, 직업중학교, 공업중학교가 있는데, 4년제이다. 대학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부다페스트, 페치, 세게드, 데브레첸에 종합대학이 각각 1개교가 있고, 단과대학으로는 공과대학 6, 의과대학 4, 예술대학 3, 경제대학 1개교가 있다. 헝가리는 과학과 경제학, 문학 분야 등에서 그간 총 1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헝가리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국민의 대다수가 기독교권에 속해 있다. 헝가리에 처음으로 아르파드 왕조를 세운 이슈트반István(997~1038)은 1000년에 그리스도교로 귀의하여 로마 교황으로부터 국왕의 칭호를 받았고, 가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 헝가리는 계속해서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했다. 각 종교적 분포를 보면, 국민의 39%가 가톨릭이고, 프로테스탄트가 14.2%, 그리스 정교가 4%, 그밖에 유니테리언,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문화예술
헝가리의 문화-예술은 서방 기독교 문화와 고유의 전통 민속을 양대 기저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헝가리는 유럽 세계에 뒤지지 않는 문화-예술의 수준을 보유하고 있고, 중부유럽의 문화중심지로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문화적 인프라 형성, 헝가리인들의 수준 높은 문화적 소양과 문화적 소비에 대한 수요 급증, 여러 분야에서 배출된 탁월한 예술가들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국민문학을 빼놓을 수 없다. 헝가리의 국민문학은 16~17세기에서부터 시작하지만, 18~19세기에 접어들자 내셔널리즘의 열풍과 함께 탁월한 시인과 작가가 배출되어 그 전성기를 이룬다. 대표적으로 J.카토나와 헝가리 독립전쟁에서 죽은 사랑과 혁명의 시인 S.페테피를 손꼽을 수 있다. 카토나의 사극史劇, “방크 반Bank Ban(1821)”은 오늘날까지도 무대에 올려지는 헝가리 극단의 명작 가운데 하나이다. S.페테피는 파란만장한 세월로 점철된 시기에 헝가리 최고의 시인으로 짧은 생애 동안 많은 서정시를 남겼으며, 후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읽혔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 시절에 K.미크사트와 같은 산문작가들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특히 많은 장편을 써서 국제적인 인기를 누렸던 요카이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헝가리 리얼리즘 문학의 1인자인 Z.모리츠, A.요세프와 같은 걸출한 시인,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강력한 비판정신으로 무장한 소설가 T.데리가 유명하다.

음악의 분야에서도 19세기에 민족적 격정을 상징하는 양식이 발달하였으며, 이에 상응하는 걸출한 음악가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민족주의 고양기에 맞추어 국립 음악학교가 설립되고, 국립 가극장 등이 창설된 영향이다. 독일음악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에서 활동했던 피아노의 거장 F.리스트, 가극歌劇의 작곡가로 명성을 얻은 민족 오페라의 확립자 F.에르켈이 대표적이다. 20세기에 들어와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B.바르토크, 음악의 교수법으로 널리 알려진 Z.코다이는 2대 작곡가로 대표되며, 그 외에 훌륭한 연주가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J.후바이, C.플레시 등이 있고,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레나 4중주단, 부다페스트 현악4중주단이 매우 돋보인다. 미술계와 영화산업에서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화가들과 영화인들이 많다. 역사화로 이름난 B.세게이, 벽화로 명성을 얻은 로츠, 사실파로 유명한 M.문카치, 천재화가로 알려진 촌트바리 등이 등장하였으며, 공예 미술부분에 조르나이가 창안한 아르누보 양식의 도자기가 유명하다. 영화산업에서 A.주커는 패러마운트 영화사를 설립했고, W.프리드는 현대에서 영화를 가장 강력한 문화 매체로 만드는데 기여한 폭스 영화사를 일으켰다. 이러한 영향으로 헝가리는 부다페스트에 국립 오페라하우스(1200석) 등 세계적인 수준의 대형 공연장(30여개)을 여러 곳에 지어 운영하고 있고, 유럽에서도 보기 드문 발레 전용 공연장을 보유하고 있다. 헝가리인들은 경제사정이 악화되어도 공연 티켓구입비는 아끼지 않는 등 전반적으로 문화적 수요가 높은 편이다.

헝가리는 문화-예술이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는 체계적인 수단으로 여겨 문화를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 헝가리는 19세기 말 이후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여 문화황금시대를 꽃피웠으며, 현재의 헝가리 문화와 제도들은 대부분 이시기에 형성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방대한 영토와 인구를 상실하게 되면서 문화정책은 상처 입은 민족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자 수단의 역할을 하였으며, 헝가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 확대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사회주의 시기에는 정부보조를 통하여 문화소비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문화정책이 추진되었으며, 특히 이 시기 헝가리 출신의 국제금융계 거물인 조지 소로스가 출연한 소로스 재단(Soros foundation)이 헝가리 문화예술 지원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1989년 체제 전환 이후 문화정책은 공산주의 체제 이전의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현대 서양문화를 재도입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1993년 ‘국립문화기금’을 설립하면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팔길이원칙’(arm’s length principle)에 기반한 문화예술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오늘날 헝가리는 전 지역에 문화 진흥을 확대시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고, 국제문화와의 협력을 통해서 자국의 문화산업 계발을 꾀하고 있으며, 문화 외교를 통해 젊은 예술인들이 유럽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있다. 그래서 헝가리 정부는 문화 외교 과제의 일환으로 세계 속에서 자국의 문화-예술의 위상을 재확립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국제사회에 홍보하는 사업적 기반 구축에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보이고 있다.

5. 한국과 헝가리의 관계


우리나라와 헝가리 사이의 외교적 교류는 1892년 6월 23일 조선왕국-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간 우호통상항해조약 서명(1893.10.5 비준서 교환)이 처음이다. 그후 헝가리는 1948년 11월에 한반도의 남한과 북한 양쪽과 수교를 맺었다. 그러나 헝가리가 공산화된 후에 한국은 헝가리와의 교류를 거의 하지 않다가 1987년 12월 부다페스트에 한국무역 사무소를 개설했고, 헝가리는 1988년 3월 서울에 상공회의 사무실을 설치했다. 동년 8월에는 한-헝가리 상주대표부 설치 협정이 체결되었고, 10월에는 주헝가리 대한민국 상주대표부가 설치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1989년 2월에 중·동부 유럽 공산주의 국가 중 최초로 헝가리와 다시 단독으로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헝가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중동구권 국가 중 가장 현실주의적인 대한반도 정책 시행하고 있다. 헝가리는 1948년에 북한과 외교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여러 방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1998년에 북한과 대사급 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헝가리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 국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헝가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헝가리는 경제, 통상, 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한국과 실질적 협력관계를 중시하고 있으며, 한국정부가 취하고 있는 대북 정책의 기본 노선에 동조하고 협력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양국은 문화 분야에서도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은 1938~1941년 리스트 음악원 유학한 바 있는데, 2009년에는 한국-헝가리 수교 2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헝가리 친선협회와 서울시의 공동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그해 9월 부다페스트 바로시리게트Varosliget 공원 내에 안익태 선생의 흉상 건립이 착공되었고, 2012년 5월에 흉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1989년 수교 이후 리스트 음악원 등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나, 최근에는 문화예술 관련 한국인 유학생 수는 감소하고 헝가리 내 의과대학 유학생들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헝가리는 유럽 최초로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비롯하여 이후 ‘선덕여왕’, ‘동이’, ‘이산’ 및 ‘파스타’ 등을 방영하였고, 한국문화원 주관으로 한국 영화 페스티벌 행사를 매년 개최 중이다.

2009년을 기준으로 볼 때, 헝가리에는 한국의 무역관을 포함하여 20여개의 주재 한국 상사와 현지 법인이 있으며, 부다페스트공과대학에는 한국과 헝가리 간의 기술협력 센터가 개설되어 있고, 부다페스트에 한국 상공회의소가 설치되어 있다. 한국과 헝가리 간에는 무역이 활발하다. 2013년 한 해 동안 양국은 25.7억 달러의 교역을 하였으며, 한국은 헝가리에 자동차 컴퓨터 전자부품 돼지고기 등을 수출하고, 헝가리는 컬러TV 자동차 기계 가전제품 섬유와 직물 등을 한국에 수출하고 있다.

헝가리에 체류하는 한국 교민은 대다수가 정부 유관기관과 상사의 직원 및 가족, 선교사 및 유학생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013년 기준으로 약 1,300명 정도이며, 한인회는 결성되어 있지 않고 한인상공인협회가 실질적인 한인회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헝가리에는 한인학교가 운영되고 있는데, 유치원반 초등반 중등반에 총 77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고 교사는 10명이며 헝가리어 성인반은 별도로 구성돼 운영 중이다.





헝가리의 명소들
헝가리는 문화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만큼 도시의 미관이나 관광 명소들도 빼어난 곳이 많다. 특히 수도인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도 그 미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부다페스트를 포함한 헝가리의 주요도시들은 유럽에 위치한 다른 도시들에 비해 비교적 물가가 저렴하고, 주변국과 연계하여 여행할 수 있는 도로망, 철도망이 잘 조성되어 있어 관광객 수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주요 관광지는 부다페스트, 벌러톤 호수 및 각 지방의 온천 요양소 등이다.

부다페스트의 부다 왕궁, 세체니 체인브리지, 국회의사당으로 연결되는 다뉴브 강변 지역과 영웅광장으로부터 19세기 대표적 건축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언드라시 대로변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이다. 또한 부다페스트 북쪽 다뉴브 밴드 지역, 쇼프론, 페치, 세게드 등도 주요 관광지이며, 헝가리 온천 지역, 벌러톤 호수, 와인 산지 방문 관광객 및 의료 관광(치과 치료 및 온천 패키지 등) 프로그램 참가자도 증가 추세에 있다.

헝가리는 국토의 70%가 온천 개발 가능 지역이다. 지하에는 4,000㎦의 온천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 전국 500여 개의 지역에서 온천수가 나오고 수온이 30℃ 이상이어서 근육신경계 질환 치료 효과로 유명하다. 헝가리나 유럽 대부분의 온천에는 수영장이 함께 있는데, 이는 운동을 통해 땀을 배출함과 동시에 인체의 근육이나 신경 계통을 함께 조율하고 치료하는 방식의 온천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헝가리는 총 8개의 유네스코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 중 자연유산으로는 애그텔레크Aggtelek 국립공원이 있고, 문화유산으로는 호르토바기Hortobagy 국립공원, 홀로퀘Hollókő 전통마을, 파논할마Pannonhalma 중세 베네딕트 수도원, 페치Pecs 로마유적지, 부다Buda 성과 그 주변 강변, 안드레시Andrassy 대로 등이 있으며, 그 외 토카지Tokaj 지방과 페르퇴Fertő 호수 주변 10여 개 마을이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헝가리 관광은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이탈리아, 체코 등 인근 국가 관광객이 주를 이루며, 최근에는 미국, 프랑스 등의 관광객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