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술의 천재 유 씨네 막둥이의 득천하기得天下記

[도전속의 인물 ]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녹대에서 자살하게 한 이후 주나라는 태평성대를 구가한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흥망성쇠는 있는 법. 이후 주나라는 춘추 전국의 혼란한 시대를 겪은 뒤 진시황제에 의해 통일이 된다. 하지만 이도 잠깐 기원전 210년 신묘에 진시황이 천하 순행 중 사구沙丘(지금 허베이성 평향현)의 평대에서 붕어하고 천하는 다시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두 명의 영웅이 다투는 천하 쟁패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데…


*상제님,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고조(漢高祖)는 마상(馬上)에서 득천하(得天下)하였으나 우리는 좌상(坐上)에서 득천하하리라.”(道典 5:6:7, 11:361:6)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고조(漢高祖)는 소하(蕭何)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느니라.” (道典 8:28:1)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쓸 때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나니, 옛날에 진평(陳平)은 ‘야출동문(夜出東門) 여자 이천인(女子二千人)’ 하였느니라” (道典 8:61:3)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항우가 25세에 출세하였으면 성공하였을 것인데, 24세에 출세하였으므로 성공을 보지 못하였느니라.” (道典 2:96:1)


두 영웅의 노래


출신 성분과 성격 등이 대비되면서도 승자와 패자 없이 둘 다를 추앙하는 세간의 정서 속에서(오히려 패자를 더 추모하고 사랑하는 기이한 모습도 보이긴 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문화적 측면은 물론이고 경영학의 인사관리와 조직론(리더십) 분야 등에서 끝없이 연구와 언급이 되고 있는 세기의 맞수가 있다. 바로 역발산기개세의 불세출의 영웅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와 뛰어난 도량과 적재적소의 용인술로 천하를 얻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말년에 한 편의 시를 지어 자신의 감정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우선 항우가 부른 해하의 노래주1

역발산혜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
시불리혜추불서時不利兮騅不逝
때가 불리하여 추가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불서혜가내하騶不逝兮可奈何
추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혜우혜내약하虞兮虞兮奈若何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하는가!


때는 BCE 202 기해년, 이곳은 해하垓下의 누벽(현 안휘성 영벽현 동쪽). 병사는 적고 식량은 떨어지고, 사방에서는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왔다(사면초가四面楚歌). 초나라 고향 노래로 초군의 투지를 무너뜨리려는 한신韓信의 심리전에 걸려든 것이다. 서초패왕 항우는 스스로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인가.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명마 추騶와 평생을 사랑한 우희虞姬와 함께 술을 나누며 슬프고도 격정적인 노래를 불렀다. 항우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울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은 고조 12년 BCE 195년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회군하는 길에 고향인 패현에 들러 큰 잔치를 연 상황에서 스스로 흥이 나서 즉흥가를 부른 유방의 이른바 큰 바람의 노래(大風歌).

대풍기혜운비양大風起兮雲飛揚
큰 바람 일어나 구름이 휘날리니.
위가해내혜귀고향威加海內兮歸故鄕
위엄을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도다.
안득맹사혜수사방安得猛士兮守四方
어떻게 하면 용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유방은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만감이 교차하는지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에 미천한 출신으로 일어나 황제가 되기까지의 지난했던 여정, 영원한 맞수 항우와 벌인 초한대전의 과정까지. 그가 세운 한漢나라는 중국인들을 중국인답게 만드는 원형이 되었고, 스스로를 한족漢族이라 부를 만큼 자긍심을 갖게 했다.


용의 얼굴을 지닌 천하의 건달, 한 고조 유방劉邦


한고조 유방劉邦은 지금의 장쑤성 서주시 서북에 있던 사수군泗水郡 패현沛縣 풍읍O邑 중양리中陽里주2에서 BCE 247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태공太公, 어머니는 유온劉媼이다. 태공은 노인장, 유온은 유씨 어멈이란 뜻이다. 유방도 황제가 된 이후 비로소 붙여진 이름으로, 그의 자를 계季라고 하는데 이것도 아들 중 막내란 뜻이다. 그래서 유방의 집안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평민 이상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기史記』 「본기本紀」에는 유방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는 유온이 호숫가에서 잠깐 잠이 든 사이에 신神을 만나 교합했다. 이때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갑자기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태공이 달려가 보니 교룡蛟龍이 부인의 몸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후 유온은 임신을 하고 유방을 낳았다주3

유방은 콧날이 높고 이마는 튀어나왔고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의 탄생비화와 얽혀 흡사 용의 얼굴처럼 보였다. 이런 그의 특이한 외모는 생존 시에는 개인적인 형용사였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는 용안龍顔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경어로 변모했다. 그리고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보면 유방의 인격이 매우 복잡하게 묘사되어 있다. 즉 지나친 애주가요 호색가이며 속 좁고 질투심도 많은 이중적 성격과 냉혹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겉으로는 너그럽고 어질고 솔직한 듯했으나, 속으로는 마음에 꺼리는 바가 많았고 벽을 많이 쌓은 사람이었다는 게 사마천의 시각이다. 그의 생애를 보면 확실히 교활하고 음험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여 시정잡배와 같이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밝히며, 아랫사람에게 욕설을 퍼붓는 오만불손함이 있던 반면 통이 크고, 멀리 크게 보는 안목과 천하쟁패에 결정적인 승리 요인으로 작용하는 넓은 도량과 임기응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역사는 격랑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 진시황秦始皇의 뒤를 이은 진 2세 호해 때인 BCE 209 임진년 10월에는 진제국의 폭정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답디까!’라며 반기를 든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기의가 있었다. 진 제국 전역에 걸친 의거 속에 유방은 소하蕭何, 조참曹參, 번쾌樊噲 등과 함께 패현을 장악, 패공이 되었다. 이때 그는 배달국 14대 환웅이며 동아시아에서 군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치우천황께 제사를 지내고 북과 깃발에 희생의 피를 발랐다. 당시 풍패에는 치우천황께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어 이를 따른 것이고 이후에도 치우 사당을 수도인 장안에 짓게 하여 치우천황을 돈독히 공경하였다.

패현에서 반진反秦대열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참모 장량張良을 휘하로 끌어들였고 지금의 산둥성 조장에 해당하는 설현에서 항량項梁 및 항우項羽의 군대와 합류하게 되었는데, 조직적인 투쟁을 하기 위해 옛 초회왕의 손자 웅심을 정신적인 리더로 옹립하고 존칭도 초회왕楚懷王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초회왕 아래 항우와 유방은 결의형제를 하게 되는데, 나이가 15살이나 위인 유방이 동생을 자처한다. 이후 계속되는 승전에 자만에 빠진 항량은 진제국의 백전노장 장함에게 참패당해 전사하고 만다. 장함이 옛 조나라 지역의 반군 집단의 하나인 조헐을 포위하자, 초회왕은 항우에게는 조헐 구조를, 유방에게는 관중을 돌파하여 진제국의 수도 함양을 점령하게 한다. 출정에 앞서 초회왕은 “관중關中을 먼저 공략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된다.”고 하여 항우와 유방 사이에 불화의 시초를 놓게 된다.

이후 유방은 민심을 얻으며 서쪽으로 진격하게 되는데, 팽월彭越의 도움으로 지금의 산둥성 금향 서북쪽 창읍을 공략하고, 성문지기 소졸 역이기酈食其의 건의로 진류를 수중에 넣어 군량미를 확보하고, 장량張良의 계략으로 지금의 허난성 남양에 해당하는 완성宛城을 포위하고, 진회陳恢의 전략으로 남양군수를 투항하게 했다.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유방 자신은 별로 하는 것은 없지만 주변 사람의 건의를 잘 경청하고 그대로 실현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아 마침내 BCE 207 갑오년에 무관武關을 돌파하여 관중의 동남방으로 진출하게 된다. BCE 206년 진3세 황제인 호해의 조카 자영은 간신 조고를 제거하고 소복차림으로 유방에게 황제의 옥새와 군대 통솔권 병부를 들고 와 항복하니 이 해를 역사에서는 고조 원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혹하고 복잡한 진나라의 법을 대신해서 그 유명한 약법3장約法三章을 선포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항우는 BCE 206년 지금의 허난성 영보현 동북방에 위치한 그 깊고 험준함이 상자(函)와 비슷하다는 천하제일험관天下第一險關인 함곡관函谷關에 당도한다. 유방의 군대가 관문을 열어주지 않자 진노한 항우는 관문을 돌파, 산시성 임동현 동북방 희정戱亭에 진을 쳤다. 유방군과 거리 불과 40리(16km). 이튿날 새벽 총공세를 펴기로 결정했다. 유방군 10만, 항우군 40만으로 중과부적인 위기일발의 순간, 항우의 또 다른 숙부인 항백項伯은 장량을 구출하려고 한다. 사실을 전해들은 유방은 이튿날 홍문鴻門으로 달려가 항우에게 비굴한 언사로 사과하고 굴복하는 체한다. 항우의 모사인 범증范增의 거듭된 살해 기도에도 불구하고 유방은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항우는 일생일대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그 유명한 홍문지연의 긴장된 분위기는 항우본기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후 초회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항우는 그를 격살하고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제후들의 봉지를 정하는데, 유방은 한중왕漢中王으로 폄적하여 파촉과 한중 변두리 지역을 봉읍지로 내린다. 여기서 한漢이라는 국호가 생겨난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유방은 즉시 반발하려 하였으나,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파촉으로 향하는 외나무다리인 잔도棧道주4를 오히려 불사르며 행군을 한다. 이는 배후 공격을 차단하면서 동진하지 않을 것을 항우에게 일부러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그 와중에 소하의 건의로 한신韓信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한신의 전략을 받아들여 장병들이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이용, 드디어 초한대전楚漢大戰에 접어들게 된다.

걸출한 영웅, 서초패왕西楚覇王주5 항우項羽
중국 역사상 후세 사람들이 앙모하여 묘를 세우고, 향을 피우며 철 따라 제사를 올리는 장수가 3명 있다. 남송의 이순신 장군이라 알려진 충성의 악비岳飛,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으로 주군에 대한 충의와 의리의 화신 관우關羽(관성제군關聖帝君), 그리고 초한대전의 영웅 항우項羽이다.

그 중 항우는 그 빼어난 자질과 함께 그가 천하를 얻지 못한 실패의 원인을 많은 이들이 그의 맞수 한고조 유방과 대비하며 찾고 있다. 영웅 중의 영웅인 항우는 지금의 장쑤성 숙천현 출신으로 귀족 집안이었다. 이름은 적籍이고 우羽는 자이다. 항우는 신장이 185cm가 넘었고, 구리 항아리를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좋고(九能扛鼎) 재주가 남달랐다. 항씨 집안은 대대로 초나라 장군을 지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항項을 봉읍지로 받아 항씨가 되었다. BCE 201 신묘년 겨울 진시황제가 순시를 나서 절강 근처를 지나자 당시 22세 한창이던 항우는 그 광경을 보고 “저거 내가 한번 해봐(彼可取而代也)”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진시황제 사후 진승 오광의 반기가 있자, 전국시대 각 제후국의 근거지에서 의거가 일어났다. 그 중 항량과 항우는 물론이고 유방도 옛 초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초군楚軍이라 불렀고 반란군 중 그 세력이 가장 강력했다.

항우는 강력한 군사력과 패기, 용맹으로 단숨에 천하를 장악했으나 마지막 순간 측근들의 배신과 정치력 부재, 정책 실패로 최후의 승자가 되지는 못한다. 그의 실패 요인으로는 너무 이른 나이(24살)에 기의한데다, 성격이 급하여 한 번의 실패에도 좌절하였고, 포로들을 생매장시키는 잔인함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아랫사람을 잘 다루지 못했다. 이는 본래 자신의 부하였지만, 후에 반 항우 진영으로 참여하는 진평, 한신 등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고, 논공행상의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유방 진영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여기에 그 자신에 대한 오만함과 편견을 지닌 전형적인 독불장군 스타일로 자기 자신만을 믿는 자존심 강한 성격을 지닌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항우는 현실의 정치력에서는 한고조 유방에 밀려 천하를 얻지는 못했지만, 진秦나라 주력부대를 격파한 거록에서의 전투, 강동의 부모들을 차마 대하지 못하겠다는 참회의식, 우희와의 사랑과 비장한 이별장면, 최후의 순간 애마 추를 정장에게 선물하고 자신의 머리를 옛 부하에게 헌납해 버린 호걸의 자세 등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고 있으며, 그의 실패 또한 많은 교훈으로 화하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의 삶에 대해 후대의 많은 시인들이 애도하는 시를 남겼는데, 송나라의 애국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육유陸遊(1125~1210)는 [항우]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팔 척의 장군에 천리마 추가 있고 八尺將軍千里騅
산을 뽑고 무쇠 솥 들어 올리는 괴력 쇠하지 않았건만 拔山扛鼎不妨奇
범증이 있는 힘을 다해도 베푸는 바 없더니 范增力盡無施處
오강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깨닫는구나 路到烏江君自知
처음 두 구절은 항우의 용맹함을 읊고 있고, 지모의 대가 범증을 얻고서도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인재를 잃어버린 항우, 그랬던 그가 오강에 이르러서야 천명을 깨닫게 되었다는 애잔함을 나타내고 있다.
당나라 말기 시인인 두목杜牧은 제오강정題烏江亭이란 시에서 항우가 강동으로 넘어가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권토중래라는 고사성어가 나온 시이기도 하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라 했거늘 勝敗兵家事不期
수치를 참고 견디는 것이 진정한 사내대장부 包羞忍恥是男兒
강 건너 동쪽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거늘 江東子弟多才俊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왔다면 결과는 알 수 없었으리 捲土重來未可知

한고조 유방은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주고 고인을 애도하는 눈물을 흘렸다. 질풍노도와 같이 살았던 서초패왕 항우, 그가 자결할 때 나이는 불과 서른 하나였다.

건곤일척의 승부 초한대전楚漢大戰 그 진정한 승자는?


유방은 소하에게 파촉의 세금을 거둬 군량미 및 보급 행정을 맡기게 하는데, 이 조치는 그가 천하를 얻게 되는 가장 결정적 원인이 된다. 이후 한신에게 명해 잔도를 복구하는 척하면서 진창陣倉을 습격하여 일거에 관중세력을 제압하였다. 이에 유방은 낙양에서 마을 장로 동공董公의 건의를 받아들여 초나라 의제義帝를 격살한 항우의 죄상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대성통곡하는 쇼맨십까지 연출하였다. 일진일퇴의 싸움 중에 유방은 형양滎陽에서 항우에게 포위를 당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이때 진평陳平의 반간계反間計로 항우의 유일한 참모인 범증을 항우에게서 떠나게 하고, 유방 자신으로 위장한 장군 기신紀信과 갑옷 입은 군사로 꾸민 여자 2천 명을 동문으로 내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했다. 유방 일행은 항우의 군사들이 방심한 틈을 타 서문으로 탈주에 성공하게 된다. 이즈음 항우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반기를 들면서 초한대전은 항우 대 반 항우진영의 싸움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개별적인 전투는 대체로 항우 쪽이 우세했지만, 전체적인 형국은 항우의 힘을 소진시키며, 유방군은 항우를 포위하는 전략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에 BCE 203 무술년 8월, 진퇴양난에 빠지면서 군량이 바닥난 항우는 유방에게 휴전을 제의하고 천하를 양분하기로 합의했다. 지금의 허난성 개봉 일대에 해당하는 홍구鴻溝주6를 경계로 동쪽은 항우, 서쪽은 유방이 관할하기로 했다. 휴전이 성립되자 항우는 포로로 잡았던 유방의 부친과 처자식을 돌려보내고 군대를 해산하여 동쪽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피폐해진 항우의 군대를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장량과 진평이 진언하자 유방은 마음을 돌려 항우의 뒤를 추격한다. 유방과 한신, 팽월, 경포, 주은 등의 30만 대군은 지치고 굶주린 항우의 군대를 해하垓下로 밀어붙이게 된다. 홍구에서 맹약을 맺은 이후 4개월 후인 이때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깊은 밤 사방에서 불어오는 고향 초나라 노래가 울려 퍼지자,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깨달은 항우는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여 지금의 안휘성 화현 동북방 우강烏江에 이르러 자결하고 만다. 장장 4년에 걸친 초한대전은 서초패왕 항우의 자결로 막을 내리게 된다. 고조 5년 BCE 202 기해년 유방은 항우에게 거둔 단 한 번의 승리로 마침내 천하를 움켜쥐어 전한(BCE 206~CE 8), 후한(25~220) 도합 400여 년에 걸친 한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한고조 천하통일 제일의 음덕자陰德者 상국相國 소하蕭何
초한대전에서 줄곧 수세에 몰렸던 유방이 천하를 얻게 된 결정적인 배경에는 상국相國(승상丞相) 소하蕭何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소하는 유방과 같은 패현 사람으로 평민시절부터 그의 일을 돌봐 주었다. 아마도 유방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그릇을 알아차린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그의 사상적 배경이 도가적인 점도 작용했으리라 보인다. 이런 사상적 배경과는 별개로 소하는 청렴결백하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두뇌를 가지고 있었고, 법제에 정통하고 수리에 밝으면서도 약삭빠르게 구는 구석은 없었으며, 침착하고 과묵한 가운데 묵묵히 일처리를 함으로써 인사행정 달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소하의 일처리는 지방관리들 중 제일로 모든 일의 전후사정을 파악하여 조리 있고 명백하게 처리했다고 한다.

유방군이 함양에 진입하자 다른 장수들은 금은보화를 취하였지만 그는 궁실로 가 법률조문과 지적도 및 호적부 등의 문헌을 감추어 보관하여 후에 초한대전의 승리에 밑거름이 되게 했다. 유방이 한왕이 되자 곧바로 승상이 되었고, 한신을 발탁하여 대장군에 임명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 소하는 후방에 남아 승상의 신분으로 파와 촉 지방을 진무하고 법령을 반포하여 한나라의 기반으로 만들었다. 그의 일처리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 소상국세가(史記 卷五十三. 蕭相國世家)에서는 ‘소하위상蕭何爲相 강약획일顜若畫一’(소하가 정승이 되어 정치를 펴 나감이 한 일 자를 그은 듯이 분명하고 가지런했다)이라 기록되어 있다.

소하는 초한대전 중에 법령과 규약을 제정하고 종묘사직을 세웠고, 궁실을 건축하고 관중의 각 지역에 군과 현을 세워 행정조직을 완비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펼 때마다 유방에게 먼저 품한 후 그의 동의를 구하여 일을 행하였고 부득이 고하지 못할 때는 시의 적절하게 일을 처리했다가 나중에 그 일의 결말을 고하곤 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소하는 스스로 알아서 병력과 물자를 보급함으로써 유방이 항우에게 연전연패하면서도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공으로 한漢 제국 건국공신 중 그 자리가가 제일이 되었다. 오긍의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는 소하의 공에 대해서 “한나라의 소하는 비록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지 않았지만, 전시에는 후방에서 지령을 내리고, 전후에는 한 나라 고조를 천자로 추대했기 때문에 그 공이 첫째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의심 많은 한고조 유방 아래에서도 겸손한 처신으로 전답과 가옥을 살 때는 항상 외딴 벽지에 마련하고, 집을 지을 때는 담장을 세우지 않은 검소한 생활 모습을 보였다. 그는 한 혜제 2년 BCE 193년에 죽었다. 한고조나 여태후에 의해 토사구팽당한 여러 공신들과 달리 나름대로 고종명考終命(하늘이 부여한 천명天命을 다 살고 죽음을 맞이함)을 하였다. 시호는 문종후文終侯로 소하의 후대에 가서 범죄를 저질러 후작과 봉호를 잃어버린 것은 4대에 가서였고, 매번 그 후계를 이을 사람이 끊어졌지만 그 때마다 황실에서는 후손을 찾아내어 찬후酇侯의 작위를 잇게 했는데 소하가 이룩한 공훈은 다른 공신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고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정잡배 유계가 한고조 유방이 된 이유


막가는 시정잡배 중에서도 저질인 유계劉季가 별 기반도 없었으면서 여러 제후국의 후예들과 특히 불세출의 영웅 항우를 이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유방은 그의 단점을 만회하고도 남을 몇 가지 능력, 즉 경청과 기민한 임기응변 능력 그리고 용인술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일단 그는 소통 능력이 뛰어났다. 천하를 얻어가는 과정에서 비록 성질이 까칠해 종종 수하들을 함부로 하기는 했어도 마음을 비우고 주변에서 하는 간언을 잘 들었다. 그것도 그냥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如何?’하며 해결책을 찾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반면 항우는 ‘어떠냐何如!’하며 자신을 과시하면서 우쭐하기만 한 점이 달랐다.

여기에 유방의 임기응변 능력은 조건반사적이었다. 항우와 대치할 때 항우가 쏜 화살이 가슴에 박히자 그 위급한 순간에도 머리를 굴려 발가락을 움켜쥐며 “저 개자식이 내 발가락을 맞췄네.”라며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또한 항우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는 한신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한신이 제나라를 평정한 뒤 그 지역을 제대로 관할하기 위해서는 후임자로 일단 자신이 대행했으면 한다고 하자 처음엔 버럭 화를 냈다. 이에 장량이 옆에서 발을 밟자 즉각 깨닫고 “사내대장부가 제후국을 점령했으면 바로 왕이 되는 것이지 무슨 대행이냐”하며, 왕으로 임명해 한신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스로도 언급하듯이 그는 인걸을 활용할 줄 아는 인사人事의 달인이었다. 전략을 세우는 일은 장량, 기묘한 책략은 진평, 군사 방면은 한신, 돌격대장은 번쾌 그리고 가장 중요한 후방에서 백성을 안정시키고 보급을 책임지는 행정 책임자 소하까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게 한 용인술의 천재, 그가 바로 한고조 유방이다.



주1. 이 글에 나온 한시 번역 중 해하가와 대풍가는 김원중 교수의 역으로 했고, 다른 시의 번역은 마나베의 역으로 했다.

주2. 여기서 풍패豊沛가 유래했다. 유방의 출신지로 곧 그가 천하의 기업을 시작한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훗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지리산 근처 황산에서 왜군을 토벌하고 관향인 전주 오목대에서 한고조가 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잔치를 벌이며 대풍의 노래를 부르며 새 왕조 개창의 포부를 밝힌다. 이후 전주는 조선왕실의 발원지이기에 지금도 전주객사의 이름을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하고, 이 풍패지관의 남쪽에 있는 문을 풍남문豐南門이라고 한다.

주3. 이는 상나라 시조인 설의 어머니가 제비 알을 먹고 낳은 내용과 비슷하다. 이에 혹자들은 유방이 태공의 아들이 아니라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고귀한 신분을 흠집 내기 위한 호사가들의 말일 가능성도 있으며, 후에 유방이 대업을 이룬 뒤 태공을 대하는 태도(보통 평민들의 부자관계처럼 대했다)나 초한대전 중에 태공이 항우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점 등을 보아서는 자신들의 미천한 신분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주4. 관중關中, 즉 중원에서 파촉 지방으로 들어가는 사이의 험준한 지대에 건설된 수송용 통로로 당시에는 유일한 통로였다. 절벽에 붙어서 건설된다든지 가교로 절벽 사이에 놓는 형식인데, 이걸 끊는다는 의미는 중원과의 단절을 하겠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주5. 진秦 제국을 붕괴시킨 항우는 아홉 개 군을 영지로 하여 팽성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했다. 패왕이란 맹주란 뜻이다. 초나라는 지금의 호북성 강릉 일대를 남초, 소주 일대를 동초, 팽성 일대를 서초라 불렀다. 팽성을 근거지로 했기에 항우를 서초패왕이라 칭한 것이다.

주6. 홍구鴻溝는 옛 운하의 이름으로 랑탕거狼湯渠라 부르기도 한다. 항우와 유방이 홍구를 경계선으로 휴전한 이후, 사람들은 ‘분명한 경계선’을 비유하여 ‘홍구’라 부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 대원출판, 2003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2
이인호, 이인호 교수의 사기 이야기, 천지인, 2007
김원중, 사기본기, 민음사, 2011
마나베 쿠레오 저 윤길순 역, 영웅의 역사 3 패권쟁탈 유방편, 솔, 2000
정범진외 옮김, 사기열전 중, 까치,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