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의 복지국가 스위스

[세계지역문화탐방]
스위스(독일어 Schweiz, 프랑스어 Suisse, 이태리어 Svizzera) 연방 공화국은 유럽대륙의 오지인 알프스산맥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북으로는 독일, 동으로는 오스트리아와 리히텐슈타인, 남으로는 이탈리아, 서로는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한반도의 5분의 1 정도인 영토와 빈약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스위스는 불굴의 지혜와 용기로써 오늘날 세계 굴지의 복지 국가를 일구어 냈고, 환경과 생태를 아우른 선진국형 경제 모델로서 손색이 없는 모범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영세 중립국으로서 주변 강국의 영향을 최소화하며 자주국방을 꾸려가는 그들의 지혜와 전략은 우리에게 좋은 귀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알프스의 복지국가 스위스를 찾아가 본다.


양우석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1.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유럽 중앙부의 내륙에 위치한 나라 스위스는 정식 국명이 헬베티아 연방(라틴어:Confoederatio Helbetica)이지만, 보통은 스위스 연방(독일어:Schweizerische Eidgenossenschaft, 영어:Swiss Confederation)이라 부른다. 북으로는 독일, 서로는 프랑스, 남으로는 이탈리아, 동으로는 오스트리아 및 리히텐슈타인 등 5개국과 총 1,858㎞에 걸쳐 국경을 접하고 있다. 스위스는 북위 46~48도에 위치하며, 남북간 최대 거리는 약 220㎞, 동서로는 약 348㎞에 이르며 국토의 4분의 3이 산과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최대고도는 몬테로사 산의 두포우르슈피체Dufourspitze봉으로 4,634m, 최저고도는 라고 마조레Lago Maggiore호의 하안으로 193m이다. 국경선은 1,899㎞이고, 가장 긴 거리의 국경을 맞댄 곳은 이태리와의 국경으로 약 744㎞이다. 면적은 41,277㎡, 인구는 8,061,516명(2014년 7월 기준)이다.

국토의 23.9%는 농업 용지, 13%는 알프스식 농업지역, 6.8%는 주거지, 25.5%는 비생산지, 30.8%는 숲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역별로 구분해 보면 약 48%는 알프스산맥, 12%는 전前알프스, 30%는 중부지역, 10%는 쥐라Jura 산맥이다. 중부지역Mittelland은 평균 해발 450m로서 경제 활동의 대부분과 도시들이 집중되어 있는 윤택한 농업지역이다. 쥐라산맥은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질 좋은 목초지다. 스위스에는 2,000m 이상의 봉우리가 3,350개 이상 있는데, 가장 높은 12개의 봉우리가 발리스 알프스Walliser Alpen 산역山域에 위치한다. 스위스의 알프스Alps 산맥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산은 4,478m의 마터호른Matterhorn봉이다. 고지대에서는 연간 6~7개월 적설이 있고 2,500m 이상의 설선에서는 빙설원 또는 빙하지대가 펼쳐져 있다. 가장 길고 커다란 알프스 빙하는 대 알레츄Aletsch 빙하로서 길이는 23㎞이고, 면적은 82㎢로 유럽에서 가장 크다. 마지막에 생긴 스위스 빙하는 15세기 초에서 19세기 중반에 형성된 것이다. 또한 알프스와 쥐라 산맥에서부터 깊은 계곡들이 이어져 레만호Lac Léan(Lake Geneva), 보덴호Bodensee(Lake Constance), 뇌샤텔호Lac de Neuchâel(Lake Neuchâel) 등 다수의 호수가 있다.

스위스는 유럽대륙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해양성, 북유럽성, 지중해성, 대륙성 등 4개 기후권이 교차하며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스위스 기후의 가장 큰 특징은 푄Fön으로,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이 바람은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의 산맥쪽에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를 유발한다. 특히 북향 푄은 북부에는 강풍을, 남부에는 집중 호우를 발생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연평균 기온은 8~10℃이며, 4계절이 있으나 계절별 기온차가 적어 비교적 온난한 날씨를 보인다. 강우량은 북부 평지의 경우 연평균 1,000㎜, 남부 산악지역의 경우 2,000㎜이며, 일조시간은 연 1,500~1,600시간이다.

스위스의 역사
민족의 기원과 고대·중세 역사
스위스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에야 비로소 중부 스위스에 말목으로 집을 지은 사람들이 많이 살기 시작했으며, 특히 호숫가 지역에 그러했다.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는 알프스 산맥을 넘는 길이 나면서 초기 형태의 무역이 일어났다. BCE(기원전) 15세기경 스위스인의 직접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켈트Celt계 헬베티아Helvetia족이 독일 지역에서 남하하여 스위스 중부 고원지대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교한 돌과 나무로 집을 짓고 관계시설을 갖추어 경작을 하였고, BCE 8세기경에는 주화가 사용되었으며 BCE 5세기경에는 이 지역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헬베티아족은 서쪽으로 이동하다 지금의 프랑스 동쪽에서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이끄는 로마군에 패하여 다시 중부 고원으로 후퇴하였고, BCE 58년부터 CE(기원후) 400여년까지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는데 로마인들은 처음으로 이곳을 헬베티아라고 불렀다. 켈트족은 빠르게 로마의 문화와 생활 양식을 수용했다. 이로 인해 도시들이 생겨났는데, 아우구스타 라우리카Augusta Raurica는 로마 식민지 스위스의 수도였다. 4세기에는 스위스 지역에 기독교가 전해졌다. 455년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에는 알레만족Alemanni이 오늘날 스위스 북부지역, 로마화된 부르군트족Burgundians은 서부지역, 랑고바르드족Langobardi(Lombards)은 남부지역에 각각 정착하여, 현재와 같은 독어권, 불어권, 이탈리아어권, 로망슈어(레토로만어)권의 언어별 지역경계가 생겨났다.

스위스 동맹 및 독립 연방의 형성
게르만의 여러 부족 중에서 프랑크족이 가장 강력한 왕국을 만들었는데, 스위스는 6세기에 프랑크족이 다스리는 프랑켄제국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게르만법에 의한 세습재산 분할제 때문에 국토의 분열과 항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 여파로 인해 스위스도 여러 지역으로 분할이 되었다. 1032년 스위스 지역은 부르군트에 합병되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영향력보다 지역 제후의 세력이 큰 상황이었으므로 스위스 지역도 자주성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화되었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지역 제후인 체링엔Zähringen가家가 스위스 지역을 지배했던 시기와 명목상의 국왕(신성로마 황제)만 있을 뿐 실질적인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신성로마제국의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1256∼1273)까지만 해도 스위스는 비교적 자유로운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억압적인 통치 방식을 행했던 합스부르크Habsburg가의 루돌프 1세Rudolf I 가 1273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자 스위스의 자치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291년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위스 지역에 있는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 등 3개 지역의 수장이 단합하여 상호지지를 약속하는 최초의 원형 칸통(Ur-Kantone)을 형성, 합스부르크 왕가에 공동 대항하기 위한 동맹(Helvetic Confederation) 서약을 맺은 바, 이것이 스위스 연방의 시초가 되었다. 이 동맹 서약일인 8월 1일은 오늘날 스위스의 국경일이 되었고, 현재의 국명 또한 동맹의 일원인 슈비츠Schwyz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1332년부터 1513년까지 루체른Luzern, 취리히Züich, 글라루스Glarus, 축Zug, 베른Bern, 프라이부르크Freiburg(Fribourg), 졸로투른Solothurn, 바젤Basel, 샤프하우젠Schaffhausen, 아펜첼Appenzell 등 10개의 주가 스위스 동맹에 추가로 가입하면서 세력을 규합한 끝에 스위스는 마침내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격을 물리치고 독립을 하게 되었다.

종교전쟁과 연방국 체제의 확립
그런데 13개 칸통Kantone 연방은 공통의 헌법이나 정부 기관이 없이 다만 의회에 대표만을 파견했다. 이 13개 주들은 여러 가지 여건이 서로 달라서 단결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로 농촌지역의 주들은 형식상 민주주의를 지켰으나 일부 부유층이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수익성 사업과 지위를 매수하여 독점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내부 알력과 사적인 협약이 체결되면서 주들 간의 결속이 느슨해지고, 취리히 성당 소속의 츠빙글리 Ulrich Zwingli와 제네바의 칼뱅Jean Calvin이 중심이 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1519년 츠빙글리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선서를 시작하고 우상 등의 폐지를 비롯한 급진적 개혁을 외쳤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그 영향을 받은 취리히Züich는 용병제 폐지, 우상 폐지, 빈민구제법 등 급진적인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는 이웃 주들로 전파되었고, 8개의 신교(개신교) 주와 소수의 구교(가톨릭) 주 간의 대립을 야기했다. 이후 칼뱅이 있는 제네바Geneva가 신교 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종교분쟁을 거치면서 대내적으로는 신교와 구교의 이원화 전통이 확립되었다. 1528년 베른회의에서 각 주의 신앙의 자유를 채택했으나 두 차례의 전쟁 끝에 프로테스탄트 쪽이 패배하고 츠빙글리도 전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분열로 인하여 스위스의 위상이 흔들린 것은 아니다. 30년전쟁(1618~1648) 중에도 중립을 지켜 오던 13개 주 동맹은 30년전쟁을 종결짓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Westfalen 조약에서 대외적으로 중립국가로 공인을 얻고 독립국가로 승인을 받게 되었다. 1685년 낭트 칙령이 폐지되자 많은 신교도가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이주해 왔으며 계몽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헬베티아 공화국과 새로운 체제 복구
그 후 150여년 간 각 주정부들은 소규모의 과두정치를 폈다. 18세기에 스위스는 정치적으로는 세력을 키우지는 못했지만 부가 축적되면서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중요한 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스위스의 과두정부는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1798년 프랑스가 침략하여 스위스 동맹을 해체하고 지도자들을 추방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이곳에 헬베티아 공화국Helvetic Republic의 수립을 선포했으며 봉건적 특징을 폐지하고 신앙의 자유를 부여했다. 이로써 농민에 대한 도시의 우월성과 주들 간의 지배와 종속 관계가 철폐되고 인간 혁명이라는 슬로건 아래 평등과 자유가 선언되었다. 프랑스는 스위스에 진보를 선사했으나 실제로는 현금과 물자 압수, 인력 징발 등 점령군으로서의 약탈도 심각했다. 게다가 헬베티아 공화국은 프랑스 본국에 보급부대를 차출해야 했다. 그래서 스위스 전국은 약 1년 동안 전쟁터로 바뀌게 되었다. 또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이 스위스에서 격돌했다. 이렇게 하여 헬베티아 공화국의 지위는 추락하고 구연맹으로 되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때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황제가 되면서 1802년 스위스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연방주의자와 중앙집권주의자 등이 대립하여 무력분쟁을 빚기에 이른다. 1803년 나폴레옹은 다시 스위스를 침공하여 중재법을 공포하고 19개의 칸통으로 이루어진 슈비처란트라는 연방국가를 구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스위스는 다시 영세중립을 인정받고 새로운 주들을 더 편입시켜 22개의 주로 이루어진 스위스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1812년 스위스 연방은 대내외적으로 중립을 선언하였다. 1815년 비인회의에서 유럽 열강들은 스위스를 영세중립국으로 인정하였고, 동년 파리조약에서 이를 재확인함으로써 스위스는 최초로 국제사회로부터 영세중립을 보장받게 되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보수적인 비인 체제에 반발해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스위스는 정치망명자의 피난처가 되었고 스위스 내부에서도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내분이 일어났다. 공업화된 주들이 신교로 전향하게 되면서 자유파가 우위를 점하게 되자 보수 구교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분리동맹(Sonderbund)’을 결성했고 결국 1847년 내전이 일어나 신교측이 승리를 거둔다. 그 결과로 1848년 국가동맹은 ‘헬베티아연방(Confederatio Helvetica: CH)’이라는 단일 국가로 독립하게 된다. 경제 불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남미로 이민을 떠나게 되자 연방헌법의 개정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단일국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연방국가로 탄생한 바로 이때가, 스위스가 본격적인 근대국가로 독립해 발전하기 시작한 해이다. 이때부터 국가적 결속력이 강해지고 강력한 사회주의적인 법제가 시행되었는데, 여기에 철도의 국영화와 사회보험제도가 포함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스위스는 가장 근대적인 공화국 형태의 연방헌법을 선포하고 베른Bern을 수도로 정했으며, 연방정부와 양원제 의회를 구성하게 된다.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에 맞선 스위스 연방 형성의 과정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압제에 대항하여 1291년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 지역이 연합해 투쟁 동맹체를 결성하면서 비롯된 초기 스위스 연방은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 세력과의 대결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세력이 더욱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그 첫 대결은 1314년 독일 왕의 선발에서 바이에른주의 비텔스바커 루드비히와 합스부르크가의 프리드리히 쉐네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촉발되었다. 스위스 동맹국들은 바이에른의 루드비히를 지지했고, 이 사건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레오폴드 3세가 옛 영토 회복을 내걸고 1315년 동맹국들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동맹국이 승리하자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서 1353년까지 루체른Luzern, 취리히Züich, 글라루스Glarus, 축Zug, 베른Bern 주가 합세하였고, 동맹국은 1386년과 1388년에도 합스부르크가의 군대를 격퇴했다. 1415년에는 합스부르크가의 발원지인 아르가우Aargau를 정복했다. 그러나 본래 국가를 형성할 의도가 없었던 8개주의 동맹은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급급했다. 도시적 성격의 주와 농촌적 주들 간의 대립이 심각해서 늘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 후 취리히와 기타 동맹국들 사이에는 토겐부르크 백작직 상속 문제로 인한 전쟁이 일어났고(1436~1450), 취리히는 합스부르크가와 연합했다. 1460년 합스부르크가는 전쟁을 일으키는데, 그 결과 티롤 지역의 지기스문트Sigismund 공작이 1474년 부르군트의 칼 퀴넨 공작의 위협으로 인하여 스위스의 구동맹을 독립적인 국가로 승인하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1474년 동맹군은 프리드리히 3세의 희망에 따라 칼 퀴넨에 대항하여 로트링겐과 합스부르크가가 연합한 부르군트전쟁에서 승리했다. 부르군트에 대한 군사적 승리는 동맹의 독립성을 강화했다. 1481년에는 프라이부르크Freiburg(Fribourg)와 솔로투른Solothurn 주가 스위스 동맹에 가입하였다. 스위스는 149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스밀리안 1세를 상대로 벌인 슈바벤전쟁Schwaben War에서 승리하여 바젤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합스부르크왕가의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16세기 초에는 바젤Basel, 샤프하우젠Schaffhausen, 아펜첼Appenzell이 스위스동맹에 가입하여 13개 주의 동맹이 형성된다. 이 때 사보이에서 베른을 빼앗으면서 세력을 더욱 공고히 했지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북부 이탈리아 도시 간의 전쟁을 겪으면서 1515년 마리냐노에서 프랑스군에게 대패하여 유럽의 주요 군사 세력의 입지를 상실하고 프랑스와 영속적인 동맹 관계를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스위스는 정치적 중립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 후 1803년에는 상트갈렌St. Gallen, 그라우뷘덴Graubünden, 투르가우Thurgau, 티치노Ticino, 아르가우Aargau, 보Vaud 등 6개 주가 스위스 동맹에 가입하고, 다시 1815년 발레Valais, 뇌샤텔Neuchâtel, 제네바Geneva 등 3개 주가 스위스 동맹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운터발덴Unterwalden, 바젤Basel, 아펜첼Appenzell 주는 역사적, 종교적 이유 등으로 2개 주씩 분리된 이후 각각 독립된 주로 인정받았는데, 운터발덴Unterwalden 주가 옵발덴Obwalden 주와 니드발덴Nidwalden 주로, 바젤Basel 주가 바젤슈타트Basel Stadt 주와 바젤란트Basel Land 주로, 아펜첼Appenzell 주는 아펜첼 아우서로덴Appenzell Ausserrhoden 주와 아펜첼 인너로덴Appenzell Innerrhoden 주로 분리되었다. 이와 같은 반주半州(Halbkanton, demi-canton)까지 포함하여 총 25개의 주가 스위스 동맹에 가입해 현재의 국경을 확보하게 되었다. 1874년에는 헌법 개정으로 25개 주 연방공화국을 채택, 스위스 동맹이 연방국가로 발전하면서 국민투표제가 도입되고 근대 독립국가로 출발하였으며, 1978년에는 프랑스어권의 새로운 주 쥐라Jura가 베른Bern 주에서 분리되어 탄생함으로써 현재의 26개주가 성립되었다.


스위스 연방의 현재
유럽대륙에서 아메리카 등과의 해외 연결망과 철도망 건설은 1870년대 스위스 농업에 타격을 주었다. 이를 통해서 동유럽이나 아메리카로부터 값싼 농산물이 유입되었던 것이다. 농부들은 농업조합과 공동체 치즈공장을 이용하여 이에 맞서고자 했다. 이제 구식 농작물 수출 대신에 치즈, 연유, 초콜릿 등 우유 상품이 외국에 팔렸다. 시계와 견직물 산업은 옛날부터 대부분의 생산품을 외국에 팔았다. 1874년 시작된 오랜 경제 불황은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섬유 산업이 아성을 잃은 것이다. 그 대신에 화학과 기계산업이 들어섰다. 철광석과 같은 지하자원은 나지 않았지만 이 분야에서 수출산업들이 일어나서 국제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다. 1874년에는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개정을 단행했으며 국민투표제를 도입했다. 19세기는 스위스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해 현재와 같은 세계적인 위상을 지닌 국가로 부상한 도약기였다. 중세의 독점적 경제질서를 대변하는 길드가 붕괴되면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선택한 스위스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냄으로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872년 알프스를 종단하는 기차터널(상트 고타르트) 건설이 시작되어 1882년 완공되었다. 장장 15㎞나 되는 이 터널 공사를 독일과 프랑스가 지원한 것이다. 1844년과 1870년 중반기 사이에 1300㎞의 새로운 철도 노선들이 생겨났고 1885년까지 1400㎞가 추가로 건설되었으며 1914년까지 700㎞가 더 추가되었다. 20세기 들어 스위스는 비인회의 때부터 고수한 중립정책을 계속 지켜 나가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국제연맹에 가입했지만 제2차 대전 때는 국제연합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나치의 자금 공급원의 역할을 하고 탈출한 유대인들을 강제로 송환하는 등 역사의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다. 비록 국제연합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그 산하 기구들에서는 적극 활동했다. 그러나 유럽통합에의 열망에는 외면했다. 그 대신 1972년 유럽 경제공동체와 자유무역협정에 서명했다.

1986년에도 스위스는 국제연합 참여를 거부했으며, 1992년에는 국민투표 결과 유럽경제지역(EEA: European Economic Area; EU 가입 전 단계) 가입이 부결되고, 2001년 국민투표에서도 유럽연합EU 가입협상(‘Yes to Europe’)이 반대 77%로 부결됨에 따라 유럽공동체EU 가입을 보류하는 대신 분야별 양자협정을 추진하였다. 2002년에 가서야 스위스는 국제연합UN 가입을 위한 국민투표를 54.6%의 찬성으로 가결시켜 190번째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스위스는 현재 변혁을 겪고 있으며 나름대로 다시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2.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스위스의 정치는 공통의 언어와 문화가 아니라 역사와 신화, 자유민주주의와 지방자체제의 전통 및 중립적인 다언어국가, 유럽에서 소국으로서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는 자부심에서 이룩된 ‘의지의 국가’(Willensnation)로 인각된다. 이에 따라 정치 체제에는 지방자치제, 국민의 인권, 직접민주주의, 외교적인 중립성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포함되어 있다. 정치 체제의 세 차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연방정부와 주州에 해당하는 칸톤 혹은 칸통(독: Kanton, 프: Canton), 지방자치단체에 해당하는 시·군(Gemeinde, Commune)이다. 시·군은 정치적 자치권을 가지면서 자체의 헌법을 가지고 있지만 칸통의 감독을 받는다. 칸통도 독자적 헌법을 가지고 있는데, 연방투표 시에 표를 행사할 수 있다.

국가권력
연방 헌법은 1848년 제정하고 1874년에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통신, 외교, 관세와 같은 특별한 부문은 연방이 담당하고 특성에 따라 칸통과 게마인데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있다. 연방 정부는 헌법상 최상위에 있어서 세금, 우편, 전화를 독점 관할하며 화폐 발행권을 갖는다. 국민의 안전 보장, 외교 관계, 조세, 체신, 금융, 병역 등의 업무를 조정, 감독한다. 칸통은 독자적인 행정, 입법, 사법을 구성 운영하며, 연방 정부의 결정을 시행한다. 그러나 공공재산, 학교, 경찰, 소방, 보건, 민방위 운영 등에서는 전권을 행사한다. 험준한 산악지대라는 지형적 요인을 감안할 때 스위스는 예로부터 국가단위보다는 마을과 칸통 위주로 정책이 운영되어 왔다. 남자들에게는 광범위한 참정권이 주어진다. 여성들은 1971년부터 연방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스위스 유권자들은 찬성 62만, 반대 32만여 표로 자국 여성 참정권을 승인함으로써 주별, 지방별 선거제도에도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81년에 실시한 국민투표로 남성과 여성이 비로소 동등한 법적, 경제적 권리를 갖게 되었다. 스위스는 가장 먼저 공화정을 시작한 나라임에도 유럽에서 여성 참정권을 가장 뒤늦게 인정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보통 선거 제도의 확립이 예외적으로 늦었던 나라다. 스위스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 지는 얼마 안 되었다.

행정부
스위스는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로 정부 형태 또한 연방정부와 지방정부로 구성된다. 연방정부는 국내외적으로 발생하는 주요 사항에 대한 상황 파악 및 처리, 국가 기본목표 설정 및 이행방안 강구 등 국가의 통일적인 업무를 주로부터 위임받아 통치한다. 지방정부는 연방정부에서 위임하는 사항, 거주민 등록, 민방위, 교육, 복지, 에너지, 도로건설, 지역 환경 관리, 세금 등을 독자적으로 관장한다. 각 주는 독자적인 주헌법, 주의회, 주정부, 주법원 등을 보유한다.

연방정부 산하에는 연방각의와 연방각료, 대통령이 있다. 연방각의(Bundesrat, Federal Council)는 연방의회에서 4년 임기로 선출된 7명의 각료로 구성되며, 중요 정책을 입안하여 의회에 제안한다. 연방각료는 아니지만 연방장관급에 해당하는 연방사무처에서 연방각의를 주재한다. 연방각의의 주요 업무는 국내외적으로 발생하는 주요 사항에 대한 상황 파악 및 처리, 국가 기본목표 설정 및 이행방안 강구, 정부 정책 계획 및 지원, 연방행정부 관리, 연방의회에 연방법 및 연방결의안을 제출하는 일 등이다. 의회가 선출하는 7명의 연방각료(장관)가 연방각의를 구성하며 임기는 4년이다. 연방정부에는 외교부, 내무부, 법무·경찰부, 국방·민방위·체육부, 재무부, 경제부, 환경·교통·에너지·통신부가 있다. 연방의회는 7명의 연방각료 중 1명을 연방각의 입각 순서에 따라 매년 윤번제로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대통령의 직위는 다른 연방장관과 동일하며, 연방각의를 주재하고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직위에 불과하다.

1971년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국민투표가 통과된 이후 엘리자베트 콥이 스위스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이 되었다. 1989년 아펜첼Appenzell 주가 스위스에서 마지막으로 여성 투표권을 허용한 이래, 1999년에는 루트 드레퓌스Ruth Dreifuss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지방정부 조직은 26개 주州(칸통Canton) 및 2,636개의 시·군(게마인데Gemeinde, Commune)으로 구성되며, 지방정부는 연방정부에서 위임하는 사항, 거주민 등록, 민방위, 교육, 복지, 에너지, 도로건설, 지역 환경 관리, 세금 등을 독립적으로 관장한다. 각 주는 독자적인 주헌법, 주의회, 주정부, 주법원 등을 보유한다. 주의회 및 군의회 의원선거는 매 4년마다 실시하며, 주의 크기에 따라 58명에서 180명의 주 의원이 있다. 시·군은 주 법규에 의한 범위 내에서 자치권, 입법권, 조세권, 행정권 등을 가진다. 주州는 원래 하나의 국가 형태이며, 1848년 26개 주들이 동맹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의 스위스 연방을 이루었다. 26개 주 중 6개는 원래 하나의 주였으나 역사적 이유 등으로 분리된 반주半州이다.

입법부(연방의회)
연방의 최고 통치기관으로 선거구 주민을 대표하는 하원Nationalrat(200명)과 26개 칸통을 대표하는 상원Ständerat(46명) 등 양원으로 구성되며, 양원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상원 의원은 주별로 상이한 법적 절차에 따라 선출되고 하원 의원은 비례다수결 원칙에 따라 선출되는데, 양원 의원의 임기는 모두 4년이다. 연방의회에는 원내교섭단체를 가진 정당이 열 개가 넘고, 무소속과 기타가 있다. 이 정당들은 국민이 가진 모든 정치 성향을 대변한다.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정치적 색깔이 공존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칸통 대표회의는 각 칸통에서 2명씩 파견하는 46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연방의회는 입법권, 재정권, 임명권, 감독권, 제안권 등을 행사한다. 연방법, 결의 및 각의보고서의 채택 등 각종 안건은 양원에 각각 나뉘어 회부된다. 양원은 각각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총회에서 결정한 후 타원에 송부하여 결정되면 양원 합동회의에서 최종 의결한다. 양원간 의견이 대립할 경우 각각 13명의 대표로 조정위원회를 구성, 심의한 후 양원 합동회의에서 의결한다. 연방의회의 양원은 재무, 안건심의, 외무, 과학, 교육, 문화, 사회안전, 보건, 환경, 공간기획, 에너지, 안보정책, 교통, 통신, 경제, 조세, 국가정책, 법사, 공동건설 등의 상임위원회를 구성한다. 상하 양원 의장은 매년 마지막 회기 첫날 1년 임기로 선출된다. 정기의회는 연 4회 개최되며, 회기는 3주간이다.

정당
스위스에서 근대적 의미의 정당이 처음 출현한 것은 1848년으로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보수당의 양당 체제로 출발했다. 이후 자유당은 급진자유민주당으로 개명했다. 1891년 기민당이 여당에 합류한 이래, 1929년 국민당, 1959년 사민당이 각각 집권여당에 합류하면서 현재와 같은 4당 체제의 정부 여당이 탄생했고 1980년대 환경문제가 주요 문제로 부각되면서 녹색당이 탄생했다. 국민당의 정식 명칭은 스위스국민당(SVP)이며 정치적 성향은 우파이다. 사민당의 정식 명칭은 사회민주당(SP)으로 정치적 성향은 중도좌파이다. 자민당의 정식 명칭은 급진자유민주당(FDP)으로 정치적 성향은 중도우파이다. 기민당의 정식 명칭은 기독민주당(CVP)으로 정치적 성향은 중도우파이다. 녹색당(GP)의 정치적 성향은 좌파이다.

직접민주정치 제도
스위스 국민은 일차적으로 참정권을 행사한다. 국민의 참정권은 선거, 국민제안, 국민투표, 청원 등 주로 4가지 형태로 행사된다. 국민제안Popular Initiative은 18개월 내 10만 명 이상의 서명으로 연방헌법의 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이다. 1891년 국민제안 제도가 도입된 이래 총 120건이 법적 요구를 구비한 안건으로 채택되었고, 이중 19건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으며 101건은 부결되었다. 연방정부, 연방의회 또는 국민제안으로 제기된 연방헌법 개정이나 중요 국가기구 가입은 반드시 국민투표Referendum를 거쳐 결정해야 한다. 연방 법률이나 결의에 대해 3개월 이내 5만 명의 서명으로 국민투표 발의가 있는 경우 국민투표에 회부해야 한다. 어떤 단체가 시민들에게서 일정 이상의 서명을 받아내기만 하면 유권자들은 아무리 황당한 제안이라도 찬반투표를 해야 한다. 독특한 것은 이중의 과반수 득표라는 제도이다. 이것은 중요 안건이 유효 주민투표의 과반수 찬성과 총 칸통의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통과되도록 하고 있다. 또한 모든 국민은 어떠한 국가기관에 대해서든 서면으로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아무런 법적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국가기관은 청원을 접수할 의무가 있으며, 이에 답변할 법적 의무는 없으나 거의 모든 청원이 실제 국가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법부
스위스의 법원조직은 연방 대법원과 하급심인 주 법원으로 구분되며, 대부분의 사법 사항은 주 법원에서 결정된다. 연방법원은 각 주 지방법원의 최종심 역할을 하며, 연방 하급법원의 판결이 연방헌법 및 연방법률에 부합되는지를 결정할 뿐이며, 연방법원이 제반 사법기관에 대한 감독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연방법원으로는 최고법원에 해당하는 연방대법원과 2004년 사법개혁을 위한 국민투표에 의해 설치된 연방형사법원 및 연방행정법원이 있다.

연방대법원(Das Bundesgericht)은 사법부의 최고위 조직으로 로잔Lausanne과 루체른Luzern에 소재하며, 의회에서 선출하는 임기 6년의 연방 대법관 38명과 보조법관 31명으로 구성된다.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주 정부의 결정 및 법령에 대한 헌법소원, 민·형사 재판에 대한 항소, 기관 간 소송을 관할한다.

연방행정법원(Das Bundesverwaltungsgericht)은 연방형사법원과 같이 2000년 법원 개혁에 관한 국민투표 통과로 설치되어 2007년 베른Bern에 개원했으나 2010년 중 상트갈렌St. Gallen으로 이전되었다. 최고 행정재판소로 5개 분과위가 있다.

3. 경제


스위스의 경제개황
스위스 경제는 견조한 국내수요 및 통화정책 완화 등에 힘입어 EU 회원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상황이다. 민간소비는 이민 증가, 소비자신뢰 지속, 실질임금 상승 등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주택건설도 인구구조 변화, 낮은 금리 수준 등으로 호조를 보이고 있다. 수출은 유럽경제 취약 등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경상수지 흑자는 2012년 GDP대비 10%를 상회하고 있는데 이는 금융서비스 수출 및 투자 수익에 기인한 것이다. 실업률은 2011년 중반 이후 상승세이며, 소비자물가는 수입 및 국내 상품가격 하락 등에 기인하여 2011년 2분기 이후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스위스는 원자재를 수입하여 우수한 기술력을 통해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 수출하는 기술·노동 집약적 경제체제를 이루고 있다. 자원이라곤 수지타산이 맞지도 않는 철광석이 조금 매장되어 있을 뿐이고 국토는 협소하지만 최고의 전문 기술교육을 받은 인적자원이 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 시계를 포한한 정밀 기기 제조는 세계적으로 뛰어나며 완제품 수출 의존도가 높다. 대외 교역 경제는 무역의존도가 GDP의 83%를 차지할 만큼 외국과의 수출입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농업을 제외하고는 자유무역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산업구조는 전형적인 선진국형으로, 2008년 현재 전체 취업인구 가운데 72.5%가 금융·보험·관광·서비스업 등 3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밖에 23.8%가 기계·전자·화학·제조업 등 2차 산업에 종사하는데, 그것도 중공업이 아니라 경공업 위주의 서유럽식 혼합경제 산업구조를 취한다. 그리고 3.7%가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일찍부터 은행 및 관광 등 서비스산업이 발달했다.

주요 산업
경작지는 전 국토의 4분의 1 미만이고 농업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며,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그러나 농업 기술의 발달로 생산량은 증가하는 추세이다(식량 자급자족률은 60% 수준). 농업은 GNP의 5%를 차지하며 노동력의 약 7%가 이 부문에 종사한다. 1947년부터 정부는 농산물 가격을 보장하고 있으며, 농부의 경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노력으로 농산물 수입에 할당량을 정해 놓고 있다. 주요 작물은 밀, 보리, 감자 사탕무우, 사과, 포도 등이다. 스위스 정부는 친환경적 농업정책에 힘쓰고 있으며, 연방 환경보호국에서 임야 및 토지의 관리, 물과 공기의 청결, 소음 및 쓰레기 처리 등을 감독한다. 농산물 분야에서는 치즈와 우유 및 버터, 소시지 등 가공 식품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소비 또한 비중이 높다. 스위스는 초콜릿, 포장 스프, 네스 카페라는 상표의 인스턴트 냉동 커피를 발명한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제네바 호수 근처에 있는 브베에 본사를 둔 식품 제조회사 네슬레(Nestlé S.A.)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기업이자 세계적인 식품 회사이다.

수력발전은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2009년 현재 497개의 수력발전소가 국내 전력 생산의 55%를 담당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는 5개가 가동되고 있으며, 국내 전력 생산의 40%를 담당하고 있다. 1990년 국민투표에 따라 환경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증설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원자력 발전소만 유지하고 있다. 또한 기계, 전기, 금속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동 산업 생산품이 전체 수출의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생산품목의 범위는 10마이크로그램까지 측정하는 정밀기기에서부터 거대한 기차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16세기에 종교박해를 피해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위그노 교도들이 제네바Geneva에서 시작하여 샤프하우젠Schaffhausen, 쥐라Jura로 시계제작 기술을 보급시켰다. 17세기에 제네바에 시계 상거래 조합이 생겼고, 1845년 기계화되어 세계 시계시장에 수출되면서 시계 산업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스위스 시계는 품질이 우수하여 전세계 시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스위스 섬유산업의 규모는 그리 큰 편은 아니나 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스위스 수출의 4위를 차지하며, 화학산업은 섬유산업에 필요한 염색재료 개발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주로 특수화학 제품 및 의약품을 생산, 수출하고 있다. 산업 전반에 걸쳐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며, 특히 의약품 부문 투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의약품 및 화학 분야는 세계 선두그룹을 이루고 있으며, 많은 화학 및 제약 회사들이 독일 국경에 위치한 바젤 지역에 있다. 세계 2위의 제약업체 노바티스Novartis사는 1995년 치바가이기(Ciba-Geigy)사와 산도스(Sandoz)사가 합병한 회사로 의약 및 영양제, 농화학제품 및 살충제 부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관광산업은 아름다운 알프스와 수려한 호수, 다채로운 위락시설, 유럽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등으로 일찍부터 발달해 왔으며, 국민소득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 스위스 내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8개, 자연유산 3개 등 총 11개에 달한다. 또한 많은 국제기구가 중립국인 스위스의 제네바, 취리히 등에 소재하고 있어, 국제회의가 빈번히 개최되는 점도 관광산업 발달의 주요 원인이다. 관광 산업은 스위스에서 금속기계, 화학에 이은 세 번째의 주요 산업이며 전 인구의 10~15%가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다.

스위스 은행의 신중성과 철저한 고객 비밀 보장은 많은 예금을 유치하여 금융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요인이다. 국내 총생산의 9.7%를 금융업이 차지하고 있다. 스위스 은행의 특징은 국가나 세무관리들에게도 원칙적으로 고객의 구좌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독일 나치 초기에 인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조치의 일환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형사소송, 탈세, 상속 문제가 걸려 있는 경우는 예외일 수 있다. 스위스인들은 노인연금, 연기기금, 실업보험 같은 필수 보험 외에도 개인 보험을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한다. 1998년 통계에 따르면 한 가족이 개인 보험에 지출한 가계 자금이 약 12%에 달한다. 그러나 보험회사들은 금액의 절반 이상을 외국에서 벌어들인다.

스위스의 은행비밀주의(banking secrecy)와 최근 동향
스위스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 중에는 ‘비밀계좌’가 있다. 영화나 소설 등에서 고객의 정보가 유출되지 않는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감춰놓은 거액의 자금이 있다는 식의 설정이나 시나리오가 등장하고, 그 대부분은 자금세탁이나 조세회피 등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심에 스위스 은행이 있다. 스위스가 유럽의 금융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으로는 국민의 높은 저축성, 사회경제적 안정, 정치적 중립 등의 요인 외에도 은행 비밀주의가 꼽히는데, 17세기 때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져 온‘ 은행 비밀주의’ 전통은 1930년대 독일 나치정권이 스위스 은행의 독일 고객, 특히 유태인 고객 정보를 공개하도록 압력을 가해오자 스위스 정부가 1934년 은행 비밀주의 원칙을 공식적으로 입법화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1977년 4월 키아소Chiasso 사건 이후 스위스 은행연합회는 불법자금의 스위스 은행 유입 방지를 위해 예금주 신원 및 자금 출처를 파악하도록 결정하고, 또 외국 정부와도 사법공조협정을 체결하여 범죄 관련 자금 계좌의 경우 상호 공개토록 함으로써 은행 비밀주의(banking secrecy)가 다소 완화되기도 했다. 키아소는 이태리와 접경한 스위스 국경도시로서 여기에서 이태리 비자금이 자금 세탁되어 주목을 받아 왔는데, 1977년 스위스Credit Suisse 은행 키아소지점 간부가 이태리 고객 예금 22억 스위스프랑을 리히텐슈타인 투자회사에 불법 예치, 관리한 사건이 드러나 이후 스위스의 전통적인 은행 비밀주의에 대한 규제강화 필요성이 대두되는 등 은행권에 대한 전반적인 규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9년 2월에는 미국이 세계 5위권 내에 드는 거대 스위스 은행인 UBS(Union Bank of Switzerland)에 대해 동 은행 내 약 148억 미불의 비밀계좌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인 고객 5만2천여 명의 명단 제출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으며, OECD는 동년 4월 스위스를 조세피난처 혐의가 있는 회색국가군(grey list)에 포함시키는 등 스위스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위스 정부는 동년 2월 미국에게 UBS의 미국인 고객 관련 정보 일부를 제공하였으며, 3월에는 세금 관련 OECD 국제기준을 수용키로 하는 등 은행 비밀주의를 다소 완화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법안을 마련하였다. 또한, 스위스 정부는 OECD의 회색국가군에서 제외되기 위해 OECD 요구 수준의 국제조세협력 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그간 여러 국가들과 OECD 모델 조세협약 기준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기존 이중과세방지 및 조세정보 교류협정을 개정해왔다. 스위스는 2013년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한 덴마크, 룩셈부르크, 프랑스,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영국, 멕시코, 미국, 카타르 등 총 48개국과 개정 이중과세방지협정을 체결하였다(42개국과 서명).

4. 사회와 문화


사회적 특성
스위스에는 단일한 통일적 문화가 아니라 여러 문화가 뒤섞여 공존한다. 언어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인구의 65.6%는 독일어, 22.8%는 프랑스어, 8.4%는 이탈리아어, 0.6%는 레토로만어(로망슈어)를 사용하며, 이 4개 언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 경계는 일명 뢰스티그라벤 계곡(감자계곡)인데, 실제 이 계곡의 동서로 감자 요리법이 달라진다. 독일어권과 이탈리아권은 알프스 산맥을 따라 각기 북부와 남부에 자리잡고 있다. 외국인 비율은 약 20%로 상당히 높은 편이며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전체 노동자의 25%를 차지한다.

사회의 다양성은 20개의 칸통과 6개의 하프칸통(半州)으로 구성되는 지방자치제에서 드러난다. 이들 간의 사회적, 경제적 격차는 그다지 심하지 않고 사회보장제도가 완벽하게 시행되고 있다. 외교, 군사, 관세, 화폐발행 등만 연방 정부가 담당하고 나머지는 각 주에 맡겨져 있다. 각 주는 법률, 행정, 의회, 법원, 학교, 종교, 경찰제도를 별도로 운용하며, 독자적인 자치권을 행사한다. 3000여 개의 도시와 지방 자치단체들은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세출도 결정한다. 스위스 사회는 종교, 역사적 전통, 경제적 상황에서도 다문화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전체 인구 중 신교도는 약 28%, 구교도는 약 38.6%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타 종교로는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있다. 각 주마다 특색도 많이 달라서 농업이 우세한 산악지대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농촌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면 바젤이나 취리히, 제네바 같은 도시들은 일찍부터 산업, 무역, 은행을 통해 세계와 교류해 온 까닭에 시민적 자유주의의 색채가 짙다. 또한 프랑스어권의 주들은 문화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프랑스와 강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고 남스위스의 이탈리아권 주민들은 이탈리아와 그러하다. 스위스와 독일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데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장년층은 아직도 ‘나치독일’이라는 불행한 과거를 기억하고 있어 독일에 거리감을 느낀다. 언어상으로 독일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독일과 경제적, 문화적 교류도 활발하고 대중 매체 및 서적 시장도 공유하고 있지만 스위스 독일어는 표준 독일어와 차이가 많고 지방에 따라 사투리도 천차만별이다. 현재 대개의 스위스인들은 학교에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3개 국어를 배운다.

문화
스위스는 유럽대륙 중앙에 위치한 지정학적 배경으로 주변으로부터 외래문화가 끊임없이 유입되고, 3대 문화권(프랑스, 독일, 이태리)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다채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일의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풍습은 문화적 다기성과 정신적인 유산이다. 예컨대 바젤의 카니발 및 전통적인 손공예 등에 나타나는 음악, 춤, 시 등도 전통적 풍속에 속한다. 그 밖에 다양한 의식이나 종교적 축제 등도 그러하다.

또한 스위스는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과 같은 동란기에 자유와 양심의 도피처 역할을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바젤에 거주하였고, 릴케는 남부지방에 살았으며, 나치에 쫓긴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연방공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토마스 만도 말년에는 취리히에 정착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스위스는 유명한 예술가, 사상가 및 과학자를 다수 배출하였으며, 특히 노벨상 수상자가 27명에 이르는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스위스가 낳은 저명한 인물들로는 중세의 물리학자이며 연금술사인 파라셀수스, 계몽주의 시대의 루소가 있다. 또한 종교개혁 시기의 츠빙글리는 칼뱅과 더불어 엄격한 신교의 윤리를 정착시켜 소박한 삶의 미덕과 가족, 순종, 근면 등을 중시하는 전통을 확립시켰다. 이들은 근검절약하고 절제하는 한,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것은 신의 의지와 부합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종교적 관점에서의 경제 윤리관을 확립했다. 18세기에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위시하여 고전과 고대에 관한 수많은 연구서를 남겼고, 제1회 노벨평화상 수상자 앙리 뒤낭은 1864년 제네바에서 국제적십자사를 창설했다. 심리학의 거두인 칼 융은 유럽과 미국의 심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1950년대의 비트세대, 60~70년대의 히피운동, 80년대의 뉴에이지운동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현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태두인 소쉬르 등의 언어학자와 사실주의 화가 뵈클린, 표현주의 화가 파울 클레, 현대의 대표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도 스위스 태생이다. 19세기의 열악한 아동 노동의 현실을 목격하고 어린이 교육을 주창한 페스탈로찌 같은 교육자도 있고, 인지학을 내세워 창의력 육성에 기반을 둔 발도르프 학교를 세운 루돌프 슈타이너, 아동의 정신발발달 연구로 유명한 피아제도 스위스인이다. 스위스의 대표적 문호로는 고트프리드 켈러와 막스 프리쉬, 그리고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를 들 수 있다. 스위스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켈러는 19세기의 사실주의 소설가로 유럽 대변혁기 속의 스위스 현실을 즐겨 다루었고, 특히 『젤트빌라의 사람들』과 『녹의의 하인리히』 등에서 스위스 자생 민주주의에 대한 애착을 담아냈다. 프리쉬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현대인의 소외 문제를 다루었으며, 『내 이름은 간텐바인』, 『거인 슈틸러』, 『호모 파베르』 등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극작가인 뒤렌마트는 풍자적이고 신랄한 시대비판으로 유명하며 『노부인의 방문』, 『물리학자들』 등이 알려져 있고, 현대의 작가로는 페터 빅셀, 아돌프 무슉 등이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또한 스위스에는 이러한 예술가들을 기리고 관련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 미술관 등 문화시설이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으며, 대표적으로 파울 클레Paul Klee 센터, 팅겔리Tinguely 미술관, 바이엘러Beyeler 컬렉션, 국제적십자 박물관, 올림픽 박물관, 스위스미니어처 등이 있다.

종교
2012년 말 현재 주민의 38.6%는 로마가톨릭, 28%는 개신교, 20.1%는 무종교, 4.5%는 이슬람, 6.8%는 타종교, 2%는 무응답이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적인 근본 권리이다. 어떤 특정한 종교 집단에 합법적인 단체로서 특수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정착 종교의 지위를 부여할 것인지의 문제는 전적으로 칸통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칸통에서 로마가톨릭 교회와 신교 교회가, 수많은 다른 교회에서는 이에 더하여 예수가톨릭 교회가, 몇몇 칸통에서는 유대교회가 특수한 지위를 얻고 있다. 예수가톨릭 교회는 오직 북부에서만 세력을 얻고 있다. 제네바와 노이엔부르크와 같은 서부 칸통에서는 그러한 지역 교회가 없는데, 그곳에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의 교회들은 ‘대중적 관심을 가진 조직’으로 인정받고 있다. 바젤에는 이른바 교회와 국가의 ‘불균형한 분리’가 존립한다. 약 0.33%의 불교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와는 달리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 아펜첼 아우세로덴, 봐드의 주민들은 1850년 경까지 전적으로 혁신되었고, 프라이부르크, 봘리스, 쥐라, 솔로투른, 루쩌른, 오브, 그리고 니드발더른, 우리, 슈위츠, 축, 마펜젤 인어로덴, 텟신 등의 주민들은 거의 가톨릭 신자들이다. 이에 반해서 글라루스, 아르가우, 세인트 갈렌, 그라우뷘덴, 제네바 등은 종파적으로 뒤섞여 있다. 종파의 분열은 16세기의 종교전쟁 이후 신앙의 선택에서 지역 원리를 적용한 결과였다. 종파가 뒤섞인 칸통은 신생의 칸통 경계선으로 인한 것이든가 아니면 예로부터 내려오는 공동체가 굳어진 것이다.

과학
스위스에서 최초의 대학은 1460년 바젤에 세워졌다. 의사이며 신비주의자인 파라셀수스의 영향은 주목할 만하다. 스위스에서 화학적, 의학적 연구의 긴 역사는 그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래를 위한 연구의 중심은 특히 나노테크닉, 인포마틱, 세계공간 연구, 기후 연구 등의 영역이다. 과학의 중요성은 특히 스위스가 원자재 부족국가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스위스에는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과 같은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연구해 왔다. 제네바 칸통에는 국제연구센터인 유럽 핵연구소(CERN)가 있다. 또 연방 내무부(EDI)에 속하지만 그 산하기관은 아닌 취리히공대(ETH)와 롯산공대(EPF), 취리히공대와 연계된 파울 쉐어러 연구소(PSI), 연방 소재시험 및 연구기관(EmPa), 연방 산림, 눈, 경관연구소(WSL) 등이 있다. 연방 내무부에 속하는 기관으로는 스위스의료소와 국립박물관이 있다. 연방의 경제, 교육, 연구부(WBF) 내에서 연방수의(獸醫)국(BVET)은 가축면역 연구소(IVI)를 운영한다. 연방 농업부(BLW)는 세 개의 농업 연구를 관장한다. 연방 국방, 주민보호, 스포츠부(VBS)는 연방 주민보호국(BABS)의 상위기관으로서 최고 실험실을 운영한다. 대부분의 기타 대학들과 공대들은 칸통에 의해서, 몇몇 공대들은 사립으로 운영된다. 연방과 칸통의 협조를 위해서 스위스 종합대학 심의회를 두고 있다. 스위스 대학들의 총장회의는 칸통과 연방 기구에 대한 대학의 이익을 대변한다. 스위스에는 과학 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기구와 장학단체가 있다. 특히 스위스 국립기금이 대표적이다.

대중매체
스위스는 언어의 다양성, 지리적 위치 및 강한 지방색, 지방자치제도 발달 등으로 인해 다양한 언론매체가 발달하였으며, 주요 유력 일간지는 Tagesanzeiger, Neue Zücher Zeitung, Berner Zeitung, Basler Zeitung, Der Bund, Le Temps, L'agefi 등이 있다. 한편, 최근 3개 무료배포지(Blick am Abend, 20 Minuten, Berner Bä 등)가 각기 버스역에 비치되거나 배달되어, 다수 시민이 일기예보 등의 정보를 제공받고 있다.

라디오 및 TV는 주로 국영은 아니나 비영리회사인 스위스방송연합회(SRG SSR)가 독어, 불어, 이태리어, 로망슈어 등 4개 언어로 방송 프로그램 제작 및 중계를 담당하고 있다. 7개 TV 채널, 16개 라디오 방송국 및 웹사이트가 운영되는데, 주요 방송으로는 SF1/2(독어^스위스독어), TSR1/2(불어), TSI1/2(이태리어) 등이 있다. 또한 스위스 및 해외뉴스를 전달하는 대표적인 웹사이트로 Swissinfo(http://www.swissinfo.ch)가 있으며, 영어, 불어, 독어 등 9개 언어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5. 한국과 스위스의 관계


스위스는 중립주의와 보편성 원칙에 따라 표면상 남북한 등거리 외교정책을 견지하고 있으나,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한국-스위스 양국이 1963년 국교를 수립한 이래 스위스는 1969년 6월 이후 한국에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있으며, 북한과는 1974년 12월 수교를 하였으나 상주공관 설치는 현재로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스위스 연방정부는 1985년 6월 대 의회 답변을 통해 ‘남북한 분쟁에 있어서는 스위스가 중립입장을 지키고 있으나, 스위스 중립정책이 한국과 똑같이 북한과도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으며, 1953년 정전 이래 중립국감독위원회(NNSC)에 대표를 파견, 한반도 평화 유지에 기여해 오고 있다. 스위스는 궁극적으로 남북간 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과 안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보고, 그때까지는 정전체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상이 스위스를 방문한 것은 1986년 전두환 대통령(비공식 방문), 1989년 노태우 대통령(비공식 방문), 2010년 이명박 대통령(다보스 세계경제포럼 참석 방문)에 이어 2014년 1월 박근혜 대통령(국빈 방문)까지 네 차례 있었으며, 스위스 대통령의 한국 방문 사례는 아직 없다. 한국과 스위스는 1971년 투자보장협정을 시작으로, 1976년에 정기항공운항협정, 1977년에 공업소유권협정, 1979년에 사증면제협정, 1981에 이중과세방지협정, 1990년에 정기항공운항협정부속서 개정, 1995년에 항공협정, 1999년에 무역경제협력약정, 2005년에 한국-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자유무역협정, 2008년에 과학기술협력협정, 2012년에는 한-스위스 이중과세방지협정 개정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스위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한단체로는 한국-스위스 협회(Korea-Switzerland Society)와 한국-스위스 문화협회(Cultural Society)가 있어서 친한 인사의 저변확대와 한국 홍보를 위한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한국·스위스 협회는 1953년 정전 후 중립국감독위원회(NNSC :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에 파견, 근무한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원수는 약 500명이다. 한국·스위스 문화협회는 한국문화에 관심 있는 스위스 인사, 한국인 2세, 입양인, 한국·스위스 협회 회원들로 구성된 대표적 친한 단체이다. 연 2~3회 자체적으로 한국 관련 문화행사를 개최한다. 한국·스위스 의원친선협회는 한국·스위스 양국간 의원외교 활성화를 위해 2005년 결성되었으며, 2007년과 2010년 양측 의원친선협회의 상호 방문이 이루어진 바 있다.

2013년 8월 기준으로 한국의 대對 스위스 수출은 7.79억 달러, 대對 스위스 수입액은 17.55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주요 수출품목은 선박, 승용차, 석유화학 및 플라스틱제품 등이고, 수입품목은 시계, 금, 의약품, 펌프 등이다. 2013.11월 현재 스위스 연방이민청 자료에 따르면, 스위스 거주 우리 재외동포는 총 2,295명으로 한국 국적자 1,716명(영주권자 396명 및 장기 체류자 1,320명) 및 스위스 국적자 579명이다. 스위스 동포 연합체로 스위스 한인연합회(Federation of Korean Association in Switzerland)가 있으며, 동 연합회 산하 5개 지역한인회(취리히, 베른, 바젤, 레만, 동부)가 조직되어 있다. 지상사로는 KOTRA 지사(취리히), 대한항공 지점(취리히), 삼성전자 법인(취리히), LG전자 지점(취리히), MCM 법인(취리히), LG 하우시스 법인(제네바) 등이 진출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