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뒤로한 영세중립국 오스트리아

[세계지역문화탐방]
이 영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오스트리아는 그 영토에 있어 과거와 현재가 극명하게 다른 국가이다. 무려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현재의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과거 이들 대부분의 나라들과 역사를 공유하는 대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까지 통치력을 가지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시대,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 나찌 독일과의 병합으로 이어온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유럽 내 수많은 전쟁과 세계를 흔드는 대전쟁의 1차 요인이라 할 만큼 유럽 역사의 큰 변곡점이 되어왔다. 현재 중립소국으로 칭해지는 위상은 과거 역사 속의 영광과 견주어볼 때 초라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1,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뒤로 하고 새로운 도약을 일구어낸 오스트리아는 유럽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UN 등 중요한 국제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수도 비인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이 되는 등 소위 국가 행복지수가 매우 높은 나라라 할 수 있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유럽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오스트리아Austria는 영세중립국으로서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8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83,878.99km²이다. 오스트리아라는 국명은 ‘동쪽 제국(eastern empire)’이라는 뜻으로 독일어로는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라고 표기하는데, 이는 ‘Old German Ostarrichi’에서 유래했다. 오스트리아는 산악지역이 알프스산맥을 중심으로 서부부터 남부로 뻗어 있으며 전체영토의 6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영토면적 중 국토의 32%만이 해발 500m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산은 3,797m의 그로스글로크너Großglockner산이고, 거의 1000개의 3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가 존재한다. 이러한 산악 지형은 관광산업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스키 등 겨울 스포츠의 장소로 제공될 뿐 아니라, 여름엔 등반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동부는 주로 도나우강을 따라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강으로는 약 350㎞ 길이의 도나우Donau강을 들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서북부 지역은 대서양 기후의 영향을 받아 온난한 편이며 대체로 습기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동부지역은 대륙성기후를 띠고 있어 비가 적으며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기후를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평야지대와 산악지대의 기후는 크게 다르다. 6~8월 여름은 평균 기온 23.2℃로 대체로 서늘하고 건조하다. 겨울은 12월경에 시작되어 3월 말까지이며 고도가 높은 지역은 5월까지 겨울이 계속된다. 평균 기온은 영하로 내려가지 않지만 많은 눈을 동반하는 추위를 보이기도 하며 산간지대에는 특히 많은 눈이 내린다. 강수량은 연중 고르게 분포하지만, 평균적으로 1~3월이 가장 건조하고 7~8월에 비가 가장 많이 내린다.

오스트리아의 역사
오스트리아 고대 문명의 기원은 BCE 800~400년경 인도유럽계 일리리아IIIyrian족들이 오스트리아 지역에 할슈타트Hallstatt라고 불리우는 문명을 최초로 건설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켈트Celt족이 이 문명을 계승하였고 기원 원년경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지역은 알프스 및 다뉴브 연안 지역의 전략적 요충성이 인정되어 경제, 문화면에 있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고 2세기경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5세기 게르만족의 남진 이후 오스트리아 지역은 훈Hun, 아바르Avar, 슬라브Slav 및 마자르Magyar족들에 의해 순차적으로 점령되었으며 500~700년경에는 게르만계 바바리아Bavaria족이 정착하였다. 8세기 말엽에는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 카롤루스Charlemagne 대제의 제국으로 편입되었으며 880년 마자르Magyar족의 침략을 받았으나 955년 오토Otto대제가 이들을 격퇴함으로써 오스트리아 지역에는 게르만인들이 항구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뿌리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프랑크 왕국의 카를Karl 대제가 동프랑크의 변방으로 오스트마르크Ostmark(동쪽Ost의 변경Mark이란 뜻)라는 관구를 설정하면서 시작된다 할 수 있다. 이후 프랑크왕국이 분리되면서 동프랑크왕국이 게르만왕국을 거쳐 신성로마제국으로 변천해가는 과정은 지금의 독일과 그 괘를 같이 한다. 현재 오스트리아의 영토범위와 건국의 시원을 형성하는 최초는 신성로마제국의 2대 황제 오토 2세에 의해 바벤베르크Babenberg가에 부여한 동프랑크 남서부지역의 여러 영방 통치권이라 할 수 있다. 바벤베르크Babenberg 왕조는 976~1246까지 270년간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면서 비인Wien(Vienna)을 수도로 확정하고 수많은 건축물을 남기면서 안정된 지배체제를 형성했다. 996년에는 현재의 국명과 유사한 오스타리히Ostarrichi라는 국호가 처음 사용되기도 하였다. 1246년 마지막 군주 프리드리히 2세가 후손이 없이 사망하자 이후 30여년간 군주가 없는 공위기간Interregnum이 지속되고, 독일제국도 1254년 이후 황제 없는 기간이 이어지게 된다. 1273년 독일 선제후Kurfürst(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들이 슈타우펜Staufen 왕가와 가까운 스위스 합스부르크Habsburg가의 루돌프Rudolf 백작을 독일제국의 황제로 선출하게 되면서 이후 640년간 오스트리아 뿐 아니라 유럽역사의 가장 강력한 지배왕조인 합스부르크Habsburg 왕국이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왕국
합스부르크Habsburg라는 이름은 슈바벤Schwaben 지방(현재의 스위스)에 세워진 합스부르크 성 또는 하비히츠부르크 성(매의 성)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 가문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프랑스 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과 연결되는 최대의 왕가王家로 그 위세를 떨쳤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체제는 지금의 오스트리아 역사의 범주를 넘어서는 광대한 영토를 포괄하고 있었다. 독일제국의 황제로 선출될 당시 이 명문의 귀족 가문은 엘자스, 라인강 상류, 그리고 스위스 등지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지속적으로 정략 결혼을 통해 이탈리아의 시실리와 나폴리,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 네덜란드와 스페인, 헝가리, 보헤미아 등 많은 영토와 세력을 얻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고, 16세기 초 카를 5세Karl Ⅴ 때부터 제국은 전성기를 맞는다. 이후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프 2세Felipe Ⅱ가 스페인과 네덜란드 영토를, 카를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Ⅰ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헝가리, 보헤미아 등을 차지하면서 나라는 스페인-네덜란드 노선과 오스트리아-독일 노선으로 나뉜다. 18세기 초 남편 프란츠 1세Franz Ⅰ와 공동으로 통치한 카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여제는, 실질적으로 국정을 담당하여 행정 제도와 교육·문화 면에서 개혁 정책을 펴고 군대 육성에 주력한다. 그녀는 자녀를 열여섯 명이나 두었는데, 그중 맏아들 요제프 2세Joseph Ⅱ는 어머니의 개혁 정책을 더 강력하게 펼쳐 계몽 군주라 불렸으며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프랑스 루이 16세Louis ⅩⅥ의 왕비가 되었다가 프랑스 혁명 때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13세기 후반부터 지배해온 합스부르크왕조는 종교개혁 이후 카를 5세Karl Ⅴ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황제들이 적극적인 구교 수호 의지를 유지했고,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Ⅱ는 1619년 등극하자마자 자신의 통치권 내에 있는 모든 왕국의 이단을 근절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실천에 옮겼다. 급기야 신교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열린 프라하 신교도대회(1618년)에서 황제가 임명한 프라하의 부총독을 시민들이 왕성의 창밖으로 내던져 살해한 사건을 기화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세력 사이에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이 시작된다. 이 종교전쟁은 실제로는 합스부르크Habsburg 왕조와 프랑스의 부르봉Bourbon 왕조 간의 주도권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중부유럽을 피폐화시켰다.

요제프 2세Joseph Ⅱ의 뒤를 이은 프란츠 2세Franz Ⅱ는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는 세력과 손을 잡고 개혁을 반대하며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어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1806년).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2세Franz Ⅱ(1792-1835)는 1804년 오스트리아가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프란츠 1세Franz Ⅰ로서 오스트리아의 첫 세습황제 자리에 오른다.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가의 정략 결혼 정책에 따라 자신의 딸을 나폴레옹Napoléon과 결혼시키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의 힘이 약해지자 영국, 프로이센 등 연합군과 함께 1814년 나폴레옹을 몰아낸다.

대 나폴레옹 전쟁의 전승국들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Metternich 수상의 주도 하에 1815년 비인회의를 가지게 되는데, 이때부터 1848년 혁명 발발시까지 33년 동안 오스트리아는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럽의 정치문화를 주도하는 국가가 된다. 비인회의의 정치적 기저는 프랑스혁명 이전으로의 복귀, 왕정의 복고, 자유주의 운동의 철저한 배격이었다. 1848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혁명은 진압되지만, 그 해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의 국민회의의 여파로 하나의 독일로 통일시킬 독일제국의 헌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왕권이 헌법으로 제한되는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여 18세의 젊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Ⅰ가 왕위에 오른다(184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오스트리아는 비인 회의를 통해 프랑스에게 잃었던 땅을 되찾으며 국경을 재정리하지만, 1866년 프로이센Preußen(Prussia)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유럽 내 위상이 극도로 저하된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은 소 독일주의로 통일을 추구하던 프로이센과 대 독일주의를 지향하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간에 독일 연방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연방 내의 오스트리아의 지위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오스트리아 내부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 헝가리 왕국Magyar Királyság이 세워진다. 그리고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양쪽의 국왕을 겸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Österreich-Ungarn Monarchie이 성립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이중제국은 현 지도상 오스트리아, 헝가리 뿐 아니라, 체코,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폴란드,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세르비아까지 부분적으로 포함하는 당시 러시아를 이어 유럽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에는 잇달아 비극이 일어났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비가 암살되고 황태자는 자살했으며, 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 부부가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독립주의자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이에 세르비아Serbia와 전쟁이 시작되고, 독일과 러시아 동맹군이 오스트리아 쪽에, 프랑스와 영국이 세르비아 쪽에 서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사상자만 1천만 명에 이른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패전(1918.10.9)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 카를 1세가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군주제가 폐지되고, 임시 국민 회의에 의해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1918.11.12)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연합국과 오스트리아의 단독 강화 조약인 생제르맹St. Germain 조약(1919.9.10)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헝가리와 체코, 슬로바키아가 독립하여 오스트리아는 제국 시대에 비해 영토는 8분의 1, 인구는 9분의 1로 줄어들었으며, 독일과의 연합이 금지되어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Erste Republik(1919.10.21)으로 불리게 되었다.

패전과 병합, 그 이후
1차 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는 승전국에게 막대한 전쟁 보상금을 치러야 했다. 이 상황에 세계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고 정치적으로도 혼란에 빠지면서 1920년대 말, 오스트리아에도 나치세력이 생겨났다. 여기에 1934년 나치스Nazis 당원이 총리를 암살하고, 1938년 오스트리아 나치스의 총수가 정부를 조직하여 독일 나치스에 군대를 요청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되었다. 국제연맹의 허가 없이는 타국과 오스트리아의 합방을 금하는 생제르맹 조약의 당사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의 위협 속에 이를 묵인하였다.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은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마르크Ostmark라는 이름으로 독일의 지배하에 놓였고, 독일이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때는 수도 비인이 연합군의 공격과 독일과 소련의 전투로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1945년 독일이 패망하자 독일을 도왔던 오스트리아는 또다시 패전국이 되었고 영토는 미국, 영국, 프랑스, 구 소련 등 4국 연합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며, 1945년 사민당 출신 렌너Karl Renner를 대통령으로 모든 정당이 연합하여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2공화국의 영토는 1938년 독일 합병 이전의 상태로 복귀되었으며, 헌법도 1920년 제1공화국 헌법으로 복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4대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나, 소련의 동구권 위성국가화에 반대하고 미국의 마샬 계획을 포함한 서유럽 경제에 의존함으로써 친 서방 경향을 취하게 되었다. 오랜 협상 끝에 1955년 5월 15일 4대 연합국과 오스트리아간에 주권회복을 위한 국가 조약이 서명되고, 동년 7월 27일 동 조약이 발효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다시 독립 국가가 되었다. 4대 연합국은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연합하지 않고 영원히 중립국으로 남으며, 합스부르크가를 되찾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물러갔다. 1955년 10월 26일에 오스트리아 영구 중립을 규정한 제2공화국 헌법이 선포되었으며, 12월에는 국제연합UN에 가입하였다.

1966년 집권한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경제를 안정시키며 나치스 역사를 씻어내는 데 힘을 쏟았다. 이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과거 두 번이나 세계 전쟁에서 패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가장 높은 생활 수준을 자랑하는 선진 복지국가로 탈바꿈하였으며, 1995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04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와 슬로베니아가 유럽공동체(EU)에 가입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하고는 EU가입국에 의해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방위정책이 테러에 대한 방위와 유럽공동체 및 유엔의 범주 내에서 국제적 차원의 군대투입에 집중되었다.

냉전시기 오스트리아는 서로 대치한 동서방진영의 연결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1955년의 국가계약에 따라 이 나라는 형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민주주의, 경제, 정치적 차원에서 오스트리아는 처음부터 소비에트연방과의 관계보다는 서방진영의 요소가 강조되어 있었다.

외교정책은 종종 지역의 안정과 동서관계의 협력적 재조정에 기여하였고, 비인은 오스트리아가 나토에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에도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국제회의 장소로 매력적이었다. 이러한 지위는 하지만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사라지게 된 셈이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유엔에 가입하였고 비인은 1980년 뉴욕과 제네바에 이어 유엔사무국의 3번째 장소가 되었다. 발트하임K. Waldheim은 1972~1981년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하였고, 오스트리아는 2009년과 2010년 유엔의 비상임안정보장이사회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무려 5만명의 오스트리아인이 유엔 깃발아래 군인, 군관계자, 민간경찰, 민간 전문가 등으로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비인에는 유엔사무국 건물 외에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엔공업개발기구UNIDO,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 그리고 산유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본부 등이 설치되어 있다. 독일과의 합병과 양대 전쟁의 결과로 받아들였던 중립국 정책은 현재 고전적 의미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오스트리아는 1920년 수립되어 1945년 재수용한 연방헌법에 의거 입헌제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9개 자치주)이다. 1920년에 만든 연방 헌법을 기초로 국가의 권력과 책임이 입법, 사법, 행정 기관 3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자치주 역시 각각의 독립적인 행정부, 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의 권한이 다른 내각제 국가들의 경우보다 좀 더 강화된 내각 책임제로, 의회 민주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국민투표와 국민발의 및 대통령 직선제의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가미하고 있는 체제를 이루고 있다. 2014년 12월 현재 오스트리아의 국가원수는 하인츠 피셔Heinz Fischer 대통령(2004.7~)이고, 정부수반은 베르너 파이만Werner Faymann 총리(사민당, 2008.12~)이다.

행정부
오스트리아 연방 대통령Federal President은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되며 임기는 6년(1회 연임 가능)이다. 군 통수권, 외교에 관한 권한, 공무원, 장교 및 법관임명권, 사면권 등 국가 원수로서의 공식 업무 외에도 연방 정부의 행정 대표인 총리와 각료 임명권 및 해임권, 하원 해산권, 긴급명령권 등을 갖지만, 의회 민주제하에서 대통령은 상징적인 지위와 역할에 그치고 있다.

연방의 행정 수반은 총리이며, 연방의회 선거에서 가장 지지도가 높은 당의 후보가 연정 등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여 실질적인 행정권을 행사하게 된다. 총리와 부총리, 그리고 내각 각료들은 총리의 제안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은 이를 거부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하원의 다수당 당수가 단독 또는 연립의 형태로 조각을 하여 대통령이 재가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국무장관(State Secretary)은 각료와 같은 형식으로 임명 및 해임되며, 각료의 대 국회 관계 보좌가 주된 업무이다. 각료의 지시에 귀속되며 각료 회의 시 투표권 없이 참석한다.

오스트리아는 수도 비인을 포함하여 독자적인 주州의회와 주州정부를 가지는 9개의 주州로 나뉘어져 있고 총 80개의 관구로 구성되어 있다. 주 지방의회 의원은 각 지역에서 5년마다 16세 이상 지역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직업적이나 비직업적으로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 주정부의 수장인 주지사는 주의원에 의해 선출된다.

입법부
오스트리아 의회는 상·하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원에 해당하는 연방의회Bundesrat는 각 주의 인구 비례에 따라 각 주 의회에서 간접 선거 방식으로 선출된 62명의 의원(각 주 법률에 따라 5년 또는 6년의 임기)들로 구성되며, 연방 정부와 의회로부터 지방 정부와 지방 의회를 보호하고 국제 조약 체결을 확인하고 허락하기도 한다. 하원에 해당하는 국민의회Nationalrat는 국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 183명의 의원(임기 5년)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새로 구성된 연방 정부를 허가하거나 새로운 법률을 만드는 입법을 담당한다. 입법권과 국정감사권은 상·하원이 각각 행사하나, 하원이 우월하여 실질적 권한을 지니고 있으며 내각 불신임권과 국정조사권 등은 하원이 보유하고 있다. 연방 의회를 구성하는 연방 공화국인 오스트리아에는 각 주마다 주 의회와 주 행정부가 있지만, 중요한 결정은 연방 정부와 의회가 맡아서 하며, 주요 정당으로 사민당SPÖ과 국민당ÖVP, 자유당FPÖ, 녹색당Grüne, Stronach당, 새로운 오스트리아NEOs 등이 있다. 1955년 제2공화국 탄생 이후 최근까지, 주로 양대 정당인 보수 국민당과 진보 사민당이 정권교체 및 연정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2013년 9월 29일 실시된 하원 총선 결과 이전 연정 파트너였던 사민당이 27.1%(53석), 국민당이 23.8%(46석)의 득표율로 간신히 과반수(183석 중 92석) 사수에 성공한 가운데, 이후 약 2개월 반 동안 계속된 정부 구성 협상이 12월 12일 최종 타결되어 12월 16일 대통령의 재가 및 임명을 받음으로써 5년 임기의 제2차 베르너 파이만Faymann 내각이 공식 출범하였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에게는 불운의 상징인 13일의 금요일(12월 13일이 금요일이었음)을 피하기 위해 하루 전날 극적으로 탄생한 사민-국민당 대연정에 대해 여론 조사 결과 만족한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24%에 머물 정도로 신임이 높지 않은 상황인 바, 향후 정국 운영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사법부
사법부는 행정부 및 의회로부터 독립적이며, 각각의 재판부는 항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위 법원의 결정에 구속되지 않으며 판사는 법률 또는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해임되지 않는 개별의 독립 결정 기관이다. 오스트리아의 사법제도는 연방법원이 관할하며, 개별 자치주는 자체의 법원을 갖지 못한다. 법원의 유형으로는 최고 법원인 연방대법원(OGH)과 연방보통법원 및 연방헌법재판소Verfassungsgerichtshof, 연방행정법원Verwaltungsgerichtshof이 있고, 연방보통법원은 구 법원Bezirksgericht, 지방법원Landesgericht, 고등법원Oberlandesgericht 및 대법원Oberster Gerichtshof으로 구성된다. 오스트리아의 사법제도는 3심제를 원칙으로 하는데, 특수법원인 행정법원의 경우 2심제이다. 구 법원에서 일부 민사사건과 형사사건을 다루고, 그 밖의 제1심사건은 지방법원에서 관할한다. 중한 범죄 및 정치범죄 등은 8명으로 구성된 배심재판부에서 재판한다. 고등법원은 제2심사건 및 일부 형사재판의 최종심을 관할한다. 최종심은 연방대법원이다.

연방대법원과 연방행정법원, 연방헌법재판소의 관할권에 속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노동법원, 중재법원, 사회보장에 관한 각 주 별 위원회, 특허법원, 군사법원 등의 특별법원을 설치해 운영할 수 있다. 2007년 12월에 설립된 난민법원Asylgerichtshof은 난민의 수용 여부와 절차를 결정한다.

주요인물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정치적 인물로는 우선 합스부르크 왕조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나폴레옹의 몰락 후 1815년 유럽의 정치적 지형의 재편을 주도한 메테르니히Metternich,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오랫동안 헝가리-오스트리아의 도나우제국Donaumonarchie의 왕이었던 프란츠 요셉 1세Franz Joseph I를 언급할 수 있다. 현대로 오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Adolf Hitler가 태어난 나라이며,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이기도 했던 발트하임K. Waldheim은 그의 나치정권과의 밀접한 관련 때문에 국제적으로 고립되기도 했다.

경제


제2차대전에서 패한 후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1947년에 이미 극도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화폐개혁이 이루어졌고, 1948년 미국과 오스트리아 간에 마샬플랜에 관한 협약이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는 유럽 내에서 가장 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첫째 오스트리아가 2차대전 이전 산업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고, 둘째 독일과는 달리 소련에 대해 복구채무액을 갚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련은 그 대신 1830년 이래 도나우강을 이용한 유럽 내 선박운송사업을 운용해 오던 오스트리아의 중요한 기간산업체인 DDSG(도나우 선박운송회사)를 이용한 30년간의 석유관련 사업권을 따내었고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있던 DDSG의 재산을 확보하는 이익을 챙겼다. 오스트리아는 소련점령지역에서도 마샬플랜을 통해 유입되는 자금을 활용할 수 있었는데 이는 유럽 내 유일한 경우였다.

이러한 호조건을 발판으로 시작된 오스트리아의 경제부흥은 - 무엇보다 오스트리아 내의 독일자산에 대해 연합국이 손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추진한 - 기간산업 국유화 정책으로 시작하여 정책적으로 안정된 발전을 이룩해 나갔고 1990년대 국유기업의 민간 혹은 외국 기업으로의 이전까지 오스트리아 경제의 기본축이 되었다. 석유 화학, 제철, 자동차 등 중화학 공업 분야를 비롯하여, 전체 산업 생산량의 4분의 1을 담당하고 있는 국영 기업은 1970년부터 각 분야에서 다른 경쟁 기업 없이 경제를 이끌었고, 오스트리아는 이 강력한 국가 경영을 통해 1인당 국민 소득이 4만 3천 달러에 이르는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1995년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1999년 통화 화폐를 유로화로 바꾸었고, 유럽 연합 가입 국가들과의 무역 및 해외 투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가장 중요한 무역국은 독일이다. 수출은 29.8%, 수입은 무려 40.6%에 달한다. 다음으로는 이탈리아, 스위스 등을 꼽을 수 있는데 EU내에서의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수출은 72.7%가 유럽연합국과 이루어지고 있으며, 수입은 73.6%에 달한다. 그 밖에 농업과 축산, 임업도 발달하여, 오스트리아 내에 필요한 농산물 수요의 90%를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다. 주요 2차산업으로는 광공업을 들 수 있다. 알프스 지역에 묻혀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 아연, 납, 철광석 등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예로부터 철광과 제철 산업, 제조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냉전구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이점을 활용하여 일찍부터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의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그 중 하나로 러시아와의 천연가스 수입 및 중개가 활발하게 되었고, 특히 정유산업 부문에서 유럽 내 독보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국제적 규모의 정유 및 가스회사인 OMV 콘쩨른은 오스트리아의 국영기업으로 출발하여 규모를 확장시켜 전세계적으로 26,800명(2013년)을 고용하고 있는 거대한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오스트리아에 적을 두고 있는 Rewe 주식회사도 이탈리아, 동유럽과 다국적기업을 형태를 띠면서 슈퍼마켓, 화장품 영업, 생필품 판매 및 요식업 등으로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는 다국적기업이다.

전력공급은 주로 수력발전(60% 정도)에 의존하고 있는데, 댐을 이용한 수차 발전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협약에 의해 재생 가능한 전력생산이 2010년까지 78.1%, 환경전력생산이 10% 상승되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는 실제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으며 환경전력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2011년 현재 풍력발전은 3.3%에 달한다.

흥미로은 것은 핵발전소는 핵 방지법에 의거 허용되지 않고 있다가 1970년대 쯔벤텐도르프Zwentendorf에 핵발전소가 건설되었지만 국민투표(1978)에 의한 반대로 지금까지 한번도 가동된 적이 없다.

천연가스 수급은 거의 외국에 의존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도 생산이 없지는 않지만 국내수요의 20%에 불과한 소량이다. 그래서 러시아(수입의 70%)에서 주로 공급을 받고 있는데, 오스트리아는 1968년 세계적 냉전구도 속에서 중서 유럽 최초로 동구권과 가스 수급계약을 체결한 나라가 되었다. 아무튼 5개의 가스관이 오스트리아를 관통하는데 이를 통해 서유럽과 중부유럽의 가스공급에 기여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지형적으로 숲이 많다. 이에 따라 수목을 활용한 삼림산업이 발전하게 되는데 목재와 종이 생산량이 많아 남유럽국가에 대한 원목수출은 중요한 교역물이기도 하다.

전반적인 오스트리아 경제의 현황을 정리하면 전통적으로 제조업 부문에서 높은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관광 등 서비스 산업에서도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주요 제조업에 있어서는 숙련된 노동력을 기반으로 철강, 기계류, 자동차부품 등이 중소기업 위주로 발전해 왔으며, 환경, 재생에너지 산업도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급성장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2013년 유로존 경제 부진 등 대외경제 악화로 2011~2012년 대비 성장세가 약화, 연간 0.3~0.4%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여전히 유럽연합EU 평균(0.1%)은 상회하면서 선전중이며, 특히 실업률의 경우 4.9%로 EU 국가 중 최저 실업률을 유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경제연구소들은 향후 2014~2018년간 연평균 성장률도 계속 EU 평균(1.55%)을 상회하는 1.8%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데, 여타 EU국가들에 비한 오스트리아의 성장 우위는 인접 중동부 및 남부유럽 시장의 성장, 이에 따른 오스트리아의 수출증대, 지속 증가하는 노동공급, 최근 증가된 연구·개발 관련 투자에 기인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관광산업
전체적으로 보아 오스트리아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부문은 3차 산업(68%)이다. 오스트리아는 높은 산과 고지대, 그리고 아름다운 경관의 호수들이 있다. 또한 수많은 문화적 자산과 유적, 매력적인 도시 경관, 그리고 적절하게 마련된 관광 기간 시설,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형적 요인 등 나라 전체가 관광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관광 산업에서 또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사실은 여름이나 겨울 시즌이나 균등하게 관광객이 찾는다는 점이다. 관광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은 특히 티롤, 잘츠부르크, 케른텐, 비인 등을 중심으로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으며 외국인들의 평균 숙박일은 매회 4.2일 정도에 이른다.

알프스 산의 천혜 자연을 이용한 스키와 레저 산업, 음악과 문화유산을 이용한 서비스 관광 사업은 전체 산업의 68%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분야이다. 관광산업으로 인한 1인당 연수입은 1,666유로(2009)에 달하여 전세계적으로 비교할 만한 국가가 없을 정도로 높다고 하겠다.

문화관광으로는 무엇보다 음악 쪽이 우세하다. 매년 여름 시즌에 모짜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되는 음악축제가 유명하며, 1946년 이래 매년 열리고 있는 브레겐츠Bregenz 축제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호수무대가 설치된다. 그 외에 비인의 축제주간, 비인 국립오페라, 비인 필하모니커 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음악을 중심으로 한 행사에 수많은 내외국인들이 방문하고 있는 셈이다. 관광산업은 그 자체로서 수익원이 될 뿐 아니라, 지역 상권의 활성에도 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 경제에 가장 기여도가 큰 부문이라 하겠다.

최근에 들어오면서 무제한적으로 증가추세에 있는 관광산업으로 인해 도로 및 공항 건설로 인한 아스팔트화, 공기오염, 쓰레기 처리, 하수처리 문제 등 동반되는 환경문제가 두드러지면서 대안적 관광프로젝트도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사회와 문화


오스트리아의 인구
오스트리아의 인구 증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이후 다양한 국내외적 요인에 의해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최초의 근대적 인구조사가 이루어졌던 1869/70년 이래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꾸준하게 증가해왔다. 요인은 무엇보다 이중제국 내의 이동에 기인한다. 전쟁이 끝난 1919년엔 34만 7천명의 인구가 전쟁으로 죽거나 제국의 동구권 지역주민들의 귀향으로 감소하였다. 이후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여 1939년 독일과의 합병 직후 이루어진 인구 센서스에서는 무려 총 인구가 665만에 달했다. 1946년 조사에서는 2차대전으로 인한 인구손실에서도 불구하고 피난이주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며 전쟁감소분을 상쇄하며 700만에까지 이르게 된다. 1980년 이후엔 유고 내전의 여파로 이주민들이 더 늘어나면서 2013년 850만에 이르고 있다. 2013년 현재 이주외국인은 총인구의 19.4%에 해당하는 163만명이다.

언어 및 종교
오스트리아의 국어는 독일어이다. 88.6%에 해당하는 인구 수가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독일어는 어휘와 발음, 그리고 문법적 특이성에 있어 독일어 표준어와 차이를 가진다. 1951년 확정된 오스트리아어 사전은 독일어의 표준체계를 규정하는 두덴Duden과 달리 이러한 차이 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관청과 학교에서는 이 오스트리아어 사전이 병용되고 있다. 독일어 외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지역별 공용어가 있는데 크로아티아어, 슬로베니아어, 헝가리어가 이에 속한다. 또한 집시들의 언어인 로마니어와 수화手話도 소수언어로 인정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기본종교는 가톨릭이다. 2001년 73.6%에 해당하는 인구가 가톨릭 신자로 등록했고, 4.7%만이 개신교도에 속했다. 기독교인 중 2.2%(18만)는 정교 신자로 밝혔다. 이후 현재까지 기독교도는 꾸준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데 2013년엔 62.4%에 해당하는 530만명의 가톨릭 교도와 겨우 3.7%에 해당하는 31만명의 개신교 신자가 등록되고 있다. 2001년 4.2%를 기록한 이슬람교 신자는 점점 증가 추세에 있으며 최근의 비공식 자료에 의하면 2009년 50만명(전 인구의 6.2%)이 넘는 신도를 기록 중이다. 그 외에 유대교(8,140명, 비인에만 7,000명), 1983년 정식으로 인가된 불교(1만명), 여호와의 증인(2009년 5월 합법화됨, 2만명) 신도들이 있다.

정체성
오스트리아는 중세 이후부터 정치, 언어-문화, 그리고 이념적 연결로 인해 ‘독일’ 정체성의 일부분으로 인식되어 왔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도 19C 초엽만 해도 근대적 의미의 민족 정체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최초로 ‘우리’라는 동질성은 사실 중세 초기에 형성이 되어 합스부르크 왕국세대에서 1918년까지는 집단적 동질성이 주로 왕조와의 연관에서 인식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개의 독일국가’라는 의식이 태동되기 시작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종식되면서 ‘근원적인 집단정체성의 위기’로 내몰리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제 1공화국의 실패와 1938년 나치 독일과의 병합에까지 연결되었다. 하지만 나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자세, 그리고 패전이란 상황은 서서히 독자적인 오스트리아 정체성을 키워나갔고, 전쟁의 종식에 이은 독자적인 국가형성과 안정, 그리고 경제부흥을 통해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독자적 민족-국가의식이 완결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문화
오스트리아의 문화는 수세기 전부터 유럽문화의 중심권에서 발전되어 왔다. 거의 모든 양식사적 시기마다 중요한 건축물이 형성되어 왔고 그 중 많은 것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에 이르기까지 오스트리아의 문화는 유럽을 대표하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왕조의 특성상 비인, 프라하, 부다페스트는 다양한 방식으로 왕성한 문화적 교류를 이루어 냈고,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비인은 유명한 예술인, 지식인들의 집합장소가 되었다. 1870년부터 1914년까지는 전쟁이 없던 평화의 시기였다. 1683년의 대 터키 전쟁 승리 이후 바로크 시대가 누렸던 문화적 융성기처럼 세기 전환기의 오스트리아에서는 세계적인 음악가, 작가, 화가와 지식인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면서 제국의 마지막 50년을 문화의 꽃으로 장식하려는 듯이 보였다.

이러한 오스트리아-비인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1918년 1차대전이 끝나고도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며, 제 1공화국 기간 동안 지속되다가 1938년 나치독일과의 병합을 맞아 끔찍한 종식을 맞게 된다. 오스트리아 문화권에서 유대계 지식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는데, 나치 정권의 대두로 목숨을 잃거나 망명을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45년 이후엔, 무엇보다 문화관광의 차원에서 이중제국의 전통을 다시 이어보려는 노력이 이루어졌고,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사조의 발전에는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과거의 문화적 영광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영화, 음악 등의 분야에서 새로이 세계적 신조류를 형성해 나가는데 성공하는 듯이 보인다. 전통과 현대 사이의 이러한 문화적 긴장관계는 도시에 따라 독자적인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데, 2003년 그라츠Graz는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칭되었고, 비인Wien은 대체로 대표적인 문화대도시로 인정되고 있는 한편, 린츠Linz나 장크트 푈텐Sankt Pölten처럼 과거의 전통이 미약한 도시는 현대예술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음악
18세기 이후 약 300년 동안은 세계 음악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모두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났는데, 하이든Franz Joseph Haydn에서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로 이어지며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세계 음악사의 황금기이자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소나타에서 실내악, 협주곡, 교향곡 등에 이르는 많은 기악곡들이 발전하였고, 음악가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원에 힘입어 당시 유럽의 예술과 문화, 사상의 중심지인 비인에서 명곡들을 만들어 냈다. 세기말(19C)을 전후하여 오스트리아의 음악세계는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와 같은 후기낭만주의의 거장을 거쳐 12음계 기법을 도입한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알반 베르크Alban Berg 등의 신비인파를 중심으로 현대음악에로의 접목을 이루어 냈다.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부자, 프란츠 폰 주페Franz von Suppé와 같은 유명한 오페레타 작곡가들의 명성도 비인의 문화적 절정기를 이룩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음악의 도시 비인에는 극장과 공연장이 많아 일 년 내내 음악을 즐길 수 있고, 세계적으로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의 근거지가 있다. 또한 유명한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이 있어 세계적인 오페라와 음악회를 즐길 수 있다. 비인 시내에는 음악가와 관련된 곳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하이든 기념관과 슈베르트 기념관 등이 대표적이다.

오스트리아는 음악 뿐 아니라 문학, 건축, 미술, 과학, 의학 등 모든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들을 열거할 수 있다.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 칼 크라우스Karl Kraus,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엘프리데 옐리넥Elfriede Jelinek 등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오스트리아 출신 문인들이고, 화가로서는 작품 ’키스’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오스카 코코쉬카Oskar Kokoschka, 알프레드 쿠빈Alfred Kubin, 정신분석학의 선구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등이 오스트리아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 노벨상수상자는 20명으로 인구당 노벨상 수상자는 세계 5위이다.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관계


한국과 오스트리아는 1892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공식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1963년 국교수립에 합의하여 비인에 한국대사관이 설치되었으며, 1985년엔 서울에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으로서 남한과 북한 양국과 수교하고 있으며 표면상 등거리외교를 견지하고 있다. 2013년 12월 현재 2,300명 가량의 한국인이 오스트리아에 교민, 상사 임직원, 유학생의 신분으로 살고 있는데, 이 중 유학생이 약 1300명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현지 국적을 취득한 시민권자는 500명에 달한다. 비인, 그라쯔, 린쯔에 한글학교가 설립되어 있으며, 대한무역진흥공사(코트라)를 비롯해 대한항공, 삼성, LG, 기아자동차, 영산 등 30개 한국업체가 오스트리아에 진출하고 있다. 한국과 오스트리아 간엔 무역협정, 섬유협정, 사증면제협정, 항공협정, 이중과세방지 협정 등이 체결되어 있고, 점차로 교역량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한·오 교역량은 1996년 7억 6699만 달러를 정점으로 일정한 감소세를 보였으나, 2006년엔 무려 13억 유로를 기록함으로써 교역규모 기준으로 한국은 오스트리아의 4번째 교역국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대 한국 주요 수입품은 승용차, 통신장비, 전기부품 등이고,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으로 수출하는 제품을 보면 기계, 산업장비, 자동차 등이 총 수출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전력발전소 및 철강 산업장비, 기계장비, 철도유지 장비, 산업용 고로, 임업용 쓰레기 소각 장비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비인의 카페하우스
비인의 대중 문화 중 한 가지 언급할 만한 것은 카페하우스Kaffehaus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제조된 커피와 함께 간단한 식사가 제공되는 카페하우스는 세기말을 전후하여 사회생활에 깊숙히 파고들었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보헤미안, 예술가, 지식인들의 휴식처가 되면서 지적 토론과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찾아 들었고, 트로츠키 같은 이가 혁명을 꿈꾸던 공간이기도 했다. ‘홀로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옆자리에 벗들이 있어야 하는 곳’으로 지칭되던 비인의 카페하우스는 오스트리아 문화의 유명한 대표자들의 산실이 되었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으면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았고, 약속이 없었어도 의견을 나눌 벗이 찾아오는 장소였다. 하버마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 <여론의 구조변화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에서 카페의 기능을 시민사회의 공공여론이 자리잡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는 문화공간이라고 강조한다.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의 집무실에 인접한 ‘카페 그린스타이들(Griensteidl)’에서는 소설가 헤르만 바, 아터 슈니츨러, 후고 폰 호프만스탈 등이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하루 종일 죽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키스」를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히틀러의 나치정권에 의해 작품이 모두 불태워질 뻔한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 등의 20세기 미술계 거장들, 오토 바그너, 아돌프 로스 등 근대 건축가들은 ‘카페 무제움(Museum)’의 단골이었다.

소설가인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비인의 카페하우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 어디에도 비교할 데가 없을 아주 독특한 방식의 시설이라 하겠다. 일종의 민주적이고 값싼 한 잔이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클럽이다. 모든 손님은 푼돈 얼마만 있으면 몇 시간이고 앉아서 토론하고, 글을 쓰거나, 카드놀이를 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온 편지를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무수히 많은 신문과 잡지를 통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고 아무 것도 놓치지 않았다.”

비인의 카페하우스 문화는 2011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