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 천상문답과 참동학

[상생의에세이]

수운의 준엄한 외침 “너희가 어찌 상제님을 알겠느냐?”


윤덕현 / 본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1864년 경신년庚申年 음력 4월 5일(양력 5월 3일)에 천상문답天上問答 사건이 있었다. 천상문답 사건이란 조선 말기의 구도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대신사大神師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눈 일을 말한다. 대신사는 이 천상문답 사건 이후 동학東學을 창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천상문답은 동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천상문답 사건일을 맞이하여 수운 대신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대신사는 어떠한 구도의 길을 걸었고, 최후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의 행적이 남아있는 경주와 대구를 중심으로 대신사의 삶을 살펴본다.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말의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답사를 떠나본다.

1부 경주에서


하루 만에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비소식이 예정되어 있어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대전에서 경주 용담정까지 소요 예정시간은 2시간 40분. 점심 전에는 도착할 듯싶다. 대전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경주로 내달렸다.

용담정 근처에서 대신사의 묘 표지판을 발견했다. 그곳을 찾아 올라가는 산길은 일반차량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매우 거칠었다. 대략 10분 동안 올라가니 탁 트인 광경이 눈에 띈다. 고갯길 끝에서 묘소로 안내되는 길은 제법 정돈되어 보였다.

문인석과 묘비가 지키는 묘역은 깔끔했다. 묘소를 향하여 읍배를 드리니 만감이 교차한다.

인간으로서 처음 상제님의 음성을 듣고 문답을 한 최수운 대신사. 이 땅에 개벽 세상의 도래와 상제님 강세를 선포한 비범한 삶의 역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수운 대신사의 구도 역정을 생각하며 묘소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옆쪽으로 길이 난 것이 보이기에 궁금한 마음에 그 길을 따라 고개에 올랐다.

‘대신사부인박씨묘’

수운 대신사 아내의 묘소였다. 순간 박씨 부인이 겪었을 고초가 생각났다. 도道공부에 빠진 지아비의 뒷수발을 하시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그래도 잘 정돈된 산소와 번듯하게 세워진 묘비는 박씨부인의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 산을 내려가다가 또 하나의 길이 보여 따라갔는데, 부인 묘를 찾아갈 때보다 두 배는 더 먼 길이었다.

살펴보니 위에서 아래로 총 4기의 묘가 있다. 위로부터 대신사의 모친인 한씨의 묘, 차남 최세청의 묘와 장남 최세정의 묘였다. 특이한 것은 이 두 묘 사이에 하나의 묘가 끼어 있다는 것이다. 근수당 최윤의 묘였는데, 일명 ‘용담할머니’라고 불릴 만큼 용담정과 사연이 깊은 분이라 한다. 최윤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맏딸이다. 말년에 이곳 용담정에 와서 수행과 포교공부를 했다고 전해진다.

네 기의 묘를 둘러보고 산을 내려오면서 뒤돌아보니 한 가족이 같이 묻혀 있는 것 같아서 그런대로 따뜻한 정감이 느껴졌다. 돌아가신 대신사의 삶이 그렇게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저 멀리 생가터가 보여 달려가 보았지만 공사 중이었다. 복원공사가 진행 중임에도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는 편이었는데, 복원 조감도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아쉬움을 달래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용담정이 있는 구미산 입구에 다다랐다. 입구를 바라보니 벚꽃이 화사하게 만개를 하였다. 입구에 다다르자 바로 대신사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왼손에는 책을 쥐고 있고 오른손은 검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하늘을 바로 알라는 뜻이신가?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큰 대문이 보였는데, ‘궁을’을 상징한 천도교 마크가 선명하다. 문을 지나 얼마를 걸어가니 용담정이 나타났다. 외관은 깔끔해 보였지만 그런 만큼 운치는 덜했다. 천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대신사의 그 독한 구도의 열정은 찾기 힘들었다. 때마침 목이 마르던 차에 약수터가 보였다. 잘되었다 싶어 바가지로 한 모금 들이키면서 이 물이 대신사께서 하늘에 모신 그 청수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억지스런 상상을 해보았다.

목을 축이고 용담정을 내려갔다. 대신사의 구도의 흔적을 하나라도 더 찾고 싶었지만, 대구를 가려면 지금 나서야 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황급히 산을 내려왔다.

최수운 대신사와 동학창도


최수운 대신사는 1824년 10월 28일 경주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서출이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조실부모하여 울산에 내려가 무명행상을 직업으로 각처를 돌아다녔다. 1855년 금강산 유점사의 어떤 중으로부터 을묘천서를 받아 도道공부에 뜻을 두고, 1857년에 천성산 적멸궁에서 49일을 기약하고 천주강령의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59년 10월에 다시 발심하여 경주 용담정으로 들어가 “천주를 친견하기 전에는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모진 각오를 하고서 다시 공부에 들어가니 1860년 4월 5일 드디어 상제님으로부터 일성을 듣는다.

“물구물공勿懼勿恐하라 세인世人이 위아상제謂我上帝어늘 여부지상제야汝不知上帝耶아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이 상제님과의 천상문답사건으로 최수운은 천명과 신교를 받아 동학東學을 창도하게 된다.

천상문답사건



안심가를 보자
사월이라 초오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러라
공중에서 웨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집안사람 거동 보고 경황실색 하는 말이
애고 애고 내 팔자야 무슨 일로 이러한고
애고 애고 사람들아 약도 사 못해볼까
침침칠야 검은 밤에 눌로 대해 이말 할고
경황실색 우는 자식 구석마다 끼어있고
댁의 거동 볼작시면 자방머리 행주치마
엎어지며 자빠지며 종종걸음 한참할때
공중에서 웨는 소리 물구물공 하였어라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


사월이라 초오일. 4월 5일을 말한다. 『도원기서』를 보면 4월 5일은 장조카인 맹륜의 생일이다. 생일잔치에 초대되어 장조카 집에 갔다가 신명체험을 한 것이다. 꿈일런가 잠일런가. 혼몽의 경계에서 이루어졌다. 대부분 신도의 체험은 경계가 없어질 때 이루어진다. 즉 시공의 무극상태에서 느껴진다. 공중에서 웨는 소리. 공중은 하늘을 말한다.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그래서 천상문답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후 7구절은 이 사건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경황실색, 엎어지며 자빠지며.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다시 공중에서 웨는 소리. 이것이 천상문답 사건의 전말이다.

상제님은 천상문답 사건을 통하여 수운에게 신교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 메시지는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 본주문 열 석 자였다.

상제님의 천강서-시천주주


천상문답 사건을 통해서 수운 대신사가 받은 이 주문은 상제님께서 내려주신 천강서天降書이다. 상제님이 인류에게 내려주신 첫 번째 천강서는 천부경天符經인데, 81자로 구성된 이 경전은 환국桓國 구전지서口傳之書이고 인류 최초의 계시록이며 신교神敎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이 천부경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 상제님께서 태호복희씨를 통해 내려주신 하도河圖와 우임금을 통해 내려주신 낙서洛書다. 그리고 다시 동양의 이름 없는 구도자인 수운 대신사를 통해서 후천개벽의 천강서를 내려주신 것이다.

상제님께서 내려주신 시천주주는 사람들을 통해 동학의 중심 주문으로 회자되었다. 이러한 동학이 인류 역사에 전한 핵심 메시지는 오만년 무극대도의 출현과 상제님에 대한 시천주 신앙 및 후천개벽의 도래를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우주주재자 상제님께서 수운에게 직접 천명을 내려 새 세상이 열림을 선언케 하신 대사건이므로, 인류 근대 역사의 진정한 출발점은 바로 동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2부 대구에서


경주에서 대구까지는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대구의 첫 행선지는 달성공원이었다. 지금의 달성공원은 옛날 달성읍의 토성이 자리했었다. 토성 안은 달성의 모든 유지들이 모여 살고 있을 정도로 번화가였다. 이 달성공원 안에 최제우 대신사의 동상이 있다. 용담정에 있던 동상과 같은 모습인데, 크기는 작다.

수운 대신사는 경상 감영에서 돌아가셨다. 지금의 대구가 경상 감영이 있던 곳이다. 달성공원이 대구의 대표 공원이니 대신사의 동상이 모셔져 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구에서 대신사의 이름을 찾기는 어려웠다. 최제우라는 이름이 붙은 유적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귀를 번뜩이게 하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최제우나무’다. 이름만으로는 무언가 대신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법했다. 기대감을 갖고서 최제우나무가 있는 종로초등학교로 발길을 옮겼다.

종로초등학교는 달성공원에서 10분 거리 대구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다. 초등학교 안으로 들어가니 학교 건물 앞쪽에 거대하게 자리잡은 나무 한그루가 보였다. 푯말에는 '최제우나무'라고 쓰여 있었다.

최제우나무는 현재 나이가 400살인 회화나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이면 1600여년이니 대신사께서 돌아가신 1864년에도 이 나무는 살아있었다. 종로초등학교 뒤편 대안성당은 옛날 경상 감영 감옥터였다. 이곳은 종교범들을 수용한 곳이어서 이곳에 대신사도 수감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대신사가 옥사를 치르는 것을 이 나무는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 이름이 ‘최제우나무’였다.

종로초등학교 근처에는 경상 감영 공원이 있다. 공원으로 발길을 옮겨 관광안내소의 안내원에게 대신사의 처형 장소를 물었다. 안내원은 두 군데를 소개해 주었다. 한 곳은 앞서 말한 대안성당, 다른 곳은 현재 천주교 순교기념관이 들어서 있는 관덕정이었다. 먼저 대안성당을 찾아갔다. 그곳의 안내문을 보니 주로 1600년대의 천주교 박해에 관한 내용이고 어디에도 대신사에 관련된 내용은 없다. 이내 관덕정으로 행선지를 옮겼다. 현재의 관덕정은 천주교 순교기념관이 되어 있었는데, 천주교의 역사 전에 동학의 역사가 먼저 있었다. 원래의 관덕정은 상제교의 교주인 김연국이 먼저 그 건물을 사서 동학의 성지로 확보해둔 곳이라고 한다. 시천교의 대구동부사무소로도 활용한 적이 있었던, 동학과 밀접히 관련된 장소였다. 그런데 해방 후에 그 관덕정은 헐려버리고, 그 근처에 다시 관덕정이 지어진 후 이름은 천주교 순교기념관이 되었다.

관덕정은 영조 때 도시청都試聽으로 쓰였다. 도시란 병조, 훈련원의 당상관 또는 지방의 관찰사, 병마절도사가 무사를 선발하는 시험을 말한다. 관덕정은 평지보다 높게 흙을 돋운 자리에 세워졌다. 건물 크기는 약 백 명 정도가 들어앉을 넓이였고, 전형적인 정자 건축 양식이었다. 이후 관덕정은 경상 감영의 죄인들을 처형하던 처형장으로 쓰였다. 중죄인 경우는 관덕정 앞뜰에서, 잡범인 경우는 관덕정 남쪽의 아미산 기슭에서 처형하였다.

대신사는 역모의 죄로 몰렸으니, 중죄인으로 잡혀왔을 것이다. 지금의 대한 적십자 병원 일대와 동아쇼핑 센터 앞에서 반월당 네거리가 관덕정의 앞마당에 해당된다. 지금의 계산아파트가 들어선 곳이 대신사가 처형된 곳으로 짐작된다. 천주교의 성지에서 동학의 역사가 발견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학西學이라 불린 천주교는 조선의 전통과 예법에 어긋나고 풍속을 해친다 하여 배척당한 역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신봉하는 바로 그 ‘천주天主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새로운 근대 역사의 장을 연 대신사의 동학東學이 이곳 관덕정에 겹쳐 오버랩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천주天主의 진실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지 않는가?

대전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대신사와 천주는 결코 뗄 수 없는 관계다. 최수운의 동학은 처음과 끝이 천주天主, 즉 상제님이었다. 수운의 삶 자체가 천주를 찾은 구도의 삶으로 대변되므로, 대신사의 동학은 '천주의 교'였다. 동서 역사에서 일관되게 찾아 온 천주님의 성령을 접하고 인류사에 획기적인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고서도, 대신사의 삶은 천명과 신교를 제대로 펼치지 못한 한계 속에서 마감을 해야 했다. 이후 동학은 최시형, 손병희라는 지도자를 차례로 거치면서 시천주侍天主라는 하느님 신앙의 본질을 지키지 못하고 왜곡 변질되었고, 동학혁명 역시 역량과 준비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동학의 외침과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 채 누적된 한恨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의 아쉬움과 한 맺힌 소망은 예고된 바와 같이 천주님의 지상 강세로 반전을 맞았다. 이 땅에 오신 천주 증산상제님의 대도진리로 동학의 모든 문제와 이상을 바로 세우고 실현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나아가 본래 9천년 동방의 문화와 역사, 지구촌의 역사를 결실하는 대업을 향해 ‘참동학’ 증산도의 발걸음이 지금 하나하나의 역사로 새겨지고 있다.

너희가 어찌 상제님을 알겠느냐며 준엄하게 외친 수운 대신사의 일성이 가슴에 울려 퍼진다. 그토록 간절히 부르짖은 ‘상제님’의 참 진리가 세상을 향해 널리 펼쳐지고 있는 현재 모습을 본다면, 그 분은 어떤 말씀을 들려줄 것인가.

상제교上帝敎
최시형의 수제자 김연국이 시천교에서 갈려 나와 1924년에 세운 동학의 일파다. 교리는 동학의 일반적 교리인 인내천과 시천주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천단을 쌓고 인시와 술시에 청수를 올리고 예배를 드린다. 교리자체는 천도교와 비슷하나 항상 사당을 설치하고 신위를 안치한다. 지금은 계룡산 일대 1,000명 가량의 신도들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시천교侍天敎
천도교로부터 갈려 나와 이용구가 1906년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서 세운 동학의 일파다. 명칭은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에서 따왔다. 교리와 의식은 천도교와 비슷하며, 친일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천교역사』라는 책과 <시천교 월보>라는 잡지를 출판하였다. 1970년 재단법인등록을 했으나 두드러진 활동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