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상흔의 역사를 지닌 아프가니스탄

[세계지역문화탐방]
아프가니스탄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라이다. 고대에는 ‘실크로드Silk Road(비단길)’의 중심지였지만 중앙아시아와 이란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1919년 독립 이후에도 여러 분쟁 요인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내전 상태로 빠져드는 바람에 세계적인 극빈국이며 위험 요소가 많은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는 다민족ㆍ다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땅이었고 과거와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땅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정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노종상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자연환경과 역사


자연환경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걸쳐 있는 내륙국이다. 동쪽으로는 파키스탄과 중국(일부), 서쪽으로는 이란, 북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ㆍ타지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 등 6개국과 각각 접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이 메마르고 기름지지 못한 산악지대 또는 사막지대이다. 북부와 남서부 평원지역 일부는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갖춘 농업지대. 전국토의 1/8가량을 차지하는 농경지(약 12.13%) 가운데 1/3에 관개시설이 되어 있으며 이 관개지역에서 전국 작물의 80% 이상이 생산된다.

아프가니스탄은 3개의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주요 농업지역인 북부 평원지대, 리게스탄 사막을 비롯해 주로 사막과 반半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남서부 고원지대, 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힌두쿠시 산맥을 포함해 히말라야 산맥의 연장지대인 중부 산악지대 등이 그것이다.

북쪽의 여러 공화국들과 국경을 이루는 지역에는 아무다리야 강(고대에는 옥수스 강)이 흐르고 있다. 남서부 고원지대에는 길이 1,150km의 헬만드 강이 여러 차례의 관개공사를 거쳐 이 지역의 필요한 농업용수 대부분을 공급한다.

아프간은 대륙성 기후로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춥다. 해발 1,770m의 고지에 위치한 수고 카불의 여름 최고기온은 35~40℃, 겨울 최저기온은 -5~0℃이지만 지방 산악지대의 겨울 최저는 -35℃, 사막지대의 여름 최고는 55℃에 이른다. 중부 산악지대는 아亞북극기후로 여름이 매우 짧고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는 기후이다. 나머지 지역 역시 겨울에는 대부분 춥지만, 여름에는 더운 반건조 스텝 지대이거나 사막지대이다.

강우량은 극히 적어 연평균 101~406㎜ 수준이다. 좀 구체적으로 남서부 사막지대의 75㎜ 미만에서부터 힌두쿠시 산맥의 1,270㎜ 이상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아프간에는 막대한 양의 고급 철광석을 비롯해 중요한 여러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채광과 수송상의 문제 때문에 거의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북부 평원지역에 매장된 천연가스만이 유일하게 개발되어 상당량 생산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고대 이민족 지배 시대
아프간의 역사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규정되어진 측면이 크다. 중앙아시아의 교차로 또는 동·서양의 주요 육상 연결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여행자, 유목민, 상인, 군인들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전략적인 지점에 위치한 아프간 지역은 그만큼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지금의 명칭으로 처음 이슬람 자료에 나타난 것은 982년이다. 하지만 그 이전 고대 역사부터 살펴보면 아프간 지역은 페르시아(고대 이란)와 인도 지역의 경계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인도와 그리스, 페르시아계 국가들에 의해 번갈아가며 지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BCE(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 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인도, 아프가니스탄까지 확대하였다. 이후 BCE 4세기에는 페르시아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대왕Alexandros the Great에게 아프가니스탄이 정복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아프간 일부 지역은 시리아에 거점을 둔 셀레우코스Seleukos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또 일부는 인도 북부에 근거를 둔 마우리아Maurya 제국에 넘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박트리아(지금의 ‘발흐’ 지방) 총독통치령에서는 박트리아Bactria 왕국이 생겨나 그리스와 인도의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선보였다. BCE 2세기에는 인도 쿠샨Kushan 왕조의 카니슈카 왕(78~144경)에게 정복되었다. 이어 에프탈Ephtalite 왕조와 페르시아 사산Sasan 왕조를 거치면서 힌두교의 영향권에 들어섰으며, 870년경 사파르Saffarid 왕조 시대에는 이슬람교가 뿌리내렸다. 1219년에는 칭기즈 칸의 몽골Mongol 제국의 침략을 받았는데 몽골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독립된 제후국들로 분리되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인도 무굴Mughul 제국과 페르시아 사파비Safavid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최초의 근대 통일국가 두라니
1747년 이란장교 출신인 두라니Ahmad Shar Durrani는 칸다하르에 자치정부를 수립, ‘두라니Durrani 제국’을 건설하였다. 자신의 부족인 파슈툰족 사도자이 부족을 중심으로 통치했던 두라니는 동으로 인도 무굴제국을 격퇴하고 서로는 페르시아로부터 헤라를 탈환하는 등 아프간 영토를 공고화하고 가장 광대한 회교제국을 형성하였으므로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출발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1772년 두라니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티무르 샤Timur Shah가 즉위하고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Kabul로 옮겼다. 혈족에 바탕을 둔 티무르의 통치는 비 파슈툰족 및 같은 파슈툰족의 길자이 부족으로부터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 1818년 사도자이족 왕조가 멸망한 후에는 왕권쟁탈을 위한 내전이 아프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826년 두라니 부족 출신의 도스트Dost가 집권하였다. 도스트는 아들을 동부지역으로 파견하여 시크Sikh군을 격퇴한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도스트는 시크족의 위협에 대한 방어를 위해 당시 인도에 주둔 중이던 아우크랜드Auckland 영국총리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는 영국이 아프간 분쟁에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된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아프간 내전의 원인은 이데올로기적, 제도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의무와 충성심에 바탕을 둔 개별적인 요인이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 이는 아프간 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3차 아프간전쟁과 독립 군주국 시대
19세기 이후 아프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와 영국의 완충지대로서 두 제국에 의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즉 제국주의적 경쟁과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남쪽 부동항을 찾으려는 남하 정책의 거점이면서 자국의 영향권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앙아시아 내륙국들에 대한 영국의 개입을 방지하려고 했다. 반면 대영제국은 러시아가 자국의 식민지인 인도까지 진출할 것이라고 판단, 이를 막기 위해서 인도로 넘어오는 길목인 아프가니스탄을 세 차례나 침공해 자국의 세력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것이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아프간-영국간의 전쟁(아프간 전쟁)이다.

영국은 도스트Dost 무하마드와 그의 아들 시르알리Shir Ali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제1차(1838∼1842)ㆍ제2차(1878∼1880) 아프간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일부가 인도에 할양되었으며, 1893년 아브도르 라흐만Abdor Rahman 칸 때 인도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1901년에는 연금을 받기로 하고 외교권을 인도에 일임하게 되었다. 1905년 하비브알라Habib Allah가 이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제정러시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하비브알라는 내정면에서는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중립을 엄수하였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反영국주의자의 손에 암살된 후 같은 해 후계자가 된 아만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 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한 결과 제3차 아프간전쟁이 벌어졌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였으므로 영국은 더 이상 전쟁의 여력이 없었던 탓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그 해 8월 아프간과 영국간에 라왈핀디Rawalpindi 화평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도 정부로부터의 연금이 폐지되고 외교지도권 폐지가 약정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어 아프간은 독립 군주국 체제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공화국 수립과 공산독재정권의 등장
1919년 8월 독립하며 군주제를 유지하게 된 아프간의 집권자는 아마눌라Amanullah왕이었다. 그는 1880~1901년간 재위했던 라만Rahman왕의 셋째아들이다. 아마눌라왕은 국내 통일과 서양문화 도입에 힘썼으나 종교 및 부족세력의 개혁정책에 대한 반발로 퇴위한 뒤 망명하였다. 뒤를 이어 1929년에 즉위한 나디르 칸Nadir Khan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열었으나 1933년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히르 샤Mohammad Zahir Shah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자히르는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으며 신중하고 온건한 정부를 운영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도 했으나 1973년 7월 국왕이 외유를 하던 도중에 좌익 파르캄(‘깃발’이라는 뜻)당이 지원한 군사혁명이 성공하면서 모하마드 다우드 칸Mohammad Daoud Khan 전前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다우드 칸은 새 공화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겸 총리가 되었고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프간 사회를 바꾸려고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외교적으로 친소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다우드 대통령은 친소련 정책을 펼치면서도 자국 내의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정치 세력들을 탄압했고 나아가 이슬람주의자들까지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 국내의 불만을 키웠고 결국 1978년 좌익계 군인들과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PDPA)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 대통령을 시해하였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 민주당 당수였던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인민민주당 1당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쿠데타로 공산 독재 정권을 세운 인민민주당은 급진적인 공산화 정책을 펼쳤으나 이러한 정책은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종교를 부정하면서 이슬람교 세력들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보수적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소위 ‘무자헤딘(مجاهدين; mujaheddin)’이라 불리우는 이슬람주의 반정부 게릴라들이 공산 독재 정권에 저항해 일어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정부군과 무자헤딘간의 충돌로 인해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또한 집권한 인민민주당 내부에서도 여러 파벌들의 분열상이 나타났고 1979년에는 당내 권력 투쟁에서 타라키가 실각되고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이 대통령이 되었다. 아민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내정간섭을 거부했고 이슬람 세력들과 반공 세력, 당내 정파 세력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아프간의 분열과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으며 공산 정권을 붕괴 위기로 몰고갔다.

아프간-소련 전쟁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인접국 소련은 아프간 내부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자국의 영향력이 상실되고 이슬람 인구가 밀집된 소련남부의 공화국들로까지 그 여파가 미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결국 소련은 1979년 12월 27일 기존 정권 수호라는 명분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해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아민 대통령을 사살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소련 전쟁이 개시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에 성공한 소련은 인민민주당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해 체코 영사로 밀려난 바브라크 카르말Babrak Karmal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친소련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군 게릴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소련군 및 친소 카르말 정부군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무자헤딘은 산악지대가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산악전과 게릴라전 형태의 전투 방식으로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이때 수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은 소련군의 반군 진압작전을 피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도피했다. 소련군 침공 후 게릴라군이 대부분의 농촌지역을, 소련군이 도시지역과 지방수비대 부근지역을 나누어 지배하며 대치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소련은 막대한 전비를 쓰고 병력도 쏟아부었지만 전세를 회복하지 못하자 1985년부터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를 고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군 병력 철수를 시작해 이듬해인 1989년 완료함으로써 아프간-소련 전쟁은 소련군의 퇴각으로 막을 내렸다.

나지불라-무자헤딘 내전
그러나 카르말에 이어 집권한 친소 정권인 모하마드 나지불라Mohammad Najibullah 정권이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반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주요 도시들을 계속 지배하려 하자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 사이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주둔 소련군이 두고 간 무기들과 소련의 추가 지원을 받은 정부군이 우세했지만 무자헤딘이 산악지대를 거점삼아 강력한 게릴라전으로 저항하면서 나지불라 정부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무자헤딘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시행된 정부군의 공군기 폭격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에 대한 약탈과 강간, 방화 등이 자행되면서 나지불라 정부는 국민들의 민심마저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정부군은 패퇴를 반복했고 무자헤딘에 투항하거나 탈영하는 장병들이 늘어났으며, 1991년 소련마저 붕괴되면서 지원이 끊기는 등 악재가 계속되면서 위기에 몰렸다. 무자헤딘은 점차 세력을 넓혀 카불을 제외한 아프간 전역을 장악했고, 마침내 1992년 4월 25일 나지불라 정권의 최대 거점인 수도 카불의 점령에 성공하면서 결국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되고 14년(1978~1992)간 계속된 장기간의 내전은 무자헤딘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200만 명이 사망했고 5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국토는 폐허가 되는 참화를 겪었다. 종전 후 이슬람 집권평의회 의장 모자데디는 5월 내각을 발족시키고, 6월 랍바니Burhanuddin Rabbani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12월 랍바니는 임기 2년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탈레반-북부동맹 내전
하지만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트리고 아프가니스탄 정국을 장악한 무자헤딘은 강고한 통일체 조직이 아니라 여러 무장군벌과 파벌들로 이루어진 엉성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이를 극복하고 단일 조직체로 통합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결국 무자헤딘 세력들간에 전후 처리와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충돌하면서 아프간은 다시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내전의 혼란속에서 이슬람 성직자였던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Mullah Mohammed Omar가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서부에서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던 2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1994년 10월 남부 도시 칸다하르에서 탈레반Taliban이라는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결성하고, 랍바니 대통령과 다른 무자헤딘 세력들을 대상으로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원리주의Islamic fundamentalism를 표방했다. 탈레반의 무장투쟁은 정권과 군벌의 학정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따라 탈레반은 무장투쟁 2년 만인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랍바니 대통령을 축출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극단적인 원리주의 독재 정치를 시작하여 TV 방송과 라디오 방송을 금지시키고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하는가 하면 음주, 담배흡연, 면도, 영화를 금지하고 연날리기나 부즈카시같은 아프간의 전통놀이도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며 금지했으며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을 가했다. 또한 문화재 파괴에 민간인 학살, 법 위반자에 대한 손목절단과 잔인한 총살형 등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포로 몰아갔다.

이에 탈레반 정권 성립 후 부르하누딘 랍바니 등 몇몇 무자헤딘 세력들이 북부 산악지역으로 달아나 결성한 북부동맹(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 전선)이 탈레반 정권에 맞서 내전을 지속하였다.

아프간-미국 전쟁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건물이 비행기 테러(9.11테러)를 당했다. 그런데 이 테러의 주모자로 알려진 이슬람 근본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가 이끄는 국제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Al-Qaeda가 아프간의 탈레반들과 연합했으며 그들이 아프간에서 은신하며 신변을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미국은 이들의 신변을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탈레반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과 미국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영국과 함께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아프간 반군인 북부동맹도 공격을 강화하여 2001년 11월 수도인 카불을 점령하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이후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2001년 11월 26일 독일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4개 정파(로마그룹, 페샤와르그룹, 북부동맹, 키프로스그룹)가 참여해 파슈툰족 출신인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2005년 9월 개최된 아프간 총선 이후 2005년 12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된 제헌의회가 개원되고 이 의회에서 카르자이 대통령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미국에 패한 탈레반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카르자이 정권에 끈질기게 항거하고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내전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현재 3만 3000명 규모의 미군을 아프간에 주둔시키고 있는데, 과거 소련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나토NATO 진영은 아프간 반군과의 오랜 소모전으로 인해 많은 손실을 입고 있는 상황이므로 2014년부터 치안권을 아프간 정부에 넘겨주고 서서히 철수할 전망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국제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시아파 교도들과 이란에 있는 180만 명의 난민을 이유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일정 부분 관여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내의 이란 견제세력을 지원했다. 파키스탄에는 15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있을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 파슈툰족의 영원한 고향이므로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밖의 나라들은 아프가니스탄 군벌 세력이 양성하는 테러리스트 및 아프가니스탄에서 상당량 생산·거래되는 마약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관련된 러시아ㆍ유럽연합(EU) 등 초강대국들이 미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한층 더 복잡한 상태에 놓여있다.

정치 및 행정


정국 개황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체제는 이슬람공화국이고,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이며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은 2014년 5월 22일 임기가 종료되는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사는 여러 정치적 세력간의 다툼과 정변 및 권력 이동의 불안정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1919년 독립 이후 아프간은 왕정(1919), 공화정(1973), 공산 통치(1978), 소련의 침공(1979), 원리주의 신정(1996), 미국의 침공(2001) 등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의 정치 형태를 겪었다. 무자헤딘이 나지불라 공산 정권을 무너뜨린 1992년 이전까지 아프간은 PDPA(인민민주당)가 주요 도시들을 지배했고, 농촌지역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고 중앙정부를 무너뜨린다는 목표 아래서만 협력하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1992년 공산주의 정부가 전복되자 옛 게릴라 반군, 종교지도자, 지식인 등으로 이루어진 폭넓은 이슬람교 단체 연합이 의장을 포함해 51명으로 구성된 통치회의를 카불에 결성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 뒤 미국이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고 나서 카르자이 과도정부가 구성된 후, 2003년 로야지르가Loya Jirga(아프간 종족 대표자 회의)에서 비준되고 2004년 1월에 채택된 신新헌법에 의해 아프간은 3부(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로 이루어진 현재의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신헌법의 주요 내용은 이슬람 외 여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대통령 중심제 및 양원제 채택, 여성의 정치·사회 진출을 허용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2014년 올해 차기 대통령 선거 등 주요 정치일정들에 당면해 있는 아프간의 정국은 선거준비 미비와 치안 불안 등의 요인들 때문에 예정대로 정치일정들이 치러질 지에 대해 일부에서 우려를 제기하고 있을 정도로 미래가 아직 불확실한 상황이다. 또한 아프간은 2009년 11월 국제 투명성 기구의 연간 부패 지수에서 세 계단이 떨어져서 소말리아 다음으로 부패가 심한 세계 2위의 나라가 되었다.

정부와 의회 및 법원
아프간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행정부의 수반이다.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는 2004년 10월 55.4%의 지지율을 얻어 임기 5년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9년 8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치안 부재와 낮은 투표율, 각종 선거 부정들로 얼룩진 가운데 다시 당선되어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행정부의 내각은 대통령과 함께 국민 직선으로 선출되는 2명의 부통령과 대통령이 국회의 승인을 얻어 임명하는 25명의 각료로 구성된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 의회 결정비준권, 장관ㆍ판사ㆍ장교 임명동의권, 비상사태 선포권 등을 가지며, 내각은 대내외 정책을 집행하고 경제발전계획을 추진한다.

입법부의 의회 형태는 양원제로, 원로회의로 불리는 상원Meshrano Jirga은 102명의 의원(임기 4년의 34석은 주선거에서, 임기 3년의 34석은 지방선거에서 선출되며 임기 5년의 나머지 34석은 대통령이 지명)으로 구성된다. 하원Wolesi Jirga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249석이 구성되고 임기는 5년이다. 의회는 3분의 2 이상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법안을 제출ㆍ수정ㆍ폐지할 수 있다. 양원의 의견이 어긋나는 경우 합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정한다. 족장회의에서 유래된 로야지르가Loya Jirga는 독립, 국민 주권, 영토 통합, 헌법 개정, 대통령 탄핵 등을 의결하며 국회의원, 주 및 지방 정부장으로 구성된다.

아프가니스탄의 사법부는 한때 과도정권하에서 근본주의자 종교인들이 장악을 한 결과 케이블 텔레비전 금지령이나 여성 권리의 제약 등에 대해 판결하거나 헌법상의 권한을 무시하고 법원에 맡겨지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기도 하는 등의 파행을 겪었다. 하지만 현행 법원은 과거에 비해 더욱 온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전 법원보다는 기술 관료들이 더욱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행정구역
아프가니스탄의 지방 행정구역은 34개 주Province로 구성되어있으며, 각 주는 영내에 주도를 두고 있다. 각 주는 10여개의 군District으로 나뉘며, 전국적으로 364개의 군이 존재하는데, 각 군은 보통 한 도시나 여러 마을로 되어 있다. 각 주에는 주의회Provincial Council가 구성되며, 아프간 전체 주의원 수는 420명이다. 주지사는 내무부에서 임명하고, 군수는 주지사가 임명한다. 주지사는 아프가니스탄 중앙 정부의 대표자이며, 모든 행정 및 공무를 담당한다. 주의 경찰국장도 내무부에서 임명하는데, 주지자와 협력하여 주내 모든 도시나 군의 법 집행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수도 카불Kabul은 예외적으로 시장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임명하며, 카불 주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경제


191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아프간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전근대적인 종교 관습, 공업기반의 결여 등으로 경제 전체가 농업에 크게 의존하는 전형적인 농업국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79년 소련 침공 이후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도입되었다. 이후 계속된 내전으로 피폐한 경제기반조차 파괴되었고 경제활동에 필요한 인력 및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면서 아프간 경제는 지속적인 침체기에 빠져 있다. 2001년 말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아프간은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고 국제사회의 원조 및 지원에 힘입어 2007년까지 연평균 11.9%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경제성장의 밑바탕에는 농업분야를 중심으로 건설, 무역, 최근에는 무선통신 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등장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GNP의 2/3는 농업이, 나머지는 광업·제조업·공공사업 부문과 교역이 차지하며, 주요 교역국으로는 파키스탄, 인도, 미국, 타직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아프간은 세계 최대의 아편 생산국이다.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의 생산 조건이 아프간의 건조한 기후와 맞아 떨어지고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라서 적발이 힘들며 전쟁으로 인한 치안 부재 상태로 인해 아프간은 완벽한 아편생산지가 되었다. 과거에는 탈레반이 아편 생산을 금지하였지만, 미국과의 전쟁 이후 오히려 탈레반이 자금 확보를 위해 아편 생산을 독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IMF 및 관련 국제기구인 UN마약범죄사무국(UNODC) 등은 아편산업 규모가 아프간 전체 GDP 규모의 40%에 달하고 있으며, 지하경제 규모가 전체 경제규모의 80~9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아편산업 및 지하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아프간 정부는 경제 재건을 위해 필요한 세금 및 수입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8년 아프간 정부는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전략 및 정책 수립을 위해 IMF와 공동으로 아프간 개발 종합전략(Afghanistan National Development Strategy)을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종교와 문화


인종, 언어와 종교
아프가니스탄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파슈툰Pashtun족이다. 타지크족ㆍ우즈베크인ㆍ하자라인이 다음을 차지한다. 파슈툰족은 주로 남부와 동부 지역에 살고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착생활을 한다. 타지크족들은 대부분 농민과 장인匠人들이며 주로 헤라트 북동부와 서부 주변지역에 산다. 우즈베크인들은 주로 농민으로 힌두쿠시 산맥 북쪽 지역에 살며, 하자라인들은 중부 산악지대에 살면서 유목을 하고 있다.

공용어는 파슈토(파슈투)어와 페르시아어의 일종인 다리어로서 2가지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다리어를 쓰며 약 1/3(주로 타지크족ㆍ하자라인ㆍ샤하르아이마크인ㆍ키질바시인)은 파슈토어를 쓴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에서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우즈베크어ㆍ투르크멘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3/4가량이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약 1/4은 시아파 이슬람교도이다.

인구는 전쟁과 난민들의 대대적인 탈출로 1980~1985년에 연간 약 2%씩 감소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인구성장률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평균수준으로 다시 돌아왔다. 출생률과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지만 인구의 45%가 15세 이하의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인구의 4/5 이상이 시골에 살며 1/5 정도는 유목생활을 한다. 가장 큰 도시는 카불Kabul이며 다른 주요도시로는 칸다하르ㆍ헤라트ㆍ마자르에샤리프ㆍ잘랄라바드ㆍ콘두즈 등이 있다. 도시의 거주지 대부분은 카불에서 남서쪽으로 칸다하르, 북서쪽으로 헤라트, 북동쪽으로 마자르에샤리프를 거쳐 다시 남쪽 카불로 돌아올 수 있도록 건설된 주요 순환도로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다. 농촌 인구는 주로 강변에 집중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평균수명은 약 46세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결핵과 세균성ㆍ아메바성 이질의 발생률이 높으며 의료시설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성인의 문자해독률은 약 25%에 지나지 않는다. 1979년 정부에서 7~15세의 어린이를 위한 무료 의무 교육제도를 처음 실시했으나 초등학교 취학연령 어린이들 가운데 실제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는 1/3에 불과하다. 거듭된 전쟁으로 고등교육의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언론매체는 철저히 정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선전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 문화적 특징
전통적인 아프간 사회는 험악한 산악과 사막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각 종족들은 독립성이 강하고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며,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아프간의 개인주의는 단순히 개인중심주의가 아니라 가족과 부족을 강조하는 특성을 띠고 있다.

특히 파슈툰족은 아프간의 지배적인 종족이다. 이들 종족은 약 200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해 왔다. 파슈툰의 문화적 특성은 전통적으로 용기, 활력, 호전성을 강조해 왔다. 자신들의 문화적 유사성 및 동질성을 수호하기 위해 어떤 투쟁도 불사한다.

파슈툰족은 강력한 부계사회와 대가족제를 유지하고 있다. 부족의 혈통을 종교나 사상적 요소보다 중시한다. 따라서 종족수호를 위한 충성심, 협동심, 희생과 봉사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파슈툰족 사회에서 개인은 파슈툰왈라Pashtunwali라고 불리는 기사도 규범(일종의 불문법)을 엄격히 추종한다. 이 불문법의 주요 골자는 바달Badal(복수), 멜마스티아Melmastia(환대), 나나와티Nanawati(보호)이다. 이중에서 특히 바달은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으로 되어 있다. 직계가족의 복수는 그 마을뿐만 아니라 종족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다.

파슈툰족 사회의 유일한 통치기구는 지르가Jirga(부족장회의)이다. 지르가는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 오면서 관습적으로 제도화되었다. 전쟁이나 평화와 같은 중요한 문제는 모두 이 지르가에서 논의되어 결정된다.

파슈툰족의 오래된 집권은 다른 종족과의 대립을 유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비파슈툰족은 하자리족ㆍ우주베크족ㆍ타지크족 등이다. 파슈툰족과 비파슈툰족이 대립은 아프가니스탄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18세기 중엽 아흐마드 샤가 파슈툰족 중심의 아프간 왕조를 건설하였을 때 비파슈툰족은 자신들의 권리가 박탈당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슈툰족의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비파슈툰족은 ‘파슈툰’의 동의어인 아프간이라는 단어가 국가적 시민권으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한다. 이와 같은 종족적 소외감은 아프간 단일국가 건설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파슈툰족과 비파슈툰족과의 갈등은 근친결혼과 사회경제적 이동이 강하게 나타나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어왔다.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


아프가니스탄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1973년 12월에 한국과 아프간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75년 한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상주대사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1978년 9월 아프간에 좌경 성향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 정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공관을 폐쇄했다. 그러다가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고 과도정부가 수립되면서 2002년 1월에 양국의 외교관계가 재개되었고 그 해 9월에는 주아프간 한국대사관이 재개설되었으며, 동년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아프간이 참가하기도 했다. 2004년 1월에는 주한 아프가니스탄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아프간에 체류중인 교민은 2013년 현재 86명이며,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인 아프간 방문자는 379명, 아프간인 한국 방문자는 1,008명을 기록하고 있다. 양국간 교역은 1.4억 달러(2012년 기준, 수입은 없고 수출만 1.4억 달러)이며, 대對아프간 투자도 2012년까지 58만 달러 정도에 그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등으로 많은 상처를 입은 탓에 국가적인 재건 지원 사업이 필요한 나라이다. 한국은 2002년 2월 아프간에 최초로 공병지원(다산 부대)과 의무지원(동의 부대)의 병력을 파견하였다가 파병기한이 연장되지 않아 2007년 12월 철수하였다. 2007년은 아프간에 선교활동을 간 한국 교회 선교자들의 피랍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2008년 6월에는 카불 북방 60km 지역에 소재한 바그람Bagram 기지에서 재건사업(병원 운영)을 개시하였으며, 2010년 7월에는 오쉬노Ashena(현지어로 ‘동료’, ‘친구’의 의미를 지녔다고 하여 붙인 애칭) 부대가 재파병되어 파르완Parwan주州에서 독자적인 PRT 활동을 시작하였다. ‘PRT’란 외교관, 군인, 재건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아프가니스탄에 국제안보지원군(ISAF) 소속으로 활동 중인 각국의 지역재건팀(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2011년 1월에 독자 PRT기지인 차리카르Charikar 기지에 입주하였으며, 2012년 2월에는 차리카르 기지 주요 재건시설을 개소하였다. 이어 2012년 12월에 차리카르 기지를 아프간 정부로 이양하였지만, 바그람 기지 재건사업은 지속하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과 북한은 1973년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아프간의 공산 정권이 붕괴된 후 1993년부터는 사실상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