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은 동북아를 지배한 천자국

[특집]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
안경전 종도사님의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7〉

단군조선은 47대 단군들께서 2096년간 경영한 대제국이었다!


“고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은 원래 그냥 조선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조선보다는 단군조선이라는 말이 더 나을 것입니다.”
“너도 나도 본래 이름대로 부르다 보면 어렵지 않게 온 국민이 단군조선이란 명칭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환국-배달의 경우와 달리 단군조선은, 일단 그 이름만큼은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다. 그 내용이야 전혀 만족스러운 것이 못되는 두세 쪽에 불과해도, 우리 초·중·고 국사교과서는 으레 단군조선 이야기로 시작된다.
곰과 호랑이가 100일 동안 마늘과 쑥을… 운운하는 이야기, 10월 3일 개천절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날이라는 이야기 등도 한국인에게는 익숙하다. 그러나 그저 파편처럼 부서져 굴러다니는 이런 몇몇 이야기 토막들 말고, 사실 단군조선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단군의 후손을 자처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열에 아홉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한국사는 단군신화에서 시작됐다’고 습관처럼 말한다. 또 허다한 나라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건국·개국신화와 마찬가지로 단군신화 역시 말 그대로 신화神話일 것이리라… 별다른 저항감 없이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단군조선은 어떤 나라, 어떤 시대, 어떤 사회였는가.

환국, 배달이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하는 우리 역사기록


◎ 한민족의 첫 나라 환국이나 그 뒤를 이은 배달국에 대해서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그에 비하면 단군조선은, 비록 자세히는 아니어도 늘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교과서 앞쪽에 수록됩니다. 같은 상고사인데도 환국, 배달은 제쳐놓고 단군조선만 수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근거가 되는 ‘옛 기록의 있고 없고’ 차이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됩니다. 사실 『환단고기』 이외에 환국, 배달의 존재와 실체를 알려주는 사서는 거의 없습니다. 반면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여러 사서에 그에 관한 기록들이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고려 때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군조선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들은 대개 이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을 전하는 다른 기록도 있습니다. 『삼국유사』가 나온 같은 시대 학자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삼국유사』에서 일연 스님은 『고기古記』라는 사서를 인용해서 단군의 건국과정을 소개했고 이승휴는 『본기本紀』라는 다른 사서를 인용해 단군 이야기를 썼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본기를 『단군본기』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환웅과 곰과 호랑이와 쑥과 마늘 등의 이야기는 『고기古記』에 바탕한 것입니다. 반면 『본기本紀』를 인용한 이승휴의 단군 이야기는 <환웅께서 손녀에게 약을 먹게 해 인간이 되게 했고, 이 손녀가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해 낳은 아들이 단군이며 바로 이 단군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돼 있습니다. 내용이 좀 다르지요? 이승휴가 인용한 『본기』가 어떠한 책인지, 혹은 어떤 책의 일부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비록 그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해도, 이미 고려 때 단군의 건국 스토리 혹은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들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왕운기』의 기록 가운데는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옥저, 북옥저, 북부여, 동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란 내용도 있습니다. 시라는 신라, 고례는 고구려입니다. 그러니까 신라, 고구려, 부여, 옥저 등 얼핏 따로따로 살림을 꾸려나간 여러 나라들이 사실은 모두 단군조선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군조선이 결코 신화나 전설 속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한민족 고대 국가들의 뿌리였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또 증언하는 기록입니다.

고려시대의 이 두 사서뿐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무려 2천년 앞선, 그러니까 실제로 저 대륙에 단군조선이 실재實在할 때 그 아랫동네 중국인들이 지은 『관자管子』라는 책에도 ‘조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중국의 유명한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도 ‘조선’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무리 일제 이래 식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를 지배한다 해도 이렇게 명백한 사료와 기록으로 전해지는 단군조선을 교과서에서, 또 실제 우리 역사의 맥락에서 지워버리거나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단군조선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지적하고 넘어갑시다. 단군조선에 대한 교과서 서술은 2~3쪽을 넘지 못해요. 그것도 대부분 단군왕검의 소위 건국신화와 그리고 위만조선 이야기예요. 위만조선은 단군조선이 47세 고열가 단군을 마지막으로 북부여로 넘어간 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러니 2천년 세월의 나라가 세워진 건국신화와 그 망한 후의 이야기만 서술하니 중간의 역사는 다 날아간 셈이죠. 교과서에 따르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은 준왕이었다고 되어 있어요. 실은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데 말이죠. 그러니 고조선의 망국과정도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않아요. 이것이 우리 국가교과서의 현실입니다.

◎ 교과서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고전 『관자管子』에 실려 있다는 단군조선 이야기는 어떤 내용입니까?
▶관자는 관중管仲을 가리킵니다. 서기전 7세기 춘추시대에 제나라 환공의 재상이었던 사상가이자 정치가입니다. 『관자管子』는 이 사람이 자신의 주군인 환공과 나눈, 치세治世에 관한 대화록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단군조선 이야기가 일부 들어 있습니다.

<환공이 진귀한 물건으로 화폐를 만드는 방안을 관중에게 묻는다. 관중은 음산의 연민(옥과 비슷한 귀한 돌), 연나라 자산의 백금, 여수와 한수의 황금, 강양에서 나는 구슬, 명산에서 나는 증청(장생불사한다는 선약), 변산의 옥, 발조선發朝鮮의 문피(호랑이 가죽)를 예로 든다>(「규도」편 제78)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희귀한 물건들을 화폐로 삼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발조선’의 문피가 포함된다는 것이죠. 이는 당시 조선의 호랑이나 표범 가죽이 중국에도 널리 알려진 귀한 물건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교역이 널리 행해졌으며 조선의 수출품 가운데 특히 문피가 유명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군조선의 삼분三分통치체제, 삼한관경제


◎ 발조선이요? 그것이 단군조선인가요?
▶이 발조선發朝鮮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발조선이 당시 단군조선의 일부였던 번조선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일제강점기 천재적인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 역시 그 같은 견해를 가졌습니다. 발조선이 불조선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렇게 보았던 것입니다. 신채호 선생 이야기는 〈원래 단군조선에서는 대단군이 ‘신한’으로 불렸는데, ‘말한’과 ‘불한’이라는 부왕副王들의 보좌를 받아 통치했다. 그런데 서기전 4세기경에 들어와 단군조선이 세 개의 조선으로 나뉘었다. 이때부터 신조선, 말조선, 불조선이 생겨났는데 여기서 불조선을 한자로는 발조선으로 기록했다〉, 그렇게 본 것이죠. 이 같은 시각으로 『환단고기』에 실린 사서들에서는 발조선을 번조선이라 하였습니다. 요컨대 발조선은 단군조선을 이루고 있던 번조선이라는 나라를 가리킨다는 말이죠.

◎ 그러면 불조선 말고 말조선, 신조선을 『환단고기』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나요?
▶『환단고기』에 실린 『태백일사』에서는 말조선을 ‘막조선莫朝鮮’으로 표기합니다. 어떤 의미의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다보니 말조선이라고도 하고 막조선이라고도 한 것입니다. 또 『태백일사』에는 ‘진조선眞朝鮮’이 나오는데 이것이 신채호 선생이 말한 ‘신조선辰朝鮮’입니다. 『태백일사』에 의하면 원래 이들 세 조선을 삼한三韓이라 했습니다. 대단군인 진한, 그리고 부왕副王인 마한과 번한이 각각 다스리던 세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누어 통치한 이 방식이 바로 단군조선만의 독특한 정치체제인 ‘삼한관경제三韓官境制’입니다. 삼분三分 통치제도인 것이죠. 저 북방의 흉노를 비롯해 여러 북방 유목민들이 나라를 통치하던 방식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가령 흉노에서는 통치자인 선우鮮于가 나라의 중앙부를 다스리고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어 좌우 두 지역을 각기 다스렸습니다.

◎ 삼한관경제, 삼분통치제는 통치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만물의 근원이 되는 절대자, 신神을 삼신三神이라 불렀습니다. 한분의 신이 실제 역사에서 작용할 때는 셋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손가락 하나가 세 마디로 이뤄져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정신을 땅이 이어받아 삼한三韓이 있게 되고 또 사람에겐 삼신의 신성이 깃들어 성명정性命精이라는 삼진三眞이 자리잡습니다. 대우주를 이루는 천지인天地人 세 주체에 삼신의 광명과 신성이 동일하게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단고기』는 <하늘에는 삼신, 땅에는 삼한, 인간에는 삼진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이 같은 삼신三神문화가 국가경영원리로 현실에 제도화된 것이 단군조선 때 삼한관경제입니다. 하늘의 법도에 따라, 삼신의 원리에 따라 나라를 연 단군왕검은 강토를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중앙부에 해당하는 요동과 만주지역이 진한으로 대大단군이 이를 통치하고, 요서지역인 번한과 한반도의 마한은 각각 부副단군이 맡았습니다. 진한의 수도는 아사달(지금의 하얼빈으로 추정), 번한의 수도는 안덕향(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인근으로 추정), 마한의 수도는 백아강(지금의 평양)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897년 고종황제는 <우리나라가 본래 삼한의 땅이니 그 ‘한’을 되살려 국호를 대한으로 정할 것>을 명합니다. 삼한에서 대한민국의 ‘대한’이 유래했고, 삼한은 삼신사상과 삼한관경제에서 나온 것입니다.

◎ 실제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삼한관경제가 도움이 됐을까요?
▶물론입니다. 제6세 달문단군 때 신지神誌(관직명) 발리發理는 ‘신지비사神誌秘詞’로 알려진 서효사誓効詞(삼신께 제사지낼 때 서원하던 글)를 지어 삼한땅 세 곳의 수도를 각각 저울추, 저울판, 저울대로 비유했습니다. 저울을 이루는 이들 세 요소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물건의 무게를 달 수 없듯이, 삼한관경제가 조화를 이루고 잘 보전돼야 나라가 흥할 것이라 한 것입니다. 실제로 삼한관경제가 잘 유지되는 동안 단군조선은 번성했고 반면, 삼한관경제가 와해되면서 나라도 멸망했습니다.

제21세 소태단군 말기에 지방장관 서우여와의 내전 끝에 정권을 차지한 제22세 색불루단군은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 이름을 삼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꿉니다. 물론 진한이 갖고 있던 병권兵權은 여전히 진조선이 갖고 있기는 했지만 이 무렵에는 그동안 안정된 삼한관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기록된 것처럼 ‘삼한’과 ‘삼조선’은 차이가 있습니다. 삼한은 행정편의상 조정朝廷을 나눈다는 것인 반면 ‘삼조선’은 단순히 조정을 넘어 통치권력을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제43세 물리단군 말기에 사냥꾼 우화충의 난을 평정하고 스스로 권좌에 오른 제44세 구물단군은 국호를 대부여로 바꿉니다. 이미 이때 번조선과 막조선 또한 병권을 갖게 되면서 중앙의 진조선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통치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됐습니다. 삼한관경제가 깨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군조선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처럼 단군조선이 흔들리면서 옛 삼한의 유민들이 한반도의 한강 이남으로 내려옵니다. 그러고는 다시 삼한시대를 엽니다. 이것이 이른바 후後삼한으로 지금 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삼한연맹三韓聯盟입니다.

47대 제왕이 이어온 대제국


◎ ‘단군이 나라를 열고 홀로 단군조선을 다스렸다’는 내용이 뇌리에 박혀서인지, 마흔일곱 분의 단군이 2,096년 동안 단군조선을 경영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선뜻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동안 단군조선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며 명백한 역사다, 또 단군이란 것은 단군조선을 통치한 역대 마흔일곱 분 제왕들의 칭호다, 거듭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역사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은 단군왕검이다 하면 단군조선을 개국하고 다스린 한 사람의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단군은 단군조선 때 임금을 부르는 명칭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대통령이 고유명사 아닌 보통명사, 칭호인 것처럼 말이죠. 단군조선은 초대부터 제47대까지, 마흔일곱 분의 단군들께서 2,096년을 다스린 제국이었습니다.

◎ 고조선이 2천년을 이어갔던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요.
▶서양의 로마 역사도 2천년을 넘어요. 고대 이집트 왕국은 서기전 3200년부터 알렉산더 대왕 시대까지 무려 3천년이나 됩니다. 2천년 역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예요. 이집트 왕국은 31개의 왕조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단군조선도 하나의 왕조, 다이나스티(dynasty)가 아니라 몇 개의 왕조로 나눠집니다. 왕위 계승이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던 거죠.

가령 제21세 소태단군 말기에는 대단히 심각한 국가 위기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상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욕살(지방장관) 고등高登과 해성, 또 다른 욕살 서우여徐于餘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난 겁니다. 이때 소태단군은 옥좌를 서우여에게 넘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단군께서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정권을 넘겼습니다. 단군의 자리에 오른 색불루는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단군조선의 제2왕조 시대를 열고 삼한을 삼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꾸었습니다. 국사교과서를 통해 잘 알려진 단군조선의 ‘8조 금법禁法’을 제정한 이도 색불루 단군입니다.

제2왕조 시대가 시작되고 삼한관경제가 흐트러지면서 점차 민생, 경제와 나라의 질서가 어수선해졌습니다. 제43세 물리단군 때 우화충이 역모를 꾀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호칭하며 도성을 공격합니다. 물리단군은 피신하는 도중 사망하고 백민성의 지방장관인 구물丘勿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했습니다. 그러고는 제44세 단군에 즉위해 단군조선 제3왕조 시대를 열었습니다. 구물단군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꾸고 질서를 잃은 국가재건과 경제중흥을 위해 애썼지만 이미 흔들린 나라를 바로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46세 단군 때 중국 연나라의 침입이 계속되고 내란까지 일어났습니다. 나라가 붕괴 직전까지 갔을 때 장군 고열가가 내란을 진압하고 제47세 단군으로 즉위합니다. 세습 아닌 실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 고열가가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입니다.

이러한 여러 단군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조선은 한 사람, 한 왕조로 일관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흔들릴 때 왕조와 무관한 실력자가 나타나 쿠데타나 전공戰功을 바탕으로 왕위에 올랐고 새 왕조를 열었습니다. 이처럼 생생하고 뜨거운 역사에 대해 누가 감히 신화 운운 할 수 있겠습니까.

◎ 단군조선이 대제국이었다면 영토도 아주 넓었겠지요?
▶광대한 영역이었습니다.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내몽골 지역, 서로는 현재 중국의 섬서성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기록을 토대로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단군세기』에 보면 초대 단군왕검은 대홍수로 위기에 빠진 중국의 순임금에게 ‘오행五行의 원리로 물 다스리는 법’을 전한 이후 유주幽州, 영주營州를 단군조선의 영토로 귀속시켰습니다. 당시 유주, 영주는 오늘날 중국의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입니다.

역시 『단군세기』에 따르면, 제13세 흘달단군은 하나라의 마지막 걸桀왕을 정벌할 때 낙랑 군사와 합세해 빈邠과 기岐를 공격해 강역을 더 넓혔습니다. 빈과 기는 현재 중국 섬서성의 지역들입니다. 섬서성은 하북성에서도 대륙의 서쪽으로 더 들어간 곳입니다. 여기서 낙랑은 배달국 시대의 태호복희씨 때부터 있었던 지명으로 단군조선 시대에는 단군조선의 한 제후국이었습니다.

삼한에서 삼조선 체제로 들어서면서 제45세 여루단군 때 연나라가 단군조선의 국경지대인 운장雲障을 공격해 이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이내 삼조선은 힘을 합쳐 빼앗긴 이곳을 되찾습니다. 운장 지역은 지금 중국 하북성 북부의 난하 서쪽입니다.

단군조선의 강역이 대륙 깊숙이 뻗어 있었다는 사실은 고고학 발굴로도 뒷받침됩니다. 20세기 후반에 발견, 발굴된 하가점 유적지가 그것입니다. 중국의 내몽골 지역 적봉시에 위치한 하가점 유적지 하층下層에서 비파형 청동검이 나왔습니다. 이는 청동기 문화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입니다. 그런데 하가점에서 발견된 청동검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다른 것과 그 형태가 동일합니다. 이는 하가점 역시 단군조선의 영역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한마디로 단군조선은 한반도에서부터 요서지역 그리고 섬서성 일대까지, 동북아 광역을 아우르던 대제국이었습니다.

고도의 청동기문명시대


◎ 단군조선의 유물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단군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요서지역의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견된 비파형 동검이 그 상징적인 유물입니다. 이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아주 단단합니다. 납 성분이 많이 섞여서 상대적으로 단단하지 못한 중국의 동검들과는 다릅니다. 녹는 온도가 서로 다른 청동과 아연을 합금하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단군조선의 청동기 문화수준은 아주 높았습니다. 청동단검을 만드는 거푸집(용범鎔范)도 발견되어 동검이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대거 제작한 물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기술이나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물은 다뉴세문경(여러 꼭지 잔무늬 거울)입니다. 청동에 새겨넣은 선의 굵기가 머리카락 한 올에 불과한 이 청동거울은 세계에서 오직 단군조선 문화권에서만 발굴됐습니다.

단군조선은 청동기 유물들과 함께 거석巨石 유적인 고인돌도 많이 남겼습니다. 고인돌은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입니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단군조선의 영역이던 만주와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한반도의 경우만 해도 대략 4만 기基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무게가 적게는 10t에서 크게는 300t에 이르는 돌을 채석해서 무덤을 조성하려면 상당히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군조선은 그만큼 조직적인 국가체제와 권력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인돌은 그 주기능이 무덤이었지만 갈수록 기능이 확대돼 제단 또는 마을의 상징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단군조선 때는 삼베, 면, 비단을 생산하고 염색된 천을 활용해 다양한 색깔옷을 만드는 등 복식문화도 발달했습니다. 당시 직조법織造法과 염색기술은 중국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단군조선 시대 유적지에서 나오는 복식服飾 유물들을 보면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장식했다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일부 강단사학자는 단군조선이 유치한 단계의 부족국가였다, 그런 주장을 내놓는데 당장 유물의 종류나 그 기술수준들을 따져보면 분명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 단군조선 시대에도 종교가 있었나요? 유교나 불교 같은 것은 그 시대보다 훨씬 뒤에 나온 것인데요.
▶단군조선은 환국에서 배달국을 거쳐 계승된 신교神敎의 이념과 가르침을 국가경영과 개인생활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신교란 문자 그대로 ‘신神의 가르침’입니다. 신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고 역사와 문화를 일구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신은 인간과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통치자 하느님이신 삼신상제님입니다. 창세 이래 우리 한민족은 천상의 하느님을 상제님 또는 삼신상제님이라 불러왔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삼신과 한 몸이신 상제님)> 또는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삼신은 곧 한분이신 상제님)>라 하여 우주 통치자 하나님의 존재와 본래 호칭을 명확히 알려줍니다.

단군왕검은 백성의 추대로 임금에 오르면서 나라를 연 10월 3일 천제天祭를 지냈습니다. <환인과 환웅 성조聖祖들의 가르침을 받들고 하늘의 뜻을 계승해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겠다>고 삼신상제님께 고한 것입니다. 이렇듯 초대 단군왕검을 시작으로 역대 단군들은 제위에 오를 때나 국가 중대사 때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봉행했습니다. 신교는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생활문화이자 전통이고 신앙이었습니다.

단군조선의 도읍지인 아사달은 ‘삼신께 제사지내는 곳’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단군왕검이 운사雲師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쌓은 참성단은 단군조선의 경영이념인 제천祭天문화의 자취를 증거합니다. 역대 단군들은 상제님께 폐백幣帛을 바쳐 은혜에 감사하며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번영을 기원했습니다. 이는 곧바로 온 백성의 민간신앙이 되었습니다.

삼신문화와 제천문화, 그 가르침의 핵심은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이었습니다. 일찍이 환국 시절의 환인천제 때부터 있었던 이념입니다. 제11세 도해道奚단군이 선포한 「염표문念標文」을 통해 홍익인간의 큰 뜻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삼신〔일신〕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 사람의 성품은 삼신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대목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우주 광명과 통해 있는 신령한 존재이니 삼신의 가르침으로 그 신성을 일깨워서 천지의 뜻과 이상을 펼치는 존재가 되게 하여 이 세상을 광명한 세계로 만들어라.> 바로 이것이 환국, 배달, 단군조선을 거쳐 지금의 대한민국까지 9천년 한민족사를 관통하는 궁극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이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북아시아를 지배한 천자국


◎ 단군조선 2천여년 동안 주변국, 특히 중국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단군세기』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초대 단군 때부터 중원 땅(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중원이 단군조선에 예속된 관계였습니다. 하나라가 등장하기 직전 순임금 때 중원 땅에는 대홍수가 일어났습니다. 물난리는 9년 동안이나 계속됐고 치수를 책임져야 하는 순임금은 위기에 빠졌습니다.

당시 치수사업 책임자였던 관리(곤鯤)는 치수에 실패하는 바람에 순임금에 의해 처형됐습니다. 그 뒤를 이어 곤의 아들인 우禹가 치수사업을 맡았습니다. 그는 당시 동북아의 강대국이던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에게서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이 기록된 금간옥첩을 전해 받았습니다. 이 오행치수법으로 오랫동안 중원을 괴롭히던 홍수 문제를 마침내 해결했습니다. 그러고는 민심을 얻어 순임금의 왕위를 물려받아 임금이 되고 하夏나라(서기전 2205~서기전 1766년)를 열었습니다. 이미 순임금 때부터 단군조선에 비해 약세였던 중원은 홍수 해결에 도움을 받은 이후, 하나라 때 와서도 정치적으로 단군조선에 예속됐습니다.

하나라에서 상尙나라로 왕조가 교체(서기전 1766년)되는 데도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힘(정치력과 군사력)이 작용했습니다. 하나라는 폭군 걸의 폭정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이에 상나라의 초대 탕왕이 폭군 걸을 정벌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단군조선의 제13세 흘달단군은 처음에는 걸을 지원하였으나 걸의 폭정이 개선되지 않자 결국 탕을 지원해 이기게 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상나라(서기전 1767~서기전 1122년) 역시 선대 왕조들에 이어 단군조선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상나라의 제12대 하단갑 때부터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 전까지 이어지던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심지어 제22대 무정 때 이르러서는 단군조선의 변방을 침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단군조선의 제21세 소태단군과 22세 색불루단군이 상나라를 쳤습니다. 단군조선과의 대결에서 패전을 거듭하던 상나라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상나라 이후 550년 동안 중원을 지배한 주나라(서기전 1122~서기전 256) 역시 동방 동이족의 지원을 받아 나라를 세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주나라는 한족漢族이 일으킨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나라를 창건하고 융성케 한 문왕과 무왕은 모두 동이족 출신입니다. 이들은 상나라보다 군사력이 약했으나 동이족, 곧 단군조선의 지원을 받아 주나라를 창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주나라의 건국(서기전 1122년)을 도운 동이족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강태공입니다. 나중에 주나라의 무왕이 강태공을 산동반도의 제나라 제후로 봉한 것도 동이족 출신인 그가 동이족을 다스릴 적임자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문왕과 무왕 이후 주나라는 앞선 왕조들처럼 단군조선에 조공과 방물을 바쳐 예를 표했습니다. 이런 역사기록들은 일찍이 단군조선이 동북아를 지배한 천자국天子國으로 중국의 고대 세 왕조인 하·상·주를 정치적으로 지배했음을 보여줍니다.

◎ 단군조선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이른바 기자조선箕子朝鮮입니다. 그 실체는 무엇이고 단군조선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기자는 중국 상고사의 상나라 말기 때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의 상고사를 기록한 『상서대전』(후한 때의 복생이 『서경』을 풀이한 책)에 의하면 주나라의 건국자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를 풀어주었습니다. 이때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버렸는데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이 그를 조선 왕으로 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그보다 더 후대에 나온 사마천 『사기』의 「송미자세가」에는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이라 하여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 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전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제후로 봉해진 이후의 이야기는 약간 다릅니다. 기자가 조선으로 달아났다는 『상서대전』과는 달리 『사기』는 기자를 제후로 책봉하였지만 ‘주나라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과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은 바로 기자가 무왕의 신하였던 적이 결코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마천이 자신도 모르게 모순되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고백한 꼴이 됐습니다. 기자라는 인물이 조선의 왕으로 봉해진 역사적 사실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자가 조선으로 가버렸다, 혹은 기자를 조선 왕에 봉했다, 하는 기록은 그 자체가 이미 동방 땅에는 조선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는 점입니다. 기자가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인 단군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단군조선이 존재해 왔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기자조선 이야기는 <한민족사가 일찍부터 중국사에 예속됐다>는 것을 내세우려 날조된,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왜곡 사례입니다.

◎ 지난 대담들에서 위만조선에 대해 ‘아주 배은망덕한 정권이며 위만조선이라는 말 자체가 크게 왜곡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과서에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서술되는 위만조선의 실체는 또 어떤 것입니까.
▶위만은 한나라 고조高祖 당시 변방 연나라의 장수였습니다. 그의 상전인 연나라 왕 노관盧綰이 정치적 문제로 흉노로 망명하면서 연나라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연나라 사람들이 조선으로 망명했는데 위만도 그런 연나라 유민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명과 함께 당시 요서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번조선의 준왕에게 투항했습니다.(서기전 195년)

준왕은 그런 그를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번조선의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했습니다. 관직까지 준 것입니다. 그런데 위만은 그런 은혜를 입었음에도, 오히려 자기 관할지역에서 몰래 세력을 길렀습니다. 그리고 번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으로 쳐들어가 준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망명한 지 불과 1년 만입니다.(서기전 194년)

이처럼 위만이 난을 일으켜 세운 부도덕한 정권을, 나중에 『삼국유사』에서 그리고 지금의 강단사학계에서 이른바 위만조선이라 부릅니다. 그러면서 이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또다른 조선이다, 그렇게 함부로 말합니다. 그러나 앞서 위만의 행태를 따져보면 위만조선은 결코 ‘조선’이란 국호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 한반도의 서쪽 영토 한 귀퉁이를 잠시 강탈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합니다. 그 이름에 조선이 들어갔다 해서 단군조선을 계승했다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이 같은 역사의 진실을 바탕으로 다시 쓰여야 합니다. 단군조선의 국통을 정식으로 계승한 나라는 북부여였습니다.

◎ 아래쪽 중국 말고 위쪽의 북방민족, 특히 단군조선 시대에 활발한 활동을 펼친 흉노와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단군조선이 대제국이었던 것처럼 북방에서는 유목민족인 흉노가, 몽골고원에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진나라의 진시황도, 유방이 세운 한나라도 흉노를 제어하는 것이 주요 국가과제였습니다. 저 만리장성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흉노의 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중 「흉노전」에는 흉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미 요순시대 이전부터 <북방에 산융, 험윤, 훈육 등의 여러 종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흉노의 역사가 사마천 시대를 기준해서 그보다 2천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죠.

우리 『단군세기』에는 흉노의 기원에 대해 좀더 자세한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제4세 가륵단군 때 열양의 지방장관인 삭정이 죄를 지어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킵니다. 나중에 그를 사면하고 다시 약수 지방의 관리로 봉했는데 다름 아닌 그가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 내용입니다. 약수弱水는 중국 감숙성을 흐르는 강으로 후일 흉노가 주로 활동한 지역 가운데 한 곳입니다. 앞서 『단군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흉노는 단군조선에서 나온 나라이고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흉노의 여러 풍속과 문물은 한반도에 살던 동이족과 여러 가지로 공통점을 보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흉노의 동복銅鍑(청동솥)입니다. 이 솥은 흉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 솥이 한반도의 남단 가야 지역뿐만 아니라 저 멀리 훈족이 활동하던 동유럽 여러 곳에서도 출토됐다는 사실입니다. 4세기 후반 이후 무려 한 세기 동안 동유럽 일대에 자기 영역과 세력을 구축했던 저 유명한 훈족도 사실은 흉노의 후예였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죠. 말하자면 단군조선의 문화와 문물은 흉노를 거쳐 동유럽까지도 전해졌다, 유추할 수 있습니다. [동복 사진]

국통을 이은 북부여와 고구려


◎ 오늘 단군조선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 국사교과서에는 단군조선 부분을 그야말로 구색만 갖추듯 슬쩍 다루었구나,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삼국유사』는 단군조선의 초대 단군왕검의 건국 스토리를 곰과 호랑이의 전설로 폄하하고 심지어 밑도 끝도 없이 ‘단군이 1,908세를 살았다’고 전합니다. 1,908년이란 기간은 초대 단군인 단군왕검 한 사람의 치세가 아니라 43세 물리단군 때까지의 연대를 말합니다. 44세 구물단군은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단군이 된 후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었거든요. 그런데 이를 『삼국유사』는 단군왕검 한 사람의 치세인 것처럼 잘못 기록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 『삼국유사』는 그렇게 기록된 『위서魏書』라는 책의 일부를 그대로 전재하였던 겁니다. 한 사람이 2천년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신화가 된 거죠.

일제 때는 물론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학과 역사교육을 장악한 식민사학자들은 그 같은 기록을 빌미로 단군조선을 신화로 전락시켰습니다. 단군조선이 신화가 되었으니 그 앞의 환국과 배달 역시 근거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은 그 선대로는 환국과 배달을 계승한 대제국이었습니다. 후대로는 해모수의 북부여로 그 국통이 계승됐습니다. 이 해모수의 4대 손孫이 바로 고구려를 세운 주몽입니다. 환국이 열고 배달이 계승한 한민족의 역사, 그 국통은 배달 이후 단군조선에서 북부여로, 다시 고구려로 이어졌습니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바르게 알면 이처럼 우리 국통맥부터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잘못된 역사서술이나 역사교육도 사라질 것입니다. 역사는 한 나라, 한 민족이 걸어온 오랜 자취입니다. 그런 생생한 역사를 뜬금없이 신화로 치부해서도, 자기들 이해에 따라 이리저리 왜곡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국수주의에 젖어 우리에게 없던 역사를 새로 만들어 넣자거나, 우리 민족에게 유리한 쪽으로 억지로라도 끊어졌던 역사를 이어붙여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엄연히 우리 한민족이 걸어온 역사, 그 명명백백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밝혀내고 그 정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두고 보면 저절로 그렇게 될 터인데, 아무리 식민사학자들이 극렬하게 막으려 해도 우리 역사의 진실은 만천하에 그 모습이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