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번군에 대한 이병도의 사악한 주장은 폐기되어야 한다

2021.07.15 | 조회 35

진번군에 대한 이병도의 사악한 주장은 폐기되어야 한다.

()나라는 BC 108-107년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을 설채했으며, 토착세력의 지속적인 저항을 받자 한()26년 후인 BC 82년 진번군(辰番郡)에 속했던 속현들을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屯郡)에 속했던 속현들을 현도군(玄菟郡)에 각각 관할하도록 했다.

따라서 최초 조선현(朝鮮縣)을 비롯해서 패수(浿水), 점제(점제), 수성(遂成), 증지(增地), 사망(駟望), 둔유(屯有), 누방(鏤方), 혼미(渾彌), 탄열(呑列) 11개 현으로 출발했던 낙랑군은 진번군의 속현 15개를 추가로 관할하게 되었다.

 

진번군의 15개 현은 통치가 어려웠으므로 15개 현() 중에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소명(昭明), 대방(帶方), 함자(含資), 열구(列口), 장잠(長岑), 제해(提奚), 해명(海冥) 7개현만 낙랑군 남부도위(南部都尉)로 남겨두었다.

 

여기에 설치된지 26년 만에 폐기된 진번군 중에 대방현(帶方縣)이 낙랑군 남부도위에 속해 남아있게 된다. 후에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 연간(196~220)에 공손강(?~209)이 둔유(屯有)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帶方)군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손강이 둔유(屯有)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帶方)군으로 삼았다는 구절을 인용해서 이병도는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黃州牧)조를 보면 황주목, 본 고구려 동홀(冬忽)’이라고 하고 그 밑의 분주(分註)일운(一云)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 하였다. 여기 우동어홀의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서로 근사한데 우리의 주의를 끈다. 속히 말하면 둔유동어는 즉 같은 말의 이사(異寫: 달리 적음)가 아닌가 생각된다. ()는 고구려 지명 위에 흔히 붙는 것으로서 방위의 상(: )을 표시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추찰된다. 하여튼 둔유현이 지금의 황주(黃州)에 해당하리라고 생각되는 점은 비단 지명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 지리상으로 보더라도 적중(的中)하다고 믿는 바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은율군은 고구려 시대의 율구(栗口)’ 혹은 율천(栗川)’이니 율구(栗口)는 열구(列口)와 음이 거의 같고 율천(栗川)도 열수(列水)의 이사(異寫)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열구현이 오늘의 은율 부근이라 함에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또한 주류 사학계는 진번군과 대방군을 같은 지역으로 보고 있지만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고대 사료는 전무하다. 진번군에 대한 사료 자체가 희소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크게 정리하면 진번군이 요동이나 고구려 지역에 있었다는 북방설과 황해도 등지에 있었다는 남방설이 있다.

 

이병도는 북방설에 대해 일소(一笑)에 붙이고도 남음이 있다고 일축하면서 진번군=대방군=황해·경기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근거로 든 것은 고대 사료가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중국학자 양수경(楊守敬: 1839~1915)<회명헌고>(晦明軒稿)에서 대방군의 7개 현을 옛 진번군의 잔현(殘縣)이라고 주장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아무런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양수경의 주장에 대해 이병도는 어떻든 대방 7현을 고() 진번의 잔현(殘縣)으로 추단(推斷: 추측해서 단정함)한 것은 틀림없는 탁견으로 진번 문제 해결에 한 서광을 비추어주었다”(<한국고대사연구> 114)라고 극찬했다.

 

대방군이 황해도와 경기도에 있었다는 주류 학설은 이병도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의 와세다대 스승이자 조선사편수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용역을 받아 쓴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 1913)에서 낙랑군의 남부에는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대방군(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방)이 분치되었다라고 쓴 것이 시초이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진번군을 충청·전라북도 지역으로 비정하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충청도 지역으로 비정했는데, 이들 왜놈들이나 이병도같은 사악한 자들의 대방에 대한 왜곡된 억측은 반드시 잘못이 밝혀지고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대방(帶方)은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는 고구려 국경 부근의 길목인 수나라 우 12군의 진격로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提奚),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는데, 11번째 진격로에 대방(帶方)이 있으며, 황해도에 대방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 함자(含資), 6) 제해(提奚)가 치소(治所)인 대방(帶方)과 함께 수양제의 평양으로 향하는 진격로에 있지 결코 황해도에 있지 않다.

 

수양제의 좌12(左十二軍)1) 누방(鏤方), 2) 장잠(長岑),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夫餘),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로 나아가라고 명했는데, 치소(治所)인 낙랑을 비롯해서 1)누방(鏤方), 2) 장잠(長岑) 등이 추양제의 침략경로에 있어서 이곳들은 황해도와 전혀 관련 없는 수나라와 고구려 국경부근 고구려의 땅이었다.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사기><한서>(漢書)를 근거로 진번은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대방군을 설치한 공손강 가문은 그 부친 공손도(公孫度)가 후한 말의 혼란기에 요동왕을 자칭했다가 사마의(사마중달)에게 패하여 가문과 그 추종자 8천명이 몰살당했던 가문으로 위나라와 다투는 중에 황해도로 건너올 겨를은 결코 없었다. 국사매국노 이병도나 왜놈 역사왜곡자들이나 황해도 대방설을 추종하는 자들은 반드시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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